김구

한국의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대한제국승려, 교사,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정치인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남북통일 활동가이다. 항일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김구
金九
Kim Gu in 1949.jpg
대한민국 임시정부제9·10대 국무령
임기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부통령 이인성
전임: 홍진(제8대)
후임: 이동녕(제11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제18·19·20대 주석
임기 1940년 3월 13일 ~ 1947년 3월 3일
국가 부주석 김규식
전임: 이동녕(제17대)
후임: 이승만(제21대)

신상정보
국적 조선 (1876년 - 1897년)
대한제국 (1897년 - 1910년)
일제강점기 조선 (1910년 -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년 - 1948년)
대한민국 (1948년 - 1949년)
출생일 1876년 8월 29일(1876-08-29)
출생지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
(現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대한민국 기준))
(現 태탄군 지촌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준))
사망일 1949년 6월 26일(1949-06-26) (72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본관 안동
정당 한국독립당 (1930년, 상하이)
한국국민당 (1935년, 항저우)
통합 한국독립당 (1940년, 충칭)
배우자 최준례
종교 감리회
군사 경력
서훈 건국훈장1대한민국장.png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독립운동가 김구의 필체

황해도 해주에서 김방경의 25대손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하다가 부친 3년상을 탈상한 뒤엔 기독교에 입문하였다.[1][2]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 활동했고, 안악양산학교, 재령보강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안악양산학교 재직 중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조선총독부에 연행되어 5년간 수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 정부 및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하 임정)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내무부위원, 내무부 경무국장 등을 지냈다. 1921년~1922년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자유시 참변 등 임시 정부 내 좌우이념 갈등이 극심했을 때 임정고수파(현상유지파)의 입장에 있었다. 1924년 7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다. 이후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노동국 총판, 국무령, 내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등을 거쳤다. 1931년 만주 사변 직후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이후 임시 정부는 일본 제국의 표적이 되어 1940년 5월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외무부장, 재무부장 등을 지냈다. 1938년 5월 7일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지만 구사일생 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였고, 1940년 10월 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정 주석을 역임하였다.[3][4][5][6][7]

광복 이후에는 이승만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임정 법통 운동을 추진하였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9년 5월 19일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재합작이 태동하였으나,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총격에 서거하였다.

본관은 구 안동(安東), 자(字)는 연하(蓮下),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8] 초명은 창암(昌巖)이고,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임정 이동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고, 부친상 탈상 후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사후에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 (1876 ~ 1949)편집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基洞)[9][10][11][12] 에서 (구)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郭樂園, 당시 17세) 부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7대 독자로 알려져 왔으나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4형제였고 할아버지 김만묵, 증조부 김영원에게도 각각 형제가 있었다.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충렬공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었다.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의 옥 당시 그의 11대조로 사과(司果)를 지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개성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해주로 피신해 왔다. 해주군 서쪽 80리에 있는 백운방 텃골, 팔봉산(八峰山) 양가봉(楊哥峰) 아래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여 연명해왔다. 생계를 위해 군역전(軍役田)을 짓게 되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부터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한다.

이렇게 되자 텃골 근방의 양반이던 덕수 이씨와 진주 강씨 일족에게 대대로 천대를 받게 되었다. 김구의 회고에 의하면 '우리 집안의 처녀가 강씨, 이씨 문중으로 출가하는 것은 영광이지만 두 문중의 처녀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13]'라 하였다. 그러나 김구의 7대조 할아버지인 김언함(金彦喊)의 부인이 진주강씨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상민이었던 가계는 김구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 소년기의 창수로 하여금 과거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광복 이후의 김구의 가계를 소개한 것은 경순왕의 후손임을 강조했는데, 1947년도왜실기》의 한국어 번역판의 서문을 쓴 이승만은 그가 명문의 후손 임을 강조했고, 안재홍(安在鴻)도 김구가 암살된 직후인 1949년 8월에 쓴 백범김구선생약사(白凡金九先生略史)의 서두에서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니 그 선조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후예라고 기술하였다.

김만묵(金萬默)의 둘째 아들로 24세의 미혼이었던 아버지 김순영은 그의 누이동생의 시누이(매제의 자매)가 되는 장연군 목감방(牧甘坊) 문산촌(文山村) 출신 현풍곽씨의 딸을 삼각혼이라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한다. 태어날 무렵 난산이었던 탓에 일가의 권유로 그가 태어나던날 밤 그의 아버지는 지붕위로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흉내낸 끝에 순산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가 태어나던 날은 그의 조모가 사망한 날이었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아버지 김순영은 학식은 없었으나 이씨, 강씨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혔기에 해주감영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다. 그를 두려워한 양반들은 그를 존위로 천거했다가 도존위로 승진시켰으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잘하고 양반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다. 하위 감투를 썼음에도 양반들에게 굴하지 않자 양반들은 아버지 김순영에게 공금흠포죄(公金欠逋罪)를 씌워 바로 해고해 버렸다.

유년기 (1880 ~ 1888)편집

유년기에 그는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4세 때 백부 김백영(金伯永)의 상을 당하였고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 때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14][15]

문중에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 중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이 친척 대부가 서울에 다녀오던 길에 자녀 결혼식에 쓸 갓을 샀다가 양반에게 빼앗기고 강제로 찢김을 당했다. 이 일로 몹시 충격을 받은 소년 창암은 과거 시험에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부터 한글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16]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이러한 학문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었다.[17]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하였다.[18] 한 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 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18]

청소년기 (1888 ~ 1892)편집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 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그는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14] 이때 목동 노릇도 했지만 그는 학업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이름있는 스승을 모실 수 없어, 큰어머니 정씨의 친정 6촌인 정문재의 서당에 부탁하여 무료로 통학하면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1892년 정문재의 권고로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김구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며 자신의 이름 대신 아버지 김순영의 이름으로 응시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 시험 중 양반이나 부자들이 돈을 주고 대신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 대신 과거를 보게 하거나 매관매직 하는 등의 시험부정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서당 공부를 그만두었다.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의상서로 관상 공부를 하였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과 동네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을 하였다.[19]

청년기편집

동학농민운동 참가 (1893~1895)편집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신도(信徒)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14] 입교한 지 1년도 안돼 연비(신도)를 수백 명을 포덕하였으므로 이름이 알려져, 접주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상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894년초 김구가 거느리던 연비의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감에 따라 그는 18세의 나이로 수백 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3년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연비의 명부를 보고하라는 연락이 왔기 때문에 황해도에서 황해도 동학을 대표하여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접주 대표를 선발할 때 황해도 대표자로 선발되었다.

1894년 가을 최시형을 찾아가는 황해도 동학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충북 보은에 찾아가서 최시형을 만나고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귀향길에 한성에서 동학농민군 거병소식을 접하였고,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해주 팔봉에서 거병하여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17] 그의 부하는 700여 명이었으나 일본 제국의 군부대가 쏘는 소리에 놀라서 모두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고 한다.[18]

이후 김창수의 부대는 조직 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이동엽 일파의 기습공격으로 김창수의 포수 부대는 패하고, 고열과 함께 홍역을 앓던 그는 몽금포로 피신하여 몽금포에서 하은당 스님의 치료를 받으며 3개월간 잠적해 있었다.[14] 한편 김창수의 부대를 접수하려고 이동엽은 그의 최측근 영장 이종선(李鍾善)을 잡아 처형하였다. 아끼는 부하를 잃은 뒤 그는 이종선을 묻어주고 안태훈(安泰勳)을 찾아가게 되었다.

동학군 장수로 있을 때 안태훈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895년(19세), 동학농민운동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세워 경성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의 원조와 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1894년 12월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 명을 크게 이긴 적이 있을 정도로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지역 유력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한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품을 사랑하여, 동학이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불가침협정과 공동원조계획을 세웠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자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된 것이다.[20]

산채 은신과 고능선의 가르침 (1895~1896)편집

 
스승 후조 고능선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안태훈은 그를 배려하여 1895년 2월 그의 부모까지 모셔다가 산채에 함께 살게 했으며, 무례하게 대하는 측근들을 혼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안태훈의 장남 안중근을 처음 만났으나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태훈의 사랑에 들다 성리학자이자 화서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 후조 고능선을 만나 감화받았는데, 그로부터 학문, 성리학대의명분과 의리, 위정척사적 가르침을 받고 춘추대의와 의리에 눈뜨게 되었다. 고능선은 청년 김창수에게 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해있음을 말해주었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고능선화서학파이항로의 문인인 유중교의 제자이자 의병장 유인석의 동문이었으며 노론 계열이었다. 고능선은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 하며 청나라로 갈 것을 권하였다.

20세에 청나라행을 결심, 청나라로 가기 전 안태훈의 사랑채에서 참빗장수를 만났다. 연령은 김구보다 8~9세 위로 전라북도 남원 출신 김형진(金亨鎭)으로 그를 만나 백두산까지 기행하였다. 청년 김창수는 김형진을 길동무로 삼아 청나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고, 백두산을 관람하고 만주를 돌아서 북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만주 의병부대 활동 실패와 귀국편집

신천을 떠나 평양 을밀대와 모란봉에서 휴식하다가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 고원, 정평, 함흥에 도착했다. 함흥에 도착해서 함경도의 교육제도가 황해도평안도보다 발전된 것에 탄복하였다. 단천, 혜산진을 지나 백두산 참배는 위험하다 하여 중단하고 만주 통화(通化)로 갔다. 김이언을 만나기 전 청나라 장교를 만났는데, 중국어를 모르던 그는 종이한자로 써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청일전쟁 당시 평양에서 전사한 청나라 장수 서옥생(徐玉生)의 아들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실패하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계속 불구대천의 원수임을 알리자 청나라 장수는 자신은 금주(錦州) 출신으로 집안에 5백명의 가병이 있으며, 청나라로 동행할 것을 권하였으나, 김이언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 정중히 사양하였다.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김이언의 부대가 강계성을 습격할 때는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성에 들어가 화약을 사 오는 일을 하였다. 화약을 사오던 길에 압록강에 얼음에 빠져 동사할 위기에 처했으나 동민들의 구조로 살아났다. 강계성 습격 시는 11월 압록강이 완전히 얼어붙을 때로 정하고 공략하기로 결정, 그와 함께 청나라군의 원조를 받아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몸을 숨겼다. 강계성 아래에 몸을 숨겼다가 신천군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귀향하였는데 스승 고능선의 장남 고원명 내외가 병으로 요절하였으므로, 고능선은 김창수를 손녀사위로 삼아 의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22일 안태훈은 해주군의 집사로 추정되는 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검들이 산포를 모아 청계동을 습격하려던 김창수(김구)를 추적했으나 김창수는 도망하고 말았으니, 자신도 김창수의 발자취를 사방으로 추적하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오영섭은 안태훈 자신이 청계동에서 김구를 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어나자 신천군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보신적 조치로 보았다.[21]

치하포 사건과 투옥생활편집

치하포 사건 (1896)편집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 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1896년 2월 하순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진남포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 빙산을 만나면 그는 사람들과 함께 내려 빙산을 의지하여 작은 빙산을 떠미는 방법으로 배를 빼낸 뒤 우여곡절 끝에 치하포 인근 5리 밖의 강 어귀에 정박하였다.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진남포로 간다고 하였으며, 장연 출신이라면서도 서울말을 쓰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인으로 변복한 것을 수상히 여긴 그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이거나 그의 일당으로 단정하였다.

1896년 3월 9일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중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고 발로 차는 등 폭행한 뒤 살해했다. 그의 이름은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였다.[22]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자 일본 육군 중위 신분으로써 조선에 밀파된 군사간첩이라고 기술하였으나,[22]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23] 김구는 현장에서 살인 이유로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에 대한 복수'라고 밝히고, 식당 주인이자 동장(洞長)인 이화보(李化甫)를 시켜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22] 쓰치다 조스케가 소지하고 있던 엽전 8백전 중 선주들에게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방장인 이화보를 시켜 동리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1896년 6월 말 해주부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24]

사형 모면, 옥중 계몽운동, 탈옥 (1896~1898)편집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된 후, 경무관 김윤정은 그에게 일본인을 살해여부를 묻고, 이어 재물을 강탈할 목적이냐고 추궁하였다. 사태가 큰 사안이라 본 경무관 김윤정은 인천부윤 겸 감리사 이재정에게 보고하였고, 이재정의 추국 때 군부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몽백(상복)을 입지 않는 것인데, 국모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도 몽백을 입는 것의 염치없음을 질타하였다. 추국하던 관리들은 부끄러워하여 이후로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하였다.

1896년 9월 10일 일본영사관 경부신곡청 참석하에 회동심리가 열렸고, 삼초(조서)가 작성되었다. 이 재판이 끝나고,1896년 9월 12일 일본영사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는 ‘대명률(大明律)의 인명모살인죄(人命謀殺人罪)’로 김구를 참형(斬刑)으로 처단할 것을 주장하는 의견서를 인천항재판소판사 이재정에게 제출하였고, 다음날인 1896년 9월 13일 인천항재판소 판사이재정은 당시의 형사법인 '형률명례'의 절차(사형선고를 한 후 법부를 거쳐 임금에게 사형집행을 주청하는 절차)에 따라 법부에 조율재처(조율처판)를 건의하였다. 1896년 10월 2일 인천영사관의 압력을 받고 있던 이재정은 김창수에 대한 조속한 처리를 법부에 전보로 건의하였고, 법부에서는 임금에게 마땅히 상주하여 칙명을 받아야 할 사안이라는 답전을 인천감리에게 보냈다.[24] 이에 따라 1896년 10월 22일 법부는 김구를 포함한 11명에 대한 교형(絞刑)을 고종에게 건의(상주안건)하였으나 고종의 재가(사형집행명령)는 이뤄지지 않았고, 1896년 12월 31일 상주안건을 거쳐, 김구가 제외된 1897년 1월 22일 최종 상주안건이 재가되어 김구는 일시적이나마 사형집행을 면할 수 있었다.[24]

이러한 사법적 절차에 따라 사형을 면하게 되는 과정과 내막을 속속들이 알 수 없었던 김구는 자신이 체험했던 사실들을 바탕으로 사형을 면하게되는 과정을 백범일지에 기록해 놓았다. "대궐에 있던 승지 한 명이 살해동기가 '국모보수'라고 적힌 것을 보고 고종에게 보고했고, 고종은 일단 사형 집행을 정지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이 칙명은 인천감리서의 이재정 감리에게 전화로 신속히 전달되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만약 전화개통이 사흘만 지체됐어도 나는 스물한 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고 말았을 운명이었다"라고 썼다.

김구는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 감옥을 학교로 만들었다. 1897년 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은 그의 딱한 소식을 접하고, 동료 상인, 객주들과 함께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25] 뒤에 김구는 김주경의 동생 김진경을 찾아 그의 형 김주경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감옥에서 김구는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김창수가 재소자에게 옥에서 글을 가르치면서 감옥이 서당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일부는 김창수에게 밥을 얻어먹을 목적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글공부에 참여하였다.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면서, 재소자들은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한 간수들을 위한 대서(글을 대신 써줌)를 해주었고 또한 동료 재소자들로부터 민담과 노래를 배웠다. 이때 김구는 그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긴 간수의 소개로 서양의 책인 세계역사와 세계지리 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면서 서양인들이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오랑캐라는 사고를 버리게 되었다.[26] 그러나 중국서적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하였고, 향후에도 영어에 관해서는 문맹이었다 한다.[27]

1898년 3월 19일 김구는 동료 죄수들과 탈옥을 감행하여 성공하였고, 그의 아버지가 대신해서 수감되었다가 1년 후인 1899년 3월 석방되었다.[24]

승려생활 (1898~1899)편집

1898년 3월 탈옥 후 풀밭과 걸식, 민가에 숨어 생활하다가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가을께에 출가자인 공주 출신 이서방 이라는 남자를 따라 공주 마곡사에 도착했다. 먼저 삭발한 공주의 이서방이 찾아와 마곡사에 식객으로 유숙하던 그를 찾아와 "하은당은 이 절 안에 갑부인 보경(寶境)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후하기에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이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하은당을 은사로 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출가 초기부터 불경을 외우는 일과 법당의 허드렛일 도중 실수로 스승인 하은당과 다른 선임 승려들에게 질타를 당하였다. 다른 승려들은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다 고령이라 이 분들이 작고하면 마곡사 법당의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인의 확고한 결심에 의한 출가도 아니며 승려의 길에 뜻이 없었던 백범은 산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승려들과의 마찰 등으로 후회하던 중 이듬해인 1899년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주지인 하은당은 뜻이 그러하다면 보내주겠다 하고 여비로 쓸 곡식을 주어 보내주었다. 이후 이곳저곳 방랑하며 동료 승려를 따라 평양부에 도착, 1899년 4월 동료 승려를 비밀리에 고향에 보냈다가 그를 따라온 부모와 상봉하였다. 식솔들을 이끌고 방랑중 5월 평양 영천암에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다.[25] 그가 환속하자 실망한 동료 승려는 그를 떠났고, 1899년 가을 황해도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아버지 김준영은 성실하게 농업에 종사하면 혼처를 마련해주겠노라며 농사일을 권유하였다.[25] 그러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고 얼마뒤 본향을 떠난다.

계몽운동 및 교육활동 (1900~1910)편집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1년 뇌졸증으로 반신불수가되 투병중이던 아버지 김순영이 사망였다.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 대부인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예수교에 입교시켜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왔다. 2월에는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교회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25] 1903년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백남훈(白南薰)에게 학교를 인계하고, 김구는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28] 1903년 여름에는 농상공부 종상위원(種桑委員)에 임명되었다. 이는 공립학교 교원직과 함께 그가 대한제국에서 맡은 유일한 관직이었다.

1904년 12월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16] 장련 읍내로 이사한 김구 일가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을사조약 반대에 대한 가두연설을 했다.[28] 그러나 정부의 강제진압으로 저지당하였고,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28]

1905년 11월부터 1907년 2월까지 대한매일신보 황해도 장연지사장직을 맡았다.[29]

1906년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 종산리의 서명의숙(西明義塾)에서 교원(敎員)이 되었다.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자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황해도지부 총감(摠監)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학무총감에 선임되었다.[30]

1909년 황해도안악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재령 보강학교(保強學交) 학교장에 초빙되어 학교장직을 겸임하였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 의거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31]

안악사건, 수감생활, 망명준비 (1910~1919)편집

1910년 경성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 때, 그는 신민회 황해도지부의 대표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였다.

망명 중이던 안명근은 한국에 입국하여 배경진·박만준(朴萬俊)·한순직(韓淳稷)과 함께 각 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시키려는 계획 하에 황해도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비밀리에 모으던 중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게 발각, 1910년 12월 27일 평양에서 재령헌병대원에 체포되어 관계자 전원이 구속되었다.[32] 이를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이라 한다. 일제는 안명근사건과 엮어서 황해도 일대의 김홍량(金鴻亮), 김구, 崔明植, 李承吉, 都寅權, 金庸濟 등 안악양산학교(安岳楊山學校) 관련자와 면학회 및 부호, 지식인층 160여명을 체포하였다.[33][34] 그래서 안명근사건을 '안악사건(安岳事件)'이라고도 한다.

1911년 8월 30일 김구는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강도 및 강도미수죄'를 적용받아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았다.[35]

191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의 형을 받은 김좌진과 조우하였다.

1912년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36]

1914년 7월 감형되어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으며, 죄수번호는 55호였다.[37][31]

1915년 8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특별 가출옥되었다.[38]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병으로 죽었는데, 출옥후 어머니 곽씨로부터 소식을 접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1916년 문화 궁궁농장 간검(看檢)에 취임했고, 셋째딸 은경(恩慶)이 태어났다.[25]

1917년 2월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39]

독립운동 및 임시정부 활동기편집

경무국장 시절 (1919~1921)편집

 
경무국장 시절 카이저 콧수염으로 단장한 김구 (1920년)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참여하였다.[40] 1919년 3·1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36]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 정부에 참여, 1919년 4월 22일 임시 의정원 내무부위원에 임명되었다.[4]

1919년 8월 12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부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1919년 9월에는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자신의 소원을 말하며 문지기가 되기를 청하자 안창호는 그에게 경무국장(警務局長)을 천거하였다. 자신의 학식이 낮음을 이유로 경무국장직에 대한 사의를 표하였으나 안창호는 거절하면 젊은 사람들 아래에서 일하기 싫다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하므로 그는 안창호의 임명을 받아들인다. 1919년 9월 11일 경성과 연해주 등 각지의 임시 정부들을 통합하여 상하이에서 통일 임시 정부가 구성되자 김구는 내무부 경무국장에 취임하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였고, 일제의 밀정 검거 활동을 하였다. 경호부장으로 여순근을 임명하고 한인 청년들을 고용하여 경찰, 정보감찰 업무, 밀정색출 업무를 분담시켰으며 동시에 재판소가 없는 임시정부에서 재판장으로서 재판을 행사하였다.

 
부인 최준례(오른쪽)와 장남 김인(가운데)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김구는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41][42] 일본 영사관 경찰은 임정 요인 체포를 위해 경무국장인 그를 사살하려 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스파이 선우갑·강린우(康麟佑)가 왔으나 자발적으로 그에게 이실직고하자 추방하였다. 일본 영사관의 첩자로 독립운동가를 따라 상하이에 나타났던 17세 소년 김도순을 총살하였고, 이후 일본 영사관과 조선총독부의 납치, 암살기도에 시달렸다. 황학선(黃鶴善)은 병원을 차리고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은 뒤 한번에 독립운동가들을 잡아서 약물로 독살하려 했다. 김구는 황학선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1920년 8월 아내 최준례가 아들 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왔다.[25]

 
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맨 아랫줄 왼쪽에서 세번째 앉은 이가 김구(밝은색 양복)

1920년 12월경, 이승만이 임정 인사들의 임시 대통령 현지 부임 요청에 따라 하와이에서 상하이로 밀입국하였다. 김구는 상해 임시 정부에서 이승만과 첫 대면을 하였다. 김구는 대통령 이승만이 참석한 행사의 경호를 담당했다.[43] '이승만과 김구'를 쓴 손세일은 "이승만은 경무국장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김구에 대해 신뢰감을 느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독립운동 기간 내내 지속됐다"고 했다.

1921년 5월 경무국장직에서 물러났고, 후임은 김용원이 임명되었다.

김립 피살 사건 (1922)편집

1922년 2월 8일 김구는 임시 의정원 청원징계과 위원에 선출되었다.[4]

1922년에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건너왔다.

1922년 김구는 소련레닌에게서 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 정부에 제출하지 않은 고려공산당원 한형권김립에 대한 사살령을 내렸다. 이에 1922년 2월 6일 노면직, 오종균 등은 상하이에서 김립 등을 사살하였다.[44][45] 김구는 《백범일지》에 김립이 광둥 여자를 사서 축첩하고 호화생활을 하였다고 하였으나 김립이 호화생활을 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고, 김구가 무고하게 암살을 한 것인지는 현대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1922년 7월 신익희, 안창호, 이시영, 여운형, 조소앙, 이유필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1922년 9월 21일 차남 김신이 출생하였다.

1922년 10월 여운형·조동호·이유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25]

내무총장 시절 (1923~1924)편집

 
임정 요인들(뒷쪽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이석, 김구, 조성환, 송병조, (앞줄)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1923년 4월 9일 내무총장에 선출되었다. 이 당시 임정은 개조론과 창조론이 계속 대립하는 가운데 그는 임정고수파(현상유지파)의 입장에 섰다. 그러나 임정의 해체와 개조를 놓고 국민대표회의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김구는 1923년 6월 25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자격으로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46] 또한 임정을 거부하는 세력에 대한 상하이 추방령을 선언한다. 국민대표대회 소집의 주요 인물이기도 한 박은식을 규탄, 성토하였고 그의 아들 박시창이 찾아와 항의하자 구타하기도 했다.[44]

1923년 12월 상해 교민단에서 자발적인 자율방범대인 교민단 의경대를 설치할 때, 의경대 고문에 추대됐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하이 홍구 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사망하여 프랑스 조계의 숭산로 공동묘지에 장사하였다.[47] 최준례상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했으나, 수배중이라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최준례는 뒤에 불란서 조계 숭산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임정에서는 다른 요인의 부인들과는 다르게 불평불만이나 파란 없이 남편 김구를 내조한 최준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최준례의 비석은 한글학자김두봉이 직접 지어 주었다.

1923년 무렵 국내외 임정 연락망인 연통제가 완전히 와해되면서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김구는 독립운동의 자금 중 상당부분을 미국의 이승만, 안창호 등과 미국 교민들의 성금에 의존하였다. 1923년 이후 구미위원부 소속 허정 등은 구미위원부 통보를 통해 임정으로의 송금을 촉구했고 재미 동포들은 각자의 여유에 따라서 10달러, 또는 20달러 등을 구미위원부로 보내주어 얼마 되지 않아 몇천 달러의 기금이 모였다.[48] 허정은 이 돈을 즉시 당시의 임정 재정부장 이시영에게 보냈다. 허정은 그때는 미국에서 상하이로 쉽게 송금했다고 한다.[48] 이 돈을 받자 김구와 이시영은 곧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허정에게 보냈고, 김구는 자신이 독특한 붓글씨로 쓴 친필 자서전 백범일지(친필)를 허정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48] 미주 동포들이 후원금과 성금을 보내면 그는 친필로 쓴 붓글씨와 백범일지의 사본을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1923년 12월 상해 한인교민단에서 치안조직인 의경대(義警隊)를 설치하였고, 김구는 상해 한인의경대 고문에 추대되었다.

내무총장 도중 1924년 4월 9일부터 4월 23일까지 국무총리 대리를 잠시 겸임하였다. 6월 2일부터 12월 17일까지는 노동국 총판을 겸임하였다.[5][49]

1925년 3월 23일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탄핵된 후, 박은식, 이상룡 등 잇단 사퇴와 사망 등으로 임정는 내각 구성에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

1925년 8월 29일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잡혀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어머니의 환갑 잔치를 못한 것을 죄스러워하던 김구는 이후 자신의 생일잔치는 하지 않았다 한다. 11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임시정부의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아들의 활동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차남 김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50]

친일파 척결 및 일본영사관 폭파 미수 (1924)편집

1924년에는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 오동진 선생에게 만철연선(萬鐵沿線)의 친일파를 토벌 하라는 특명을 내려,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으로 3인조 암살특공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친일파인 보민회괴수(保民會魁首) 최창규(崔晶奎)의 가족을 백주(白晝)대낮에 토벌했다. 이 사건은 1924년 7월 26일자 독립신문에 크게 게재되었으며, 이후 이들은 여순조선인회(旅順朝鮮人會)서기인 악질 친일파 정갑주, 이등박문수양녀이자 매국녀인 배정자, 일진회 회장 이용구 등을 암살 하라는 지령으로 암살을 시도하였다.

1924년 7월에는 일본 주요관계자 및 요인제거를 목적으로 박희광 등이 봉천성 일본영사관 폭파를 시도했으나, 불발로 실패했다.[51] 이들은 같은날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당시 일본군 장성이 드나들던 고급요정인 금정관에 침입하여, 거액 군자금을 탈취,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본경찰과 총격전 끝에,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박희광, 김병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김구는 이외에도 친일파 척결작업과 부족한 자금조달을 위한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활동을 배후에서 비밀리에 지휘 또는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국무령 시절 (1926)편집

1926년 5월 임시 의정원에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52]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지 13일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1926년 9월임시 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김존위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36] 임시정부도 정부인데 한미한 가계에서 태어난 자신이 수반이 되는 것은 정부의 위신을 격하시킬수 있을 것, 이상룡, 안창호, 홍면희은 실력을 갖추었으나 독립운동가들이 입각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렇다할 배경이 없는 자신이 수상이 되면 다른 실력과 배경을 갖춘 독립운동가들이 더욱 호응하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이동녕과 임정 요인들의 거듭된 요구로 1926년 12월 10일 김구는 국무령직을 수락하였다.[5]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곤란한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라고 하면서, 국무령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 어렵다고 판단, 개헌을 추진하였다. 김갑, 이규홍(李圭洪) 등을 중심으로 약헌기초위원회(約憲起草委員會)를 구성하였고, 이를 통해 개헌안이 마련되었다. 이로써 3차 개헌안이 마련되었고,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약헌(大韓民國臨時約憲)이라고 하였다. 이는 1927년 2월 15일 임시 의정원을 통과하였고, 1927년 4월 11일 공포되었다. 이로써 임정의 국무령제가 폐지되고 국무위원제로 개편됐다.[53]

내무부장, 재무 겸 군무부장 시절 (1927~1932)편집

1927년 8월 19일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면서 김구는 임정내무부장에 선출되었다.[54][5] 이어 각 정당사회단체를 통합하는 움직임에 참여하여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다.[55] 1927년 9월에는 장남 김인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25]

 
1930년대 초의 김구
 
1928년 11월 20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서신. 추운 겨울에 털옷 조차 입지 못하는 임정의 어려운 자금 사정을 호소하였다.

임시정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침투를 피해 프랑스 조계(프랑스 대사관 관할구역)와 영국 조계, 중국 국민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건물에 월세를 주고 입주했다. 그러나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 건물주, 토지주로부터 고발당하였고, 청사의 각부 직원과 잡일을 하는 급사, 경무국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였다. 일부 급사들은 임정을 떠나거나 임정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일부는 생계를 위해 다른 곳에 취직했다. 김구는 임시 정부 운영 자금의 대부분을 재중국 한국인 교민단체와 교포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모금, 중국인 기업체에 근무하는 한인, 중국의 군인·공무원으로 취직한 한인, 시장 상인, 아편장사 등이 내는 돈에 의존했으며, 일부는 3인조 암살단등 비밀조직을 움직여 일본군의 군자금 탈취하여 조달하기도 하였다.[56] 자금을 걷을 인력이 부족해 김구 자신과 임정 직원들이 직접 성금과 자금을 걷으러 다녔다. 이재에 밝지 못했고 장사수완이 부족했던 김구는 사업이나 장사에 종사할 수도 없었다.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이후, 한인 교포들은 그를 '두상(頭相)', '수상(首相)'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망명정부의 수반이라는 위치 역시 그를 장사나 공업, 상업에 종사할 수 없었던 원인이 되었다. 변변하지 못한 임정 청사의 월세도 대지 못해 김구는 늘 쩔쩔맸다. 정화암의 증언에 의하면 그런 와중에도 임시 정부를 떠나지 않고 임정의 충복인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다 한다. '그때 임정에는 삥천이라는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렇게 충성스러운 하인이 없었다.[57]'는 것이다. 이런 충복에게 몇 푼 안되는 월급을 몇년 동안 주지 못하였다. 삥천의 부인이 해산할 때 돈이 없어 밀린 월급의 일부만이라도 달라는 호소조차 들어주지 못할 정도였다.[57]

1928년 10월 16일 박용만텐진에서 의열단 단원 박인식, 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내의 언론과 방송 담화를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의열단의 경쟁세력인 임시정부의 김구가 나서서 이승만에게 박용만은 총독부에 매수된 밀정이라는 답신을 보냈으나 이승만은 그럴리 없다면서 비난 철회를 거부하였다.[58]

1929년 5월 《백범일지》 상권을 탈고하였다.

1929년 8월 상해 한인교민단장에 선출되었다.[25]

1930년 1월 25일 상하이 불조계에서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 당무이사에 선출되었다.

1930년 11월 18일 김구는 내무부장 임기를 마치고 재부무장 겸 군무부장에 선출되었다.[5] 이때 김구는 1927년 신약헌에 의한 국무 위원제의 국무위원회가 채택된 이후 그간 4년간의 정부 예산 집행의 결산서(決算書)를 무더기로 의정원 의장 앞으로 제출하였다. 자금난과 독립운동가들의 이탈, 변절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간판을 지키고 임정의 법통을 수호해 나갔다.[59]

1931년 11월 6일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4]

한인애국단 지휘 (1931~1932)편집

이봉창 의거편집

1931년 10월 대한통의부 산하 암살 비밀조직을 강화한 임시정부 내 항일무장투쟁단체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60] 김구는 홍보를 통해 청년단원을 모집하였고, 1931년일본어에 능한 이봉창(李奉昌)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잘 구사하던 이봉창을 의심하였으나 같이 지내면서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61] 이봉창이 왜 천황을 죽이지 못하느냐고 힐난하자, 김구는 자극을 받아 이봉창이 묵던 숙소로 찾아갔고, 이어 히로히토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觀兵式)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일본 도쿄에 파견, 사쿠라다몬(桜田門)에서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출운호(이즈모호) 폭파미수편집

1932년 2월 12일 중국인 잠수부들을 고용, 상하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출운호(出雲號, 이즈모호)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배 밑에 폭탄을 장착하는 과정에서 머뭇거리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윤봉길 의거편집

1932년 2월 윤봉길한인애국단에 입단하자 중화민국 정부 요인인 왕백수, 천궈푸(진과부) 등과 중국군에 복무하던 김홍일의 도움으로 폭탄을 입수, 3월 3일 윤봉길상하이로 파견, 훙커우 공원 부두 근처 비행장 격납고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중화민국이 패전하여 비행장 접근이 어려워져 포기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 및 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봉길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새벽 6시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최후의 아침식사를 같이 하였다. 자신의 손목시계를 영원한 이별의 기념으로 김구에게 건넨 윤봉길은 7시경 거사장소인 훙커우 공원으로 향하였다.[62] 윤봉길의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행사 참석자들이 여러 명 부상을 입었다. 4월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만주사변을 규탄한 뒤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만주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키로 했다.[63]

1932년 5월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배후가 임시정부의 김구 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김구의 세계적 명성은 치솟았고 임정에 흘러오는 자금에도 활기를 띄어 재정난이 해소되었다.

조선총독 암살미수편집

1932년 4월 김구는 윤봉길 의거를 보내기 직전 한인애국단 유진식이덕주를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조선에 파견해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암살을 지시하였다.[64] 하지만 4월 24~28일 사이에 유진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65] 이후 이덕주도 해주에서 체포됨으로써 조선총독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만주철도 폭파미수편집

일본만철(滿鐵) 사장 등 인사들이 국제연맹 대표단 방문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구는 한인애국단원 유상근(柳相根), 최흥식을 1932년 3월 말과 4월 27일에 각각 만주 다롄(대련)으로 파견하였다.[64] 유상근은 상해를 출발하기 2~3일 전인 4월 25일 임시정부 청사가 위치해 있는 보경리 4호 문 앞에서 윤봉길 의거에 사용한 것과 같은 모양의 수통형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 2개를 받았다. 2개의 폭탄 중 도시락 형태의 폭탄은 김구에게 돌려주고 수통형 형태의 폭탄 1개를 받아 자신의 거주지인 살파새로 188호 3층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이 폭탄을 갖고 4월 27일 상해를 출발하여 5월 4일 다롄에 도착하였다.[66] 유상근보다 한 달 먼저 배편으로 상해를 출발하여 대련에 도착해 있던 최흥식은 북대산통(北大山通) 5호 한인어부조합 내 김정순(金正順)의 집에서 거주하며, 다롄의 상황을 알아보고 있었다. 최흥식은 상해를 출발할 때 김구에게 먼저 대련의 상황을 확인하고 폭탄이나 권총을 사용하여 본장번(本庄繁) 일본 관동군사령관, 내전강재(內田康哉) 남만철도 총재, 산강만지조(山岡萬之助) 관동청장관 등을 처단하라는 비밀지령을 받았다.[66]

1932년 5월 26일 오후 7시 40분 리튼 단장이 이끄는 국제 연맹 조사단이 다롄역에 도착할 때 유상근, 최흥식혼조 시게루(本庄繁)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에게 폭탄투척을 계획하였으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다롄 우체국을 통해 보낸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걸려 유상근과 정보원 최흥식, 폭탄 운반책인 이성원·이성발 등이 모두 체포됐다.[63]

임시정부 이동시기 (1932~1940)편집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로 임정은 14년 상해시대를 마감하고 이동해야만 했다. 임정은 항저우(항주)와 진강으로 이동하였다가,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선이 확대되자 장사-광주-유주-기강으로 옮겨 다녔다. 1940년 5월 중국의 전시수도인 중경에 정착하기까지 임시정부는 8년에 가까운 이동시기를 거쳤다.[67]

상해 탈출 및 장제스와 제휴 (1932~1934)편집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가 김구는 군무부장 김철과 행동을 같이 하며 당지 교통대학 체육교사 중국국적의 한국인 선궈췐(신국권)의 주선으로 일찍이 김철의 면식이 있는 외국인기독교청년회 주사 미국인 조지 애시모어 피치의 비호를 받아 그가 아는 모목사의 사택에 잠복하였다.[68]

1932년 5월 10일경 김구는 상해 각 신문에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본인임을 발표하였다.[69] 이후 일제에 의해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고 한다. 김구가 일제에게 수배되자 장제스(장개석)는 중국 국민당 조직부장 천궈푸(진과부)에게 김구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천궈푸는 상해의 피치 박사 집에 은신해 있던 김구를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시키고자 하였고, 그것을 조직부에서 일하고 있던 샤오정(소쟁)에게 맡겼다. 샤오정은 그가 잘 알고 지내던 추푸청(저보성)에게 부탁하였다. 추푸청중국 국민당 당원으로 저장성(절강성) 주석을 역임한 바 있고 자싱(가흥)의 유지였다.[70]

1932년 5월 14일 김구는 상하이를 탈출해서 항저우로 가서 쥐잉뤼서(聚英旅社)에 투숙하였다. 그리고 3일 후 자싱으로 이동해 추푸청의 집에 피신하였다.[68] 이후 장제스-천궈푸-샤오정-김구로 이어지는 연락통로가 마련되었다. 상호간의 연락은 주로 서신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중국 국민당공패성이 남경과 자싱을 오가며 연락을 담당하였고, 또 중국 국민당에 근무하고 있던 박찬익도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천궈푸는 중요한 사항의 경우에는 장제스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맡았다.[70]

이후 해염 등으로 피신하여 광동인 '장진구'(長震球, 張震球) 또는 '장진'(長震, 張震)으로 행세하며 숨어지냈다. 김구의 친할머니가 장씨(張氏)였기 때문에 성을 장씨로 바꾼 것이다. 자싱에서 김구는 주아이바오(주애보)라는 처녀 뱃사공과 위장결혼하여 일경을 피해다녔는데, 김구는 주애보와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겼다고 회고하였다. 하련생의 소설 '선월'은 김구의 자싱에서의 도피생활을 소재로 삼았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주애보와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때 그녀에게 여비로 겨우 100위안을 준 일이다. 그녀는 근 5년 동안 나를 광저우 사람인 줄 알고 섬겨왔고 나를 보살핀 공로가 적지 않았다. 당시 나는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노자 외에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이후 김구의 후손들은 주애보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71][72]

일제에 수배를 당하면서 1933년 3월 22일 군무부장직에서 사임하였다.[5] 10월 3일 임시 의정원에서 해임되었다.[4]

김구와 장제스 사이의 연락관계가 맺어지면서 1933년 5월 김구는 박찬익을 통해 장제스와의 면담을 추진하였다. 이에 중국 측에서는 천궈푸, 김구, 장제스의 면담을 주선하였다.[73] 5월 장제스와 만났으며,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1934년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자싱으로 온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다시 만났다.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74] 의거와 피신 이후 한인애국단의 관리가 어렵게 되자 한인애국단은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한국특무대독립군으로 흡수, 개편되었다.

김원봉과의 갈등 (1935~1937)편집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국민당은 김구, 조소앙, 김규식,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의견의 대립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5년 5월 임정 해체론이 나오자 김구는 임정 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 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1935년 7월 5일 조선혁명당, 조선의열단,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을 해소하고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민혁당)을 결성하였다.[75] 이로써 김원봉의열단 계열이 임시 정부 내 당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김원봉파가 매사에 전횡을 일삼고 한국독립당에서는 조소앙 한 명만 중앙위원으로 선출하는 등 냉대를 하자 노종균·조소앙 등은 1935년 9월 25일 민족주의적 주장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민혁당에서 탈퇴하고 한국독립당의 재건을 선언하였다.[76] 10월 5일 한국독립당 임시당무위원회는 민혁당의 공산주의 이론과 노선을 세세히 비판하였다.[77] 재건된 한국독립당1936년 7월 1일 정식 발족하였다.[78]

김구는 1935년 11월 하순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정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고 김구는 이사장에 추대되었다.[79] 이후 유명무실화된 임시정부에 대한 해산 주장이 일부 독립운동가들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자, 김구는 이에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유지를 천명하였다.

1935년 11월 2일 김구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임시 의정원 비상회의에서 외무부장에 선출되었다.[5] 김구는 난징 국민정부와의 관계와 명망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와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루어 같이 항일운동에 힘쓰도록 협의하였다.[80]

1936년 8월 27일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陣中吟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를 휘호로 썼다.

1936년 10월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김구는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강화할 것을 다짐하였다.[81]

1936년 11월 10일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4]

1937년 2월 지청전 등이 민혁당을 탈퇴하여 조선혁명당을 재건하였다.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 일로 김구는 종가부터 챙기는 것이 도리라며 안공근을 질타하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82] 그 뒤 안공근은 김구의 대가족에서 이탈하였다.

1937년 김구는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구는 자신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으며, 김구는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고, 김원봉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83][84]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중화민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85]

중일 전쟁 발발 직후 (1937)편집

1937년 7월 중일 전쟁 발발을 계기로 조소앙한국독립당, 지청천조선혁명당이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제휴를 원하였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대한인국민회와도 연대하게 되어 반김원봉 세력이 갖추어졌다.[86]

1937년 8월 7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대한인단합회, 대한부인구제회, 대한인동지회, 한인애국단,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등이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을 결성하고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명의로 중일 전쟁에 대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을 발표하였다.[87][88]

1937년 8월 말 김구는 안경근, 엄항섭 등을 따라 상하이에 잠입, 중국 측의 군정 각 방면을 두루 방문하였다. 특히 프랑스 공부국 정치차장 러시아인 엠랴노프와 장시간 회견하였으며, 3일 간 머무른 뒤 엄항섭을 동반하고 난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김구는 시국이 시국인 만큼 김원봉파와의 싸움을 접고 중한합작 하는 방책을 연구하게 되었다.[89]

1937년 9월 9일 전장(진강)에 잠입 대기 중이던 김구는 무정부주의자 유자명정화암에게 보내어 "서로 과거 일체를 잊고 주의, 주장을 초월하여 이 기회에 악수하자. 나는 이번에 자금도 생겼고 기계(권총, 기타 흉기의 뜻)도 입수했다. 김원봉 일당 약간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광복운동자는 전부 의사소통을 보았다. 이번 기회에 옛날처럼 사이좋게 일을 하고 싶다. 속히 협의하고 싶으니 와 달라"는 친필 편지를 보내어 대동단결을 종용하였다.[89]

1937년 9월 29일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손자 김인을 데리고 몰래 상하이에 와서 프랑스조계 패륵로(貝勒路) 신천상리(新天祥里) 20호 안공근의 집에 피난하였다.

1937년 10월 30일 상해 난시 지역의 함락이 목전에 다가오자 한국국민당, 한국국민당청년단, 조선혁명당 등의 당원들은 일본군을 피해 가족과 함께 속속 오지로 향해 피신하기 시작했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안공근을 따라 자동차를 타고 난징으로 달아났다.[89]

1938년 2월경 임정을 후난성 창사로 옮겼다.

남목청 사건과 구사일생 (1938)편집
 
총탄을 맞고 수술 후 회복한 김구 (1938년)

1938년 5월 7일 후난성(호남성) 창사(장사) 남목청에서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통합을 논의하는 회의장에 조선혁명당이운한이 돌입하여 권총을 발사하여 김구·현익철·유동열이 중상, 이청천이 경상을 입었다. 현익철은 입원 즉시 사망하였다. 김구는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절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90] 타고난 체력으로 그는 과다출혈을 하고도 오래 버틸 수 있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김구는 총격 직후 4시간 이상 방치되었다가 병원으로 실려가 입원되었다. 병원에서 치료 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움직임에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그의 글씨체는 떨려서 구부러진 글씨를 썼는데 이를 일명 총알체라 한다. 김구는 이운한의 공범으로 강창제(姜昌濟), 박창세(朴昌世)를 지목하였다.[90]

이 사건 소식을 들은 중국 국민당 천궈푸는 매우 마음 아파해하면서 샤오정에게 "당신도 이 일로 고생을 했으니 우리로서는 협조를 끊고 그 방도를 모색하여 남에게 넘기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국민당 내 임정 담당자가 천궈푸에서 주자화(주가화)로 바뀌었다.[70]

1939년 4월 모친 곽낙원 여사가 인후증(咽喉症)과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82세로 사망하였다. 아들이 일본군 타살사건으로 체포된 뒤에도 아들을 신뢰하였고, 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뒤에도 늘 정신적으로 후원해주었다. 곽낙원은 사망하며 자신과 며느리의 유해를 반드시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구는 노가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로 운구, 이장하였다.

김원봉과의 좌우합작 노력 (1939)편집

1939년 5월 10일 김구와 김원봉은 공동명의로 '동지동포 제군들에게 보내는 공개신'이라는 제목의 성명서에서 기존의 모든 조직을 해체하고 우파세력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좌파세력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통합된 단일당을 수립하자고 제안하였다.[91]

1939년 8월 기강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조선민족전선연맹에 속한 7개 정당·단체 대표대회가 개최되어 단일당 결성을 논의하였다.[67] 그러나 이때 이승만은 '김원봉, 김규식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단합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민혁당에서는 '각 단체들의 연합단체 구성에는 찬동하지만 기왕의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의 당을 만드는 데는 찬동할 수 없다'고 하여 대동단합은 성사되지 못하였다.[92]

1939년 10월 23일 외무부장 임기가 종료되고 재무부장에 선출되었다.[5][6]

1940년 3월 13일 이동녕 주석이 병사하자 임시 의정원은 내무부장 홍진을 임정 주석으로 승계시켰다.[3]

1940년 5월 9일 치장(朞江)에서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이 통합하여 임정의 여당으로서 한국독립당을 통합 창당하였고, 김구는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93][94]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1940~1945)편집

한국 광복군 결성편집
 
광복군 성립전례식에 참석한 김구 (우측)

1940년 5월 임정은 중국의 전시수도인 중경에 정착하였다.[67]

1940년 9월 17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개최하였다.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국가 주석 장제스광복군의 통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중화민국군의 예하대로서 그 통수권은 중화민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었다. 김구는 중화민국 정부에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생활비 이상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으므로 미국에서 활동할 의향을 밝히고 중국정부에 여행증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92] 중국정부는 이곳에서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하자 김구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활동 계획서를 작성하여 중국정부에 제출하였다.[95]

1940년 10월 9일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5]

 
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
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오른쪽 김붕준
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구미위원부(주미외교위원부) 부활편집

1941년 6월 4일 워싱턴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하였다.[92] 이후 주미위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 등 재미인사들과 연락하여 미국 국방성과 접촉, 광복 직전에는 미군 전략사무국(OSS)과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41년 6월 임정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임정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김원봉의 광복군 합류와 재갈등편집

1941년 10월 임정의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10월 반파쇼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연안에서 개최된 동방각민족 반파쇼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대회의 명예주석단의 1인으로 선출되었다.[96]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였다.

1941년 12월 9일 임정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였다.[97]

광복군 확대 개편 과정에서 민혁당 인사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임정에 참여했다. 1942년 김원봉조선의용대를 흡수하여 규모가 확대, 개편되었다.

1942년 11월 18일 장건상이 학무부장에, 1944년 4월 24일 김성숙, 김원봉이 군무부장에 당선되었다.[5] 그 후 임정에는 공산주의계, 민족주의계, 무정부주의계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1942년 3월 1일 무정부주의계 내부 갈등으로 나월환 암살 사건이 있었다. 1943년 민혁당한독당의 김구 등 국무위원 5명을 암살제거하고 민혁당김원봉 등이 대신 입각하겠다는 미수로 끝난 모의문서도 발견되었다.(출처 필요)[98] 미국에 체류중인 이승만은 김구에게 항의하며, 이들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1943년 7월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민혁당과의 갈등으로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다시 주석에 복직하였다.[82]

임시 정부 주석 재선편집

민혁당에 치인 1944년 임정은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했다. 1944년 4월 24일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출되었다.

1944년 8월 중화민국으로부터 한국 광복군 통수권을 되돌려 받았다. 그 즉시 한국 광복군 통수부를 설치하고 통수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 겸 광복군 통수부 주석 겸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 당권, 정권, 군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당·정·군의 삼위일체의 지도체제를 확입하고 광복군을 이끌며 그 확대, 발전을 도모하였다.[99] 9월 그는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그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 광복군한반도 진주를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그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한국 광복군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1945년 3월 29일 장남 김인이 폐질환으로 중국 쓰촨성에서 병사하였다.

1945년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재선출되었다.[100]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에 합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산시성(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와 저녁만찬 중 광복 소식을 접하였다. 외국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통탄해하였다고 한다.

광복 이후편집

귀국 직전 (1945)편집

 
1945년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번과 면담한 김구

1945년 8월 18일 김구는 중경 임시 정부로 귀환하였다.[101] 1945년 9월 3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102] 김구는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하였으나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환국을 추진했으나 미군정은 정부자격의 귀국을 반대, 존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은 개인 자격의 환국을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1945년 11월 4일 장제스 중국 총통은 해방을 맞아 귀국하는 김구 주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전별식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중국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吳鐵城)에게 명하여 미화 20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280만 달러 또는 30억원)의 금액을 김구에게 전달했다.[103] 장 주석은 "비록 우리 정부가 가난하긴 하지만 어찌 한국에 후하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말했다. 중국 국민당 역시 당시 항일 운동과 공산당과의 내전 등을 치르느라 재정적으로 어려웠지만, 장 주석은 김 주석이 돈 문제로 고생하지 않게 자금을 주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구는 이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실패했다.[103] 중국과 경쟁하기를 원치 않았던 미군은 중국측이 제공한 정치자금을 허용하지 않았다. 장제스가 돈과 함께 보내준 3명의 무전사와 무전기에 대해서도 무전사를 추방하고 무전기는 압수했다. 다급해진 김구는 뉴욕의 주미중국대사관을 통해 서울로 송금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결국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이를 국고에 보관했다가 1947년 6월 한국에 전달했다.[103][104] 전문가들은 장 주석이 김 주석에게 준 전별금의 의미를 우정, 공동운명체, 해양세력과의 완충지대 활용 등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104]

장제스와의 회담에서 김구는 "안중근 자식이 일본에 항복하여 상하이에서 여러 가지 불법행위를 하며 아편을 매매하므로 실로 유감이다. 직접 명령을 내려 안준생을 구금해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1945년 11월 귀국길에 김구는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리에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안준생 암살 부탁은 중국 관원으로부터 거절당했다.[105]

1945년 11월 23일 상하이 비행장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 환국 제1진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중국을 출국했다. 당시 임정은 귀국을 놓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하였으나 민혁당김원봉의 양보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이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시 민혁당의 당수였던 김규식도 한국독립당계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무렵 김구 일행은 미국 헌병의 보호를 받았으며 김구의 개인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106]

귀국 직후편집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첫줄 왼쪽 끝에 앉은 이가 김구)
 
상해 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

1945년 11월 23일 오후 임정 환국 제1진이 귀국하였다. 김구는 죽첨정 숙사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승만과 회견한 다음 기자회견을 하였다. 여기서 김구는 "나는 조선이 남북의 2점령지대로 분열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연합국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지는 않겠으나 장차에는 승인을 요구할는지도 모르겠다", "조선내의 정당수를 감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내의 정당은 하나로서는 아니되고 유력한 정당 몇이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을 위하여 민주주의정체가 좋다고 믿는다" 등 앞으로의 정치 방향에 대해 언질을 주었다.[107] 임시 숙소는 조선호텔이었고, 이후 지주 최창학이 기부한 죽첨정(경교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나 김구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의 정부도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108]

1945년 11월 23일 김구는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휘호를 작성하여 헌정하였다. 복간축하 휘호의 내용은 '유지자 사경성'(有志者 事竟成)으로 '뜻이 있으면 끝내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109] 김구가 귀국하자 윤치호는 그와 만나자는 연락을 취했지만 그는 친일파의 거두로 지탄받고 있었다. 윤치호의 영향력과 일제 강점기 당시 그로부터 받은 지원금 등 윤치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김구는 거절하는 대신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1945년 11월 25일 오후 2시 20분 돈암장이승만을 방문하고 저녁까지 당면문제에 관하여 요담을 하였다.[110]

1945년 11월 28일 죽첨정 임시정부요인 숙소에서 열린 정례기자회견에서 김구과 김규식은 조선인민공화국 입각설을 부인하였다. 김규식은 "나는 인민공화국 내각조직에 관하여 하등의 의사 교환도 없었고 내가 각원으로 된 것은 비법적이다. 그런 고로 나는 이 내각에 입각할 것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고, 김구는 "나도 동감이다"라고 말했다.[111]

11월 한민당 인사들이 찾아왔고, 최창학·방응모 등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귀국 직후 이광수가 한동안 그를 방문하지 않자 대노하여 이광수를 찾았다. 김구의 불호령을 듣고 경교장에 불려간 뒤 이광수는 종종 경교장을 찾았으며 1947년 이후 김구의 7촌 조카 김흥두와 함께 《백범일지》 한글판 번역작업에 동참한다.[112]

 
임정요인 환영식에 이승만과 김구 (1945.12.01)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1945년 12월 1일 조소앙, 홍진 등 임정 환국 제2진이 전라도 군산비행장에 도착 후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날 오후 1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봉영회(臨時政府奉迎會)에 참석했다. 윤보선의 사회로 시작되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이 이어진 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 조선국민학교생도를 선두로 기행렬에 옮기어 행렬은 오후 2시 20분경 안국정 네거리에 이르러 조선생명보험회사 2층에서 축하를 받는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 앞에서 "대한임시정부 만세, 김구 만세, 이승만 만세"를 부르고 경성역 앞에 이르러 해산하였다.[113][114]

1945년 12월 19일 오전 11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정개선환영대회에 참석하였다. 15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11시 정각이 가까워오자 김구 이하 임정요인 일동의 입장에 뒤 이어서 각 정당대표 및 기타 인사의 입장이 있었고 장엄한 취주악에 맞추어 일동 총기립으로 환영대회가 개막되었다. 36년간 잊었던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일동의 애국가 제창, 이화여전의 환영가 제창, 홍명희의 환영사, 러취 군정장관의 축사 후 김구의 답사와 이승만의 답사가 있었고, 만세삼창으로 환영회는 폐회되었다.[115]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는 순국선열추념대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김구가 총재로 선출되었다.[116] 12월 24일 한국소년군 총본부 총재에 추대되었다.[117] 12월 25일 돈암장이승만을 방문하던 길에, 전속 주치의 류진동을 대동하고 돈암장 산기슭 판자촌을 찾아 세민을 위문하였다.

1945년 12월 27일 김구는 '삼천만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하였다. "완전히 독립자주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합시다."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합시다"라며 그 방안으로 보선제 실시, 부와 생산의 점진적 국유화, 의무교육 도입을 주장하였다. "친일분자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여야겠습니다." "세계적 대가정을 건립합시다"라며 우방과의 교류를 환영하면서도 "그러나 이것이 절대로 우방 단독적이나 공동적으로 우리를 통치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한인은 마땅히 한인의 정부가 통치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강고한 국방군을 건립합시다"라고 말했다.[118]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직후 (1945~1946)편집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3상회의) 결과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를 협의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리자 김구 등 임정 측은 오후 4시 긴급 국무위원회의를 열고 각 정당, 종교단체, 언론기관 대표들을 초청하여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한 끝에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구성을 결의하였다.[119] 김구는 처음부터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강력히 관철하였다. 김규식은 찬탁 또는 반탁의 일방적인 입장을 보류하고 양진영과 교류하며 좌우합작운동을 준비하였다. 안재홍, 여운형은 반탁에서 이탈하였다.

송진우 피살 사건과 한국민주당과의 갈등편집
 
송진우

12월 29일 임정 주최로 경교장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회의에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고, 조선공산당 사람들까지 다 나왔다. 다들 아주 격해 있었다.[120] 이때 석상에서 김구는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다. 강원룡에 의하면 "당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다"고 한다.[120]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들 손으로 세워야 한다" 고 절규하였다.[121] 반면 송진우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생각에서 김구와 맞섰다.[122] 송진우는 김구의 충칭 임정의 통치권 주장을 미군정에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123]

1945년 12월 30일 오전 6시 10분경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송진우 피살 사건이 발생되었다.[124] 이 사건이 전해지자 미군정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의심하고 1946년 1월 1일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125] 사건 전날의 정황상 한국민주당 측도 김구를 배후로 의심하였고, 그래서 사건의 진실과 무관하게 임정 측과 민주당 측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1946년 4월 9일 경기도경찰부는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을 체포하였다. 이날 경찰은 한현우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송진우를 돕고 있던 자인데 그의 지휘하에 유근배, 김의현이 권총을 발사하여 송진우를 암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126] 이날 경찰 취조결과 발표에 따르면 한현우는 1941년 12월에 와세다 대학 정경과를 졸업하고, 1943년 5월경 동경에서 국수주의자 일인 나카노 세이고(中野正剛)와 고이치 호즈미(穗積五一)을 숭배하여 이와 5년간 직간접으로 교양을 받고, 고이치 호즈미의 지지로 재일조선인 유학생 5천 명으로 조선독립연맹(朝鮮獨立聯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지하운동을 한 자인데, 당시 일본경비청의 탄압이 심하므로 고이치 호즈미의 지도로 한현우은 일본국체연구소(日本國體硏究所)라는 간판을 내걸고 일본황실중심주의를 표방하다가 1944년 3월에 비밀이 탄로되어 인심교란죄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4년을 받은 후 1945년 2월 25일경 강원도 춘천 한현우의 처가집에서 수양하다가 1945년 8월 17일 상경하여 시내 종로 2정목 마포 노량진 신당정 등으로 전전하였다. 한현우 등은 1945년 11월 초부터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를 매국노로 규정하고 암살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데, 12월 말 신탁문제가 일어나 격분하여 12월 30일 오전 6시 10분경 송진우를 먼저 암살한 것이었다.[127]

1946년 9월 3일 한현우에게 일본제 권총을 내어준 한현우의 지도자 전백(全栢)에 관한 공판이 있었다.[128] 1947년 2월 14일 한현우는 최종언도공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129] 1948년 9월 5일 한현우는 옥중 인터뷰에서 "송진우씨 암살사건에 관해서는 범행 당시나 지금이나 별로 심경의 변화가 없습니다"라고 했고 자신이 "대한임정 지지자"라고도 했다.[130] 1950년 한현우는 마포형무소 복역 중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하여 석방되었다가 9·28 서울 수복 당시 자수하지 않고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131] 1960년대에 이르러 신원이 확인되었는데, 한홍건(韓弘健)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일본 여성과 결혼하였다.[132]

미군정과의 갈등편집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김구는 이후 그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김구는 1945년 12월 30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존 하지에게 보냈다. 하지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김구의 성명서를 맥아더에게 송신하였으며, 미국이 이것을 모스크바 협정에 언급된 3개국에 전달해줄 것을 강조하였다.[133] 12월 31일 오전 그는 국자(國子)를 발표한다. 그 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의 포고령이 떨어지자 미군정청의 한국인 직원들이 파업을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임정 주최의 반탁 운동이 극치에 달한 1945년 12월 31일 하오 하지 중장은 조병옥에게 연락관을 보내 사령관실에서 요담할 것을 요청해 왔으므로 즉시 하지를 만나러 갔다. 하지는 '군정을 접수하려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즉시 처치해야 되겠다'고 말하면서 그날 저녁 임정 요인 처치에 대한 방송을 하겠다고 조병옥에게 원고 전문을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원래 중경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33명은 한국에 입국할 때 미군정의 법과 질서유지에 복종하겠다는 맹약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빙자하여 미군정을 접수하고 미군들을 축출하려고 획책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획책과 군정 접수운동의 여파로써 공공 안녕질서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므로 오늘밤 0시를 기하여 인천 소재 전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겠다."[134]

조병옥은 이 원고를 다 읽고 난 뒤 경악하면서 하지중장에게 말하기를 임정 요인들은 우리 민족사에 찬연히 빛나는 3.1 운동 이래 자유독립의 혁혁한 경력을 가진 분으로 민족의 자유전치운동의 봉화를 든 민족운동의 투사이므로 이 애국자들의 국외추방은 미군정에 협조하는 한국인의 민심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동시에 미군정은 한국에 있어서 실패로 끝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니 그런 조치는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135] 하지 중장은 조병옥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러면 방송을 중지하겠다고 하였다. 조병옥은 즉석에서 김구와 하지의 면담을 약속받았다. 조병옥은 하지 중장에게 "나에게 김구 주석과 협상할 전권을 맡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 중장은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135]

12월 31일 저녁 조병옥서대문에 있는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의 숙소를 방문하게 되었다.[135] 조병옥은 김구와 여러 시간 면담하였다. 조병옥은 김구에게 진언하기를 "주석께서 입국하실 때에 독립군 한 명도 대동하지 못하고 정치자금도 한 푼도 없이 미군정에 협력하겠다고 맹약한 이상 현재의 임정이 계획하고 있는 미군정 접수 운동은 포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북한공산주의 치하에 붉은 물이 들어가고 그에 따라 한반도는 전역에 걸쳐 공산주의 철제에 휩쓸려 갈지도 모르는 이 역사적 단계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미군정의 단계를 통과하지 않고는 도저히 자유독립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오니 주석께서는 그 점 신중히 심사숙고하시어 한번 하지 장군과 만나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해 보심이 어떻습니까?" 조병옥의 말에 김구는 하지 중장을 만나 보겠다고 수락, 그의 진언을 들어주었다.

1946년 1월 1일 김구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호출되었다. 이시영, 신익희, 조소앙, 엄항섭 등 다른 임정요인도 함께 군정청으로 불려갔다. 이때 김구는 하지로부터 명령을 거역하면 죽이겠다는 경고를 들었고, 김구는 하지의 융단에 올라 이자리에서 죽겠다고 대들었다 한다. 송남헌은 그가 하지로부터 추방시키겠다고 위협당하였다고 증언했다.[136] 불려갔다 온 김구는 파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고[137] 엄항섭 대독을 통해 군정청 한국인 직원의 복귀를 촉구했다.

공산진영과의 갈등편집

그런데 1946년 1월 2일을 기점으로 조선공산당조선인민공화국 등 극좌익~좌익은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 즉 신탁통치찬성(찬탁)으로 일제히 돌변했는데 이로 인해 좌우익의 분열이 노골화하였다.[138][139] 민족진영은 외세를 적이라고 봤고 공산진영은 동족을 적이라고 봤다. 미군정은 좌익의 돌변에 소련의 의사가 작용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가 좌익세력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자 김구는 조공의 표변을 들며 '조선공산당은 반민족적 집단이고 신사대주의자'라고 낙인찍고 맹비난을 퍼부었다.[140]

김구는 김성수, 조소앙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한편 우파 내에서도 신탁통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부수립이 우선이라고 본 김규식, 안재홍은 반탁의 입장을 철회한다.

비상국민회의 및 민주의원 결성편집
 
한국 방문 중 경교장을 찾아온 피치 박사 부부와 함께 (1946년)
앞줄 가운데가 김구, 앞줄 오른쪽이 피치 박사 부부, 앞줄 왼쪽은 조완구, 프란체스카 도너 순, 뒷줄 왼쪽 첫 번째는 엄항섭, 세 번째는 이기붕, 네 번째는 안우생, 가운데는 안미생, 오른쪽 첫 번째는 선우진, 네 번째는 서영해
 
이승만. 1920년 상하이에서 김구와 첫 대면 후 호형호제하며 정치적으로 협력하였다.

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예비회담이 개최되자 각 정당과 사회단체는 서둘러 반탁진영과 찬탁진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김구와 이승만은 미소공위 반대 및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미소공위 찬성 및 참가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민주당장덕수가 찾아와 김구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미소공위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반면 장덕수는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122]

반탁진영은 1946년 1월 20일 임정을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비상정치회의주비회를 개최하여 전국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소집하였다.[141] 1월 21일 비상정치회의주비회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합류시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로 개칭하고 김구·이승만을 공동회장으로 추대하였다.[142] 1월 23일 임정 측 혁신계인 민혁당의 김원봉·성주식(成周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등 3명은 '임정이 중립을 지키지 않고 반탁에 가담해 우익 편향화하고 있다'면서 비상국민회의주비회 탈퇴성명을 하였으며,[143] 임정의 장건상도 임정과의 결별을 고하였다. 또한 공산진영 산하단체도 모두 참가를 거부해왔으므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는 우익진영만의 집결체가 되었다.[144] 1월 30일 비상국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이 상임위원회는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김구·이승만에게 위임하였다. 2월 1일 비상국민회의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145] 2월 13일 김구·이승만은 28인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하였다.[146]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가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개편되었다. 이승만이 의장에, 김구·김규식이 부의장에 추대되었다. 이날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정인보, 조소앙은 결석하였다.[147] 또한 이날 찬탁진영의 조선인민당민주의원 탈퇴성명을 발표하였다.[148]

찬탁진영은 1월 19일부터 여운형조선인민당박헌영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을 추진하였고,[149]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150] '우익 편향화'를 운운하며 비상국민회의를 탈퇴했던 이들은 고스란히 민전에 참여하였다.[151]

1946년 2월 8일 이승만 계열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라는 공통 분모 하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통합 결성하였다.

1946년 3월 1일 기미독립기념회와 3·1기념회가 주관한 3.1절 기념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였다.

1946년 3월 5일 문봉제(文鳳濟) 등 월남 청년들이 주도한 집회가 성공하고, 이에 힘입어 평남동지회가 조직되고, 다시 평남동지회는 평남북 조직을 합친 평안청년회로 확대되었다. 결성대회에는 북한 지역 연고자(이윤영, 김병연, 강기덕)는 물론 김구도 참석했다.[152]

김일성 암살미수편집

1946년 2월 초 임시 정부신익희를 본부장으로 하는 정치공작대 중앙본부를 조직, 산하 지하 단체인 백의사의 지원을 받아 이북의 김일성·강량욱·최용건·김책 등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지도자 암살을 준비했다. 김정의·김형집(김성만)·최기성·이성렬·백시영·이희두 등으로 구성된 임정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결사대'는 신익희의 낙산장(駱山莊)에서 정보수집 요령과 지하활동 방법에 대한 훈련을 받은 뒤 북한에 파견되었다.[153][154]

1946년 3월 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평양역 광장에서 3·1절 27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원래는 연단의 좌측에서 김형집이 김일성 연설 시작과 동시에 수류탄 투척, 연단의 중앙에서 김정의가 저격 지휘 및 저격순간 촬영, 연단의 우측에서 최기성이 수류탄 불발에 대비해 일제기관총(모제르1호)으로 김일성을 저격하기로 계획했지만, 김정의에게 미행이 붙어 차질이 생겼고 당황한 김형집김일성의 연설이 끝나자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소련군 부대장 노비첸코 소위의 한 발 앞에 떨어졌고 그는 수류탄을 되잡아 던지려고 했지만 그의 손에서 폭발하였다.[153][154] 노비첸코는 이 폭발로 오른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155][156][157] 김일성 암살에 실패하자 나머지 요원들은 최용건김책의 집에 습격·폭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량욱의 집에 던진 폭탄은 강량욱의 부재로 아들과 딸 등 그의 가족만 죽게 만들었다.[158][157] 청년단원 중 한명이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의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무임승차권(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임정 신임장)을 분실했고 이는 북한측에 의해 입수되었다.[157][159] 이 테러가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한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격렬히 비난하였다.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봉건 잔재세력과 외국 팟쇼세력과 제국주의 잔재세력과 친일파의 삼위일체”이자, “이완용을 배운 조선매국노”로 규정짓는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시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김구를 민족혁명의 지사', '반제에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었지만 이 테러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당시 북한의 출판물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개 구자', '김구'(金狗)로 부르며 매도하였다.[160]

1946년 4월 6일자 소련군정문서에 의하면 소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김일성을 암살미수의 배후로 보았다. 그 때문에 이승만과 김구는 좌익에게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 받았다. "(라) 보고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는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 전에 북조선으로 파견된 테러분자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다. 자동차에 수류탄이 투척되었는데 자동차는 어떤 파손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분자들은 이승만이 교부한 것으로 보이는 추천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만식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소련군정문서, 남조선 정세 보고서 1946년 4월 16일자, '13. 구두 정보 보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1946)편집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1946년 제1차 미소공위.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

1946년 3월 20일에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은 미국의 예상대로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을 과도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련측은 “북한 주민도 모스크바 협정문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되었다.[161]

미소공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민족주의진영 통합에 나선 한독당1946년 3월 22일 국민당과의 통합을 선언하였다.[162] 4월 7일에는 한독당, 국민당, 한민당, 신한민족당 등 4당 합동교섭위원 합당 협의를 하였는데, 한민당측이 '중앙위원수와 인선배치가 명확치 않아 당을 헌납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 통합에 난항을 겪었다.[163] 이에 김구는 4월 9일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당에 얽매이지 않은 거국적이고 초당적인 국민운동의 필요'하다며 거부하였다.[164] 4월 18일 한독당으로의 통합에 국민당, 신한민족당만이 참여하였고 한민당은 이탈하였다. 김구는 한독당 위원장에 추대되었다.[165]

이후 미소공동위원회는 난항을 거듭하다가, 4월 18일 과도정부 수립에 참여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 즉 '공동성명 제5호(제5호 코뮤니케)'가 발표되었고,[166] 이어서 4월 27일 존 하지가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하더라도 반탁의견 발표를 보장하겠다는 특별성명을 냈다.[167] 이에 5월 2일 비상국민회의, 독촉국민회,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한국독립당, 한국민주당 등 25개의 우익 정당과 사회단체가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되 탁치를 전제로 한 일체 문제는 절대 배격한다"고 발표하며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하였다.[168] 그러나 소련은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했어도 신탁 통치 반대를 포기하지 않는 한 협의할 용의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 5월 6일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169][170]

 
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

제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면서 반탁운동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 운동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171]

 
1946년 6월 16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 서울역에서 (오른쪽 두 번째가 김구)

1946년 6월 3일 이승만정읍 발언을 할 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상공회의소 강익하가 찾아와 김구에게 3백만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그는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172]

1946년 5월 15일 윤봉길 등 7의사의 유해가 일본에서 부산항에 도착했다.[173] 김구는 6월 15일 낮 12시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 추도회에 참석하였다. 6월 16일 오후 5시 40분 3열사의 유해를 모시고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서울역장 안내로 일단 귀빈실에서 잠시 휴계한 다음 소년군을 선두로 태고사에 안치하였다.[174][175]

1946년 6월 11일 정동교회에서 개최된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전국대회 2일차에 강연을 하였다.[176]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독립의 첩경은 오직 통일에 있다고 강연을 하였다. "어떠한 정당에서는 독립도 되기전 토지와 물건을 균배하라는 등 떠들고 있으나 지금 우리 것을 우리가 갖지 못하고 외국인 의 손에다 두고 있는데 어떻게 균배하겠는가? 먼저 우리는 나라를 찾은 후에 모양과 색채는 그때 결정하자!" "무슨 주의니 무슨 사상이니 하고 주석(柱石) 하나라도 파괴하는 사람은 역적도배이니 이러한 도배는 적어도 내 가정, 내 동네(洞里), 내 직장에서는 한 사람도 없도록 하여야 한다."[177]

1946년 6월 29일, 새로운 민족통일기관의 설치구상과 단독정부 수립 준비 및 지지기반 확보를 위하여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하였다.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178]

1946년 8월 15일 미 군정청에서 열린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하지 중장, 이승만에 이어 인사말을 했다.[179]10월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7년 미국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6년 8월 26일 조병옥, 장택상, 김성수, 장덕수, 이승만, 김구를 암살하기 위해 북한에서 특파한 요인암살대원 이종섭(李鍾燮), 최한(崔翰), 이원희(李元熙), 김천호(金天虎) 등 8명이 검거되었다.[180]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김구는 이승만·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181]

1946년 11월 23일 김구는 서울신문 1주년 축사에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혔다. 그 중 친일청산에 관한 발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친일분자 숙청은 마땅하지만 그 죄상을 □衝하지 않고 그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용서할만한 자도 기어이 매장하라고 한다. 왜적 이상으로 나쁜 친일분자는 감히 머리도 들지 못하고, 죄가 비교적 가벼운 무리도 자숙하는 태도를 보이건만, 소위 황국의 성전을 위해 글장이나 쓰고 연설쯤 한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면서 도리어 날뛰는 무리를 대할 때에는 구역질이 나지 아니 할 수 없다.'[182] 사실상 한국민주당을 지목하여 비난한 것이었다.

반탁독립투쟁위원회 활동 (1947)편집

 
8.15 광복이듬해인 1946년 백범 김구와 윤봉길의 가족. 왼쪽부터 김구, 부친 윤황, 모친 김원상,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 아들 윤종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이후 경교장에서 기념사진. 왼쪽부터 손기정, 서윤복, 본인, 남승룡

1946년 12월 이승만이 도미 외교에 나섰을 때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민족 외교'를 위해 11월 26일 '외교사절 후원회'를 조직했다.[183] '이승만 박사 외교사절 후원회'의 부위원장은 조소앙이 맡았고, 김구와 배은희 등은 반탁총동원위원회나 비상국민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거뒀다.인용 오류: 열린 <ref> 태그가 잘못 만들어졌거나 이름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국내 책임자로 적극적으로 도미 외교를 지지하였다.인용 오류: 열린 <ref> 태그가 잘못 만들어졌거나 이름이 잘못되었습니다 12월 2일 이승만 출국시 김포 비행장에 나가 환송하였다.

1947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움직임에 따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다시 가열되기 시작했다. 1월 14일 미군정은 경향신문을 통해 1월 18일 전국학생총연맹(전국학련) 주도 하에 반탁데모가 이루어질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184] 한편 1월 16일 서울로부터 '전국학련 산하의 학생들이 1월 18일 반탁데모를 전개시키고자 계획하고 있다'는 전보를 받은 이승만은 "조선에는 여하한 데모도 전개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행동이 외국배척운동으로 오해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답장을 보냈고,[185] 1월 18일 민주의원에도 시위를 자제하라고 전보를 보냈다.[186] 이에 전국학련은 매국노소탕대회, 반탁의 재계몽운동, 학생운동사 보고대회, 반탁웅변대회 등 기존 계획[187]을 전면 수정하고, 1월 18일 오후 2시 경운동 천도교강당에서 '반탁학생투쟁사 발표대회'만을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김구 등도 참석하였다. 이철승의 '반탁이냐 죽음이냐', 최성의 '이북학생투쟁사', 송원영의 '·18 반탁학생의 투쟁사' 등의 발표가 있었다.[188]

한편 이승만, 김구 등은 서북청년단 등에도 종종 경제적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이는 대부분 일회성이었다.[189]

1947년 1월 21일 김구, 조소앙, 김준연 등 9명이 협의하여 각 사회단체가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함께 역량을 집중하기 위한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설치키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결성은 24일 경교장에서 42개 단체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최고 고문으로 이승만, 위원장으로 김구, 부위원장으로 조성환, 조소앙, 김성수를 추대하였다.[190]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회김규식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한다고 결의하자,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에서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공격했다.[191]

1947년 2월 14일 하오 1시반 서울 천도교대강당에서 김구와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 및 방청객 2천여 명이 참석한 '반탁독립궐기대회'가 열렸다. 반탁독립궐기대회는 '과도적 독립정부'를 서울에 수립할 것과 아울러 '신탁통치 내용의 여하와 기간의 장단을 불문하고 결사반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190][192]

김구, 조완구, 조경한 등은 한독당 내 국내파가 정치이념의 차이 등의 이유를 내세워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한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고[193], 김구는 1947년 2월 26일 3.1절까지 한민당과 한독당의 합당이 거부될 때에는 한독당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초강경자세로 나왔다.[193]

미군정 접수 운동편집

한편 이승만이 미국에 나가 있는 동안 국내 임정 지지세력은 임정 법통을 계승하는 단체를 수립하고 미군정을 접수하기 위한 운동을 빠르게 추진하였다.

1947년 2월 17일 민족통일총본부·독촉국민회·비상국민회의를 통합하고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로 개칭하였다.[194] 3월 1일 독촉국민회국민의회의 임정 법통을 승인하고 임정을 봉대한다고 결의하였다. 3월 3일 국민의회는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였다. 장건상, 김붕준, 차리석, 김원봉, 김성숙, 성주식 대신에 오세창, 김창숙, 박열, 이청천, 조만식, 이을규(李乙圭) 등 6인을 국무위원에 보선하였다.[7]

1947년 3월 5일 미군정의 요청에 의해 김구, 조소앙, 이시영, 유림은 덕수궁에서 브라운 소장과 2시간 요담하였다. "(金九) 정권을 대한임정에게 이양해 주지 않겠는가? (브少將) 할 수 없다." "(金九) 우리가 국내에 들어와 보니 입국 이래 조선국민이 임정을 절대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국무성에서 내세운 두 가지 조건은 해소된 것으로 보며 따라서 임정을 승인해 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브少將) 사실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그 당시의 미국 견해와 현재의 정세와는 다르니 승인해 줄 수 없다." 등의 대화가 오갔다.[195] 미군정은 다시금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7년 3월 12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김구는 '트루먼이 전 세계 자유애호 인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1947년 4월 21일 비행기편으로 경기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김구는 김포공항에 나와 그를 친히 마중하였다.[196]

1947년 4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귀국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공산주의와 합작을 단념하였으므로 우리는 총선거법안을 빨리 만들어 남한과도정부를 수립하고 UN을 참가시켜 소련을 설득한 후 통일을 이뤄야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제 김구와 김규식은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단념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할 것'이라고 요구하였다.[197] 이승만이 임정법통론을 보류한데다가 4월 29일에는 국민의회 주석 취임까지 거부하자 급기야 5월 2일 경교장에서 이승만, 김구, 조소앙, 조완구, 이청천, 김창숙 등 국민의회 국무위원들과 독촉국민회 지방대표 여러 명이 모여 회담을 하였는데, 이승만의 임정봉대가 필요할 시기가 올 때까지 보류하자는 의견과 임정 일부요인의 임정봉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좁혀지지 못하였다.[198]

1947년 5월 9일 이승만은 "대한임정법통관계는 지금 문제삼지 말고 아직 잠복상태로 계속하였다가 정식국회와 정식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임시 의정원과 임정의 법통을 정당히 전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199]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편집

 
단국대학 설립시 격려차 방문 1948년 1월 18일 낙원동
앞줄:김구 장형, 뒷줄:장도빈, 엄항섭, 양주동, 김정실, 박정숙

1947년 3월 20일 김구는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광복군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였다.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하였다.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는 장형으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인재 양성의 발상은 청년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김구 개인의 신념에서 나왔다. 이 단체는 임정이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강사는 조소앙·조완구·신익희·지청천·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양주동(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엄항섭·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정인보·황기성(黃基成)·이인·김활란·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된 후 재정난 등의 문제로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산했고,[200] 건물(원효사)은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됐다.[201]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편집

 
김구 (1947년)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를 놓고 우익진영이 분열되었다. 6월 10일 한민당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우익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였다.[202] 이에 이승만은 "공위 참가할 사람은 5호 성명에 서명(찬탁)하기로 되었는 즉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중략) (5호 성명에)서명해서 (신탁통치를)지지하기로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이니... (후략)"라며 한민당을 비판하였다.[203][204] 6월 22일 한국독립당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3당으로 분립하였다. 한국독립당이 미소공위에 불참한다고 하자, 이에 반발한 안재홍·박용희 등 혁신파는 신한국민당을, 권태석 등 민주파는 민주한독당을 각각 결성하여 미소공위에 참가하기로 하였다.[205] 이렇게 우익진영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한민당 중심, 이승만·김구 중심, 유림 중심의 3파로 분립하였다.[206]

1947년 6월 23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주관 하에 전국 각지에서 반탁시위가 벌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많게는 수만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 반탁시위를 하였다. 종로 군정청 앞에서는 마라톤 선수 서윤복 귀국환영회가 끝나자마자 전국학련 학생들의 주도로 반탁시위가 있었다(1만명).[207][208] 이 외에 경무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오류동(200명), 평택(150명), 춘천 단양대(1만명), 대전(2천명), 김제 석수각(300명), 전주(3천명), 이리(익산)(3천명), 고창중학교정(3천명), 군산(5천명), 임실(400명), 진주(1천명), 광주(2만명) 등에서 반탁시위가 이루어졌다.[209][210] '비폭력 무저항'을 표방한 반탁시위는 대체로 평온하게 이루어졌다.[211]

 
덕수궁에서 이승만과 함께 (1947년)

1947년 7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 강연회에 김구, 김규식은 연사로 참여하였다. 김구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왔다. 다음 연사인 김규식이 장내에 소개되었다. 장내의 열띤 청중들은 김규식의 예정된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마침내 한 청년이 나와서 김규식과 같은 유물론자의 연설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두가 귀를 막자고 제안했다. 청중들은 이 문제를 표결에 붙여버렸다. 김규식의 연설을 듣지 말자는 주장은 바로 가결시켰고, 이어 김규식은 조용히 퇴장해버렸다. 김구는 이를 보고 말리지 않았다.[212][213]

1947년 9월 5일국민의회 부주석에 재선되었다.[214]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은 한국 문제를 UN으로 이관한다고 밝혔다. '미소공위를 통해 한반도에 민주적 독립국가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소련은 반발하였고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215]

정치 자금 조달 노력편집

김구는 환국 초기 조선일보방응모와 연대하였다. 방응모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의 위원으로 활동했고,[216][116]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임됐고,[217][218] 1946년 2월 8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에 선임됐고,[219]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으로 결정되었고,[220]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221] 1947년 1월 26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재무부장에 선정되었다.[222] 방응모는 1948년 1월 이후 김구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노선에서 이탈하여 남북협상 노선으로 가자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방응모는 1948년 2월 3일 '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라는 글을 발표하였다.[223] 방응모한국독립당 재정부장을 맡았었다는 데에는 그렇다 또는 아니다 하는 이견이 있다.[224]

김구는 중국 화교 무역으로 정치자금 마련을 모색하였다. 해방 이후 가장 비중이 컸던 대일무역을 비롯해 대외교역이 거의 끊어진 상태에서 유일한 것이 타이완·홍콩·마카오 등지와 이뤄졌던 화교무역이었다. “타이완산 소금이 한국에 수입됐는데 반응이 좋았고 빈 배로 돌아가기 아까워서 인삼을 실어갔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같은 한·중간 경제활동을 관장함으로써 양당의 정치자금으로 쓰고자 했다. 김구의 한국독립당중국 국민당 사이에는 모종의 계획이 추진됐다. 1947년 말 임시정부 주화(주중국)대표단에서 국민당과 김구의 연락을 맡고 있던 민석린은 ‘중한동제실업공사 조직요강 초안’을 작성, 중국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을 통해 장제스에게 올린다. "중국 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은 각 당의 경제기초 건설을 위해 중한동제실업공사(中韓同濟實業公司)를 조직한다. 업무범위는 무역·운수·어업·부동산·공장·은행·농장 등으로 정한다. 자금은 우선 1백억원을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이 절반씩 출자하고 장래 업무발전 상황에 맞춰 증자한다." 민석린과 우티에청 간에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고 갔다. 국내에서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운 김구나 장기간의 대일전과 국공내전으로 자금이 소진된 장제스, 양측의 이해가 맞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임시 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결고리였던 우티에청은 바람직한 내용으로 판단하고 장제스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국공 내전이 심화되면서 중화민국이 대부분의 영토를 중국 공산당에게 뺏기게 되었고, 이로써 화교무역을 통한 김구의 정치자금 조달 역시 실패로 끝났다.[103]

생애 후반편집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 출판사에서 백범일지를 활자화한 책을 처음 펴냈다.[225]

장덕수 피살 사건과 한국민주당과의 결별편집

 
장덕수. 재령 보강학교 당시 김구의 제자이기도 했다.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장덕수가 자택인 청설장(聽雪莊)을 방문한 박광옥, 배희범(裵熙範)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입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226]

1947년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 배희범을 체포하였다.[227]

1947년 12월 23일 국민의회장덕수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애국자들이 검거되고 있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였다.[228]

1948년 1월 16일 수도청장 장택상은 장덕수 살해 혐의로 한독당 중앙위원 김석황을 체포하였다.[229]

박광옥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다. 배희범은 연대상과 2년생으로 초등학교 교사였다. 김석황한독당 중앙위원이자 국민의회 정무위원 겸 동원부장이자 대한보국의용단(대한독립의용단) 단장이자 임정에 관여한 인물이었다. 또한 이들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다.

1948년 1월 21일 한국민주당임정수립대책협의회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로 개칭, 사실상 임정 측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다.[230]

1948년 2월 26일 군정장관 윌리엄 F. 딘김석황, 조상항(趙尙恒), 신일준(辛一俊), 손정수(孫禎洙), 김중목(金重穆), 최중하(崔重夏), 박광옥, 배희범 등이 장덕수 암살의 범인들이라고 발표하였다.[231]

 
김구의 군정청 법정 출두 장면 (1948. 03. 12)
 
미군 군사법정에서 증인 자격으로 심문중인 김구

1948년 3월 2일 장덕수 피살 사건 제1회 공개재판에서 미군 검찰은 권총·사진 등과 함께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 하였다.[232]

1948년 3월 8일 미국 군율재판 위원회는 북미합중국대통령 트루만의 명의로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에 출정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 하였다.[233] 같은 날인 3월 8일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김주석 부하에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범죄로 김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234]

1948년 3월 12일 미군 군사법정에 증인심문을 받았다. 김구를 심문한 미군정군법무관들은 대위, 소령, 중령급이었다. "(問) 선생의 제자격인 피고인들이 진술한 것마다 왜 한결같이 선생과 관련한 내용으로 부합 일치될까요? (答) 알 수 없지요. 그러니까 모략이라 생각됩니다." "(問) 누구의 모략이란 말이요? (答) 그것을 이루 다 말하자면 모단체나 개인에 관한 것이 나오겠지만 어쨌든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일 리가 없다."[235]

1948년 3월 15일 오전 공판에서 김구의 증인 신문 때 법무장교와 김구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자 암살범인 박광옥은 피고석에서 김구 선생을 모욕한다고 고함을 지르며 혁대를 풀어들고 횡포를 벌여 미군 헌병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미군정 라만 검사의 "애국자로서의 선생은 장덕수씨를 애국자로 생각했오?"라는 질문에 김구는 마지 못해 "張 개인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적은 없지만 환국이래 나와 같이 일한 사람이면 모두 애국자로 보니까 장씨도 애국자로 봤겠지요"라고 답했다. 김구에 대한 증인 심문이 끝나고 오후 공판에서 배희범은 "정권을 잡기 위하여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한 것",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분자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 때문에 장덕수를 암살했다고 증언하였다.[236]

1948년 3월 17일 제11회 공판 내용에 따르면 박광옥, 배희범 등 용의자들은 장덕수 등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1947년 8월 한양의원에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다. 최중하의 진술에 따르면 원래 안재홍·배은희·장덕수를 암살하려 했으나 "안재홍씨는 찬탁을 부르짖은 죄는 크나 그후 남북통일을 제창하게 되었으므로 용서하였고 배은희는 그 정치적 실력이 크지 못하므로 제거하지 않아도 좋을 것으로 결정되어 오직 장덕수 1인을 죽이기로 된 것"이었다고 하였다.[237]

1948년 4월 1일 제21회(최종) 공판에서 김석황, 趙尙恒, 辛日俊, 孫禎洙, 金重穆, 崔重夏, 박광옥, 배희범 등 8명에게 교수형이 선고됐고, 趙燁, 朴鼎悳 등 2명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238]

1948년 4월 22일 존 하지는 군사위원회의 판결을 검토 후 중앙청공보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최후적 조치를 발표하였다. "1) 박광옥배희범의 사형은 승인하나 그 집행은 추후 재심할 시까지 보류함. 2) 김석황·申一俊·金重穆·崔重夏의 사형은 종신형으로 감형함. 3) 趙尙恒 및 孫禎秀의 사형은 10년형으로 감형함. 4) 趙燁 및 朴鼎悳의 10년형은 5년형으로 감형함."[239]

남북협상 (1948)편집

남북협상 선언편집

1947년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 총선거는 "국토를 양분하는 비극"이라고 발표했다가,[240] 11월 30일 오전 10시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한 뒤 1시간 정도 요담한 결과 "독립정부수립 견해에 완전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하였다. 의견 일치를 입증하듯 오후 1시경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241] 12월 1일에는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242] 12월 4일 김구는 "국민의회민대와의 완전합작은 민족단결 공작에 기초를 주는 것이며 심히 경하할 일이다. 나와 이승만 박사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즉시 실현하자는 목적에 완전한 합의를 보았다"고 하였다.[243]

1947년 12월 12일 수도경찰청 장택상은 '국민의회 측 간부 몇 사람이 장덕수 피살 사건에 관계된 사실이 있다'며 국민의회한국민족대표자회의(민대) 합동회의에 대한 집회금지조치를 내렸다.[244] 이에 12월 14일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하여 장덕수 피살 사건 때문에 한독당원들이 구속된 문제에 관해 요담을 나눴다.[245] 12월 20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을 맞이할 한국민족대표단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공동고문으로 추대되었다.[246] 12월 21일 집회금지조치로 인하여 한국민족대표단 선정이 보류된 상황에서 이승만민대가 일방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결정 발표하자 김구의 국민의회측이 반발하였다.[247] 하지만 12월 26일 이승만과 김구가 이에 대해 원만히 합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248][249]

1947년 12월 20일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조소앙은 "국민의회 민대의 단결에 실패된데 상심한다"면서 "무력과 테러로써 정권을 찬탈하는 것은 벌써 고대의 악습"이라면서 돌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250] 이는 1948년 1월 11일 국민의회민대 합동문제가 해결되고 소위원회 의장에 조소앙, 부의장에 명제세가 추가 선출되면서 일단락되었다.[251]

1948년 1월 12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1948년 1월 23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 소련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252] 그러자 1월 28일 김구는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에게 '미소양군이 철수하여 군정의 간섭없이 유엔 치안 하에 자유스러운 선거를 치러야 하며,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253] 2월 9일 김구와 김규식유엔 한국 임시위원단크리슈나 메논에게 남북한 동시 총선거 성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재차 제안하였다.[254] 이는 남한 단독 총선거를 통해 국제적으로 공인된 정부를 수립한 뒤 압도적인 득표율을 근거로 소련을 쫓아내고 통일을 이루려던 이승만의 계획에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승만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단체와 언론이 남북협상에 회의적이었다.

 
38선에서 모습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할 뜻을 굳히자 신익희, 조소앙이 찾아와서 그를 만류하였고 이철승 역시 그를 찾아가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당시 김구의 현실적인 처지는 더욱 어려웠다. 김구는 한편 으로 선거 참여를 권유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덕수 암살 사건에 관한 군율 재판으로 곤욕을 치러야 할 형편이었다.[255]

김구가 남북협상론으로 노선을 바꾸자 측근의 한사람이던 김학규도 반대하였다.[256] 그리고 김학규는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하고[256], 그를 한국독립당에 입당시켰다.

1948년 2월 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 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 총선거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자기위안을 받으려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은망념(邪恩忘念)은 해인해기(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정부 독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257]

이어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258]

1948년 2월 26일 유엔은 남한 단독 총선거를 가결하였다.[259] 3월 1일 김구'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추대하나 남한 단독 총선거에는 불참한다'고 선언하였다.[260]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261] 한편 한민당으로부터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로당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그들이 "크렘린 궁의 사자"라느니 하며 비난을 받았다.[261] 한민당은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 에서 김규식은 한 때 공산당원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할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고, 김구도 토지국유정책 등을 볼때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261] 는 공격을 당했다.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262]

1948년 4월 1일 이승만은 남북협상 찬성은 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263]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열린 YMCA임시회의에 연사로 참석한 윤치영으로부터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264]

1948년 4월 15일 오후 5시경 김구는 경교장 출입기자단을 초청해서 '남북협상은 성공되리라고 그다지 큰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통사정하려는데 지나지 못한다는 것'과 또 "내가 이번 북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김구는 통일독립을 위해서 끝까지 투쟁하였다고 3천만 동포에게 전하여 주기 바란다"는 비장하고 중대한 발언을 하여 남북협상을 주장하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동시 정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265]

남북연석회의 참가편집

김구는 북행에 앞서 남북협상의 목표는 오직 통일임을 천명하였다. "금차 회담에 방안이 무엇이냐고 묻는 친구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미리부터 특별한 방안을 작성하지 않고 피차에 백지로 임하기로 약속되었다. (중략) 남쪽에서 단선군정을 목숨 걸고(誓死) 반대하던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 후에 그와 유사한 어떤 형태를 표현시키지나 아니할까 하고 걱정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있는 한 완전한 기우가 되리라는 것도 단언하여 둔다."[266]

1948년 4월 19일 오전 5시반경부터 대동청년단, 이북학련(以北學聯), 대한학생총연맹(大韓學生總聯盟)에 속하는 대학중학생 140여 명이 밀려와 마당에 늘어 앉은 한편 뒷문까지 가로막고 김구의 북행을 만류하였다. 이 때문에 김구는 오전 8시경 차를 타고 임시외출하려다가 마당에 내려 다시 실내에 들어갔다.[267] 그리고 오후 3시경 비밀리에 김신, 선우진을 대동하고 자동차로 서울을 떠나 오후 6시 20분경 38선 경계선인 여현(礪峴)에 도착해 기념촬영을 한 후 평양으로 향했다.[268]

1948년 4월 19일 밤 평양에 도착하여 21일 평양신문기자단 회견에서 38선 제거에 남북 공동노력을 역설하였다.[269]

한편 신병이 심하여 병원치료를 받던 김규식도 평양으로 출발하였다. 북행 직전 장건상은 김구를 찾아 방북할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김구는 방북할 의향이 없다는 의사를 밝혀왔다.[270]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나타나자 장건상은 놀랐다고 회고하였다.[271]

1948년 4월 21일 0시부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려는 개인 및 대표자들의 38선 이북 월경이 금지되었다.[272]

1948년 4월 21일 김구는 남북연석회의에서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자주의 독립을 진취할 대계를 상토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발전이며... (생략)"[258]

남북연석회의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이를 눈치챈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였다.[273]

1948년 4월 23일 남북연석회의에서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전조선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 결정되었다.[274] 그리고 4월 25일 평양방송이 이 결정서와 격문을 방송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내 정계에 일대 파문이 일어났다. 즉 이 결의서와 격문이 발표되자 김구·김규식 산하 진영에서는 이때까지 남북협상을 추진해 온 근본이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26일 민주독립당 등에서는 연락원을 급파하였으나 소련측의 입국거부로 인하여 드디어 빈손으로 귀경하였다.[275] 같은날 4월 25일 이승만은 선출되지 않은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대표의 자격이 없으며, "남북협상은 소련에게 이용당한 결과"라고 혹평했다.[276] 4월 27일 민족진영 각계는 남북협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277]

1948년 4월 26일 김구는 송태산장을 찾아 안창호의 형인 안치호, 여동생 안신호를 만나고 내려왔다.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에서
왼쪽부터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1948년 4월 30일 평양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1948년 5월 2일 북한은 남북협상을 근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였다.[278] 남북협상이 북한에게 '합법 정부'를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279]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연석회의 당시 대부분의 인사들은 김일성 만세를 불렀고, 그러면 누군가 술을 따라주고 밴드가 울린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전혀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안했다.'고 증언하였다.[280]

1948년 5월 5일 오후 8시경 김구·김규식 등은 일행 60여명과 같이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281]

1948년 5월 6일 김구는 "경교장에서 내가 떠날 때 만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다녀왔는데 이번 우리 일행의 큰 소득은 말할 수 없으나 장차로 남북의 우리 동포는 통일적으로 영구히 손잡고 살아가겠다는 기초를 튼튼히 닦아 놓았다. 첫술에 배부르는 법은 없는 것이니 다만 한 두 번 또다시 만난다면 우리의 목적 달성을 확신하는 바이다"라고 소감을 밝힌 후 남북협상의 성과에 대한 김구·김규식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281]

김구의 남북협상 참가 배경에 대해,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고 한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한독당 중앙 간부에게 북한방문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일부가 남로당에 유출되었는데, 이를 목격한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에 의하면 김구의 생각이 나와있다고 한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이북사람들이 전부 김구를 지지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만일 단독정부를 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되는데, 통일적으로 하면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고 확신했다는 것이다.[282]

남북협상에 다녀와서 나 없는 동안에 총선거니 뭐니 해서 거기 입후보한 사람은 다 탈당해라고 했다.[283] 그러자 김선(1910~) 등 총선거에 출마한 당원들은 '그래도 다 같이 애국운동 하던 사람인데(이승만) 이젠 나라 세운다니까 여기서 일하자.' '말이 당수지 나가랄때 나가자 우리가 아쉬울 것이 있냐' 하며 한독당을 탈당했다.[283]

김구는 김일성이 1948년 6월 29일에 열리는 제2차 남북연석회의를 제의해 왔을 때는 완전히 거절해 버렸다.[284]

김구와 이승만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한독당의 당원이던 김선의 회고에 의하면 남북협상에 다녀온 뒤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이승만 박사 욕을 하더라[283]'는 것이었다. "우리가 중국서 뻣뻣한 빵 한 조각으로 며칠씩 끼니 할 때 이승만이 반역자 자금 걷으러 미국 간다 하고선 돈커녕 미국 여자 하나 얻어서 침대서 잠자고 이제 와서 지가 애국자라고 나와?" 그러면서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김선에게 '거 뭣하러 가서 만나느냐'고 대응했다.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 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라며 조롱하였다.[283]

남북협상 직후편집

1948년 7월 21일 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통일독립촉진회 주석에 추대되었다. 김구는 반공주의자였고[285] 김규식 또한 반공적이어서 두 사람은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285]

1948년 8월 김구는 어머니 곽낙원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서울특별시 정릉에 안장했다.[286][287] 이어 차남 김신을 시켜 상하이쓰촨성 충칭에 있는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하고 정릉 가족묘지에 안장했다.[286][287] 어머니 곽 여사의 유골을 정릉 뒷산에 안장할 때 기수들이 기마의 장대 역할을 맡아 운구차를 호송해주었다.[288] 경마 경주를 좋아하였으나 이때 운구를 호송해 준 기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그는 이후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기도 했다.[288] 이승만도 경마장을 자주 찾았고, 이때부터 경마대회 시상 중 이승만상, 김구상이 즉석에서 생겨났다고 한다.[288]

여수·순천 사건 당시편집

1948년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948년 10월 19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여수·순천 사건의 경위와 성격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하고 반국가적 반란군을 책동하여 일으킬 책동을 하였다. 불행히도 군정이양전이 되어서 그 가운데 그 중 오동기란 자가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소령으로 승진하여 여수연대장에 취임하였다. 이 자는 여수에 가서 소위 하사관 훈련의 기회를 포착하여 단순한 하사관들을 선동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극우진영인 해외와 국내의 정객들과 직접 간접으로 연락하여 가지고 러시아 10월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전국적인 기습 반란을 책동하였다." "천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의 패악은 물론 여기에 국가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하여 죄악적 행위를 조장시키고 사리(私利)를 위해 합한 것은 가증한 일이다."[289]

이범석은 극우진영, 즉 한국민주당을 지목하였지만 이를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구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1948년 10월 27일 여수·순천 사건 진압 직후 김구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였다.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금번 반란을 우려하고 있다. (중략) 현재까지의 당국 발표에 의하면 반란무리의 목적은 북한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후략)"[290] 같은 날 한국민주당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금번 반란의 주요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신신훈련(神神訓練)의 결핍에 있다고 논하였다.[290] 김구는 본인이 극우가 아니라 해명했고 민주당은 그저 정부를 탓했다.

1948년 10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전남지구 반란사건 배후관계에 관하여 전번 李국무총리는 극우진영과 좌익계열의 합작이라고 말한 바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사실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번 반란사건에 있어서 국무총리로부터 일부 극우분자와 좌익계열의 합작이라고 말한 데 대해서는 좌익계열이라고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 극우분자라고 한 데 대해서는 국무총리로부터 이에 대한 해명이 있을 줄로 믿는다"라고 답하였다.[291]

1948년 10월 30일 김구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방화·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금번 여수·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 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 처지지 아니할 수 없다."[292]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한국민주당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이범석의 발표 때문에 인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계속 주장하였다.[293]

민족진영 재결합의 노력편집

 
김구 (1949년)

한편 1948년 초 남한 단독 총선거와 남북협상 문제로 인해 틀어졌던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의 관계는 우여곡절을 거쳐 점차 회복되었다. 1948년 5월 29일까지만 해도 김구는 "당분간 이승만과의 합작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294] 이어 8월 14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하루 앞두고 김구는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라며 "강력한 통일독립운동을 추진하자"고 하였다. 반면 김규식은 점진적 통일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295]

1948년 9월 6일 장제스는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의 합작을 희망한다고 밝혔다.[296]

1948년 11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258]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에서, 대한민국 정부(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1948년 12월 15일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3영수 합작운동 태동이 보도되었다.[297] 1949년 1월 1일 김규식이 신년인사차 경무대이승만을 방문하였다.[298]

1949년 1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남북협상에 대해서 일부 인사들이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피력하면서 북한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맹약 파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299]

1949년 1월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258]

1949년 5월 말에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재결합이 가시화되었다. 5월 20일 김구는 "일반국민들이 3영수의 재합작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현 시국에 비추어 있음직한 일이나 본래부터 대통령과 김박사와 나의 사이에는 별반 간격은 없었던 것이므로... (중략) 과거 우리들의 노력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과 공간은 차차로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합일점으로 도달케 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중략) 대통령과 金박사와는 앞으로도 종종 만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하였다.[300][301]

한편 김구는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제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서거편집

피살 (1949)편집

 
경교장에 안치된 김구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김구는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격에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302]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302]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303]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 한다.[303] 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303]

김구가 피살된 1949년 6월 26일, 이승만은 저녁 9시가 넘어서 서울중앙방송국 방송을 통하여 애도방송을 하였다. "...나와 백범 선생 사이의 사분(私分)으로 말하면 호형호제하고 의리는 실로 사생을 같이하자는 결심이 있던 터이며, 임시정부 주석으로 내가 절대 지지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가 귀국했을 때에 나는 무조건하고 지지하여 온 것입니다. 중간에 와서 정치상 관찰의 약간 차이로 말미암아 정계에 다소 의아하는 점이 없지 아니해서 우리 두 사람이 양편으로 시비를 듣고 있었으나 내가 믿고 바라기는 백범 선생이 조만간에 나의 주장하는 것이 아무 사심이 아니요 민국 대계에 유일한 방침으로 각오될 날이 있을 것을 믿고 있었으며, 근자에 와서는 이런 희망이 점점 표면에 나타난 것을 보고 나는 마음에 기뻐하는 중인데 졸지에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어공어사에 원통한 눈물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후략)"[304]

이승만은 남북통일에 앞서서 민족진영을 재결합하는 데에 실패했고, 반민특위는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이득을 본 것은 오직 공산당과 친일파와 민주당이었다.

경찰은 암살자가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찰은 암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외부에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305] 6월 27일 이승만 정부는 김구의 죽음이 그의 한국독립당 내에서의 의견 분열 때문이었다고 비판했다.[305] 그러나 정부의 한 고위 인사는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발설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라고 보도했다.[305]

장례편집

1949년 6월 27일 김구의 장례는 국민장이 결정되었다. 이날 오후 5시부터 김규식·최동오·조소앙·안재홍·명제세 등이 회합하여 '고백범김구선생국민장의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는 오세창, 부위원장에는 김규식·조완구·이범석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묘지는 김구의 유언대로 효창공원 3열사묘 서록에 안치하기로 되었으며, 장일은 7월 5일로 결정되었다.[306] 이승만 부부는 7월 4일 오전 9시 40분경 조문하였다.[307] 김구의 국민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국민장이었다. 조가(弔歌)는 시인 이은상이 지었다. 행진곡은 쇼팽장송행진곡을 다단조로 연주하였다.

1949년 7월 5일 새벽 1시경 경교장에서 결관식(結棺式)을 가진 뒤, 오전 10시 30분 운구가 경교장을 출발, 오후 12시 ­서울운동장에 도착하여 영결식을 갖고, 오후 3시 발인을 하였다. 오후 4시 50분 장지인 효창공원에 도착하여 오후 5시 하관하고 오후 6시 폐식하였다. 1949년 7월 5일 오후 6시 30분경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308]

암살의 배후편집

김구의 암살 배후는 미궁이다. 안두희6.25 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국회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민주당 김준연,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 소위 88구락부가 암살을 주도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한때 백의사의 소행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라는 점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309]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에 의하면 염동진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은 김구의 암살에 백의사의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310][311][312]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사후편집

 
김구의 묘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 《도왜실기》, 《백범어록》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도 둘째 아들 김신은 계속 대한민국 공군으로 복무하였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공군 중장으로 퇴역한다. 한편 미국으로 떠난 맏며느리 안미생미국인과 재혼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 행방은 미상이다. 안미생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한 손녀딸 김효자 역시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범김구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60년 고정훈 등에 의해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에 의한 암살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창숙 등에 의해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암살범 안두희(安斗熙)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1963년 서울특별시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313] 1998년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어 2002년 10월 22일에 건립되었다.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원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 이승만이 또 다른 후보로 등록되어 논란이 일어나자 10만원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314][315]

2009년 6월 26일 소지품인 회중 시계, 유묵 작품 3점, 인장(印章) 3점 및 피살 당시 착용한 혈의(血衣)가 등록문화재 439~442호로 등록되었다.

평가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독립운동가편집

일제 강점기 당시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성사시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것을 높이 평가된다. 김구는 이념을 내세워 분열시키는 냉전세력을 비판함과 함께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독립국가를 모색했다는 점, 민족과 인류의 현실을 고려하여 문화국가가 되기를 주장했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받는다.[316] 그러나 이는 반탁투쟁과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한 뒤에, 뒤늦은 행동이었다는 부정적인 시각들도 존재한다.

1999년 한겨레21이 실시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백범은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인물이었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317]

단국대 사학과 교수 한시준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많은 지도자가 있었고 군대 편성 계획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현시킨 이는 김구 뿐"[318] 이라며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만들어 낸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318] 중국 푸단(復旦)대 교수 쑨커즈(孫科志)는 "혼란스러웠던 중국에서 정치적 난민에 가까웠던 한인 사회를 유지하고 임시정부 등 독립 운동의 기반을 갖춘 것은 김구의 면모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보았다.[318]

2006년 9월 22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3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318] 이 학술대회에 참가한 한국과 중국의 학자 12명은 김구에 대해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318]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백범은 민족의 독립만을 생각한 지도자”라며 “청년시절부터 동학, 불교, 기독교에 차례대로 귀의한 것은 모두 독립을 위한 힘을 모으려고 했기 때문[318]”이라고 봤다. 대학교수 리영희는 김구의 장례식때 울려 퍼진 추도곡을 반세기 넘게 기억하며 추모하기도 했다.

박용만(1924)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319]

외교력편집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신용하는 “당시 장제스(蔣介石)를 설득해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한 것은 백범 외교의 진가”라고 평가하였다.[318]

이승만을 통해 미국과도 외교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평가도 있다. 단국대 교수 한시준도 “백범이 광복군의 연합군 OSS부대 참가를 주도한 것은 승전 후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려 한 것”이라며 “이는 백범이 외교에서 상당한 전략을 구사했음을 보여 준다”고 평가하였다.[318] 중화민국 장제스 정부에서 임정에 대한 지원을 줄이자 그는 이승만과 함께 임정미국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당대의 여론편집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8%의 득표로 33%의 여운형, 21%의 이승만에 이어 3위에 기록되었다.[320]

1945년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293명이 김구를 지목하여 2위로 집계되었다.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56표를 얻어 4위였다.[320]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702표로 전체의 10.5%를 확보했다.[320]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568표로 2위를 하였다.[320]

부정적 평가편집

백색 테러편집

2008년 5월 출간된 비한국사 전공자로 구성된 뉴라이트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에서 그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여 물의를 빚었다. 한양대 석좌교수 신용하는 김구 테러리즘 논란에 대해 윤봉길과 이봉창의 의거를 주도한 한인애국단을 ‘테러리스트’로 평가하는 국내 일부 학자의 시각에 대해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반박했다[318] 신용하에 의하면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던 1930년대는 ‘완바오산 사건’으로 중국 내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됐고,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중국 각지를 점령하면서 중국에서도 독립운동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 신 교수는 “임시정부는 열세적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운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318] 7개월에 불과한 한인애국단 활동 기간 중 백범이 중국 국민당에서 독립군 장교 양성 지원 약속을 받아낸 것도 백범의 치밀한 지략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임시정부의 지시가 있었으므로 테러가 아니라 정부 차원의 ‘특공작전’으로 봐야 한다[318] 고 평하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민간인을 상대로 하여 사망 혹은 중상을 입히거나 인질로 잡는 등의 위해를 가하여 대중 혹은 어떤 집단의 사람 혹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공포를 야기함으로써 어떤 사람, 대중, 정부, 국제 조직 등으로 하여금 특정 행위를 강요하거나 혹은 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침략기관, 일본의 침략행위에 참여한 군인이나 관료등을 상대로 진행된 항일운동을 테러로 보지 않는다. 윤봉길이봉창등은 일본 천황, 일본 고위 군인등을 상대로 한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구가 해방 이후 한국인 정치가들에 대해 대해 암살을 시도한 백색 테러를 저질렀다는 의혹 또한 존재한다. 김구는 소군정기 북한의 지도자 및 관료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며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 별다른 직위 없이 남한에서 정치 운동을 이끌던 사람을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다. 백의사가 북한의 관료였던 강량욱을 암살하고자 할 때 죄없는 아들, 딸, 친구 목사까지 죽게 만들었다.[321] 강량욱은 고위관료여서 민간인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희생당한 강량욱의 가족, 친구는 민간인이므로 강량욱의 집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은 백색테러라 볼 수 있다.

권위주의편집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은 "경교장에 가서 만나면 언제나 김구 선생은 한복차림으로 있었다. 내가 김구선생과 얘기하고 있을 때 비서가 와서 외출하자고 하니까, 바지저고리 차림의 김구 선생이 일어섰다. 그러면 비서가 두루마기도 입혀 주고, 모자도 씌워 주면서 문도 열어주는데,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비서가 구두도 신겨 주고, 손에다 지팡이를 쥐어 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선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322][323] 당시 박갑동은 해방일보 기자 자격으로 경교장, 한국독립당, 한민당, 수도경찰청 등에 출입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방북시에도 숙소에서 여자 접대원들에게 "야!"라고 불렀더니 그들이 못들은 체 한 것이다. 김구가 화가 나서 "왜 부르는데 대답을 안하나?"라고 묻자 접대원들은 "저희는 그렇게 습관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몰랐습니다."라고 답했다.[322][324]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라는 위계서열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물의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정연하게 배열돼야 했고 이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순종과 직분을 통해 조화로운 세상의 구현을 추구했으며 그에게 좌파의 평등주의는 이 조화를 해치고자 하는 일시적 풍파일 뿐이었다.[325]

정치적 실패편집

제1대 내무부 장관과 13대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동산 윤치영은 그는 김구 단정 수립 반대를 호되게 비판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백범의 명분은 옳았지만 이것은 우리 가슴에 칼을 내지르는 소리요. 결과적으로는 백범 망신에 그치고 만 것이 다행이지, 만약 그때 남북합작(南北合作)을 한다고 덤볐다가는 나라가 망했을 것입니다."[326] 윤치영은 '백범 선생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326]

윤치영은 또 김구 생전에 그가 임정의 이름을 팔아먹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YMCA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윤치영은 연단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평양 일방 남북회담을 적극추진하고 있는 김구를 지적, 중국으로부터 귀국 시에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도장을 찍고 돌아왔으니 그는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다 라며 성토하였다.[327]

동시대 인물들에 의한 평가편집

이범석은 자신의 회고록 《우둥불》에서 우남과 백범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우남 이승만 박사는 반조각 이나마 자유민주국가를 만들어 놓은 공이 있다. 이에대해 끝까지 대의명분론을 주장하면서 민족통일을 관철하고자 오직 소신대로 나간 분은 백범 김구 선생이다. 그런 까닭에 이 박사는 마침내 현실의 정치가로 일어섰고, 백범 선생은 이상의 정치가로 주저앉게 됐다."[328]

미국에서는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미국은 그를 파시스트[329] 로 보고 있었다. 미군정은 무자비하고(ruthless), 파렴치한(unscrupulous[330])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미국은 그를 기회주의자(opportunist)로도 묘사하였다.[330]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박정희 정부가 이승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앙했으며 김구는 '해방 정국에서 미아가 된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331]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332]

논란과 의혹편집

치하포 사건, 민간인 살해 여부 논란편집

1896년 3월 9일 김구는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했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22], 계속 민간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당시 일본의 기록이나 조선의 기록에서도 쓰치다 조스케가 군인이라는 내용은 없다. 199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소속 상인 이었다고 주장했다.[333]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부분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334]

2003년 11월김완섭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 공청회에서 “김구 선생은 ‘민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배포 하였다. 또한 그는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내용의 인쇄물도 배부하였다. 문건을 받아 본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즉석에서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는 이를 근거로 검찰에 들고가 그를 고소했다.[335]

2004년 7월 검찰은 공소장에서 “김구 선생이 1896년 10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를 처단한 뒤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고 밝혔다.[335] 이어 그는 서울고검으로부터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다. 서울고검 정현태(鄭現太) 검사는 7월 27일 그를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소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작가 김완섭씨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언론에 밝혔다.[335] 또한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한 바 있다. 서울고검의 검사 정현태는 김완섭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국가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밝혔다.[336]

김립 암살, 무고 의혹편집

1922년 2월 11일상하이의 거리에서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김립을 암살했다.[45]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김립레닌에게서 지급받은 금괴로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였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국인, 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다. 그러고서 자기는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337]

박노자는 이 사건에 대해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반병률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공산당을 적대시하던 정적들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김립이 축첩을 했다는 김구의 주장에도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45]

민주당 3당수 암살 또는 암살미수 배후 의혹편집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 암살 당시 미군정은 김구를 암살의 배후로 봤다.[125] 그러나 1946년 4월 9일 경기도경찰부는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을 체포하였는데, 이날 경찰은 한현우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송진우를 돕고 있던 자인데 그의 지휘하에 유근배, 김의현이 권총을 발사하여 송진우를 암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126][127]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암살 당하자 미군정은 김구를 암살의 배후로 봤다. 수도경찰청장 겸 경기도경찰청장 장택상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 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고 했다.[338]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 장택상에 의하면 '그리고 이 사건을 군정 재판에 넘기고 말아서 우리(군정청 경찰)는 끝내 손을 못 대고 말았다. 평소 모든 사건을 매서웁게 처리하는 나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하지 중장은 혹 김구 씨에게 무슨 화가 가지 않을까 염려가 된 나머지 이와 같은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라고 했다.[338] 허정은 장덕수 암살이 임정의 소행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차마 김구 주석에게는 가서 따지지 못하고 소년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조소앙을 찾아가서 따졌다.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허정은 조소앙을 찾아가서 "왜 설산을 죽였소"라며 따졌다. 구미위원부에 10년간 근무했던 허정은 한인애국단과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준비하는데 조소앙이 기여한 점을 근거로 조소앙을 찾아갔던 것이다. 허정은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피했다. 허정은 "너털웃음으로 숨길 수 있을 줄 아시오? 끝내 속이지는 못합니다."라고 외치고는 뛰쳐나왔다.[339]

1947년 11월 28일 호남선 열차에서 친일파 출신 국회의원 김성수가 암살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340] 미군정은 김구를 암살미수의 배후로 봤다.[341][342] 그러나 1947년 12월 23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조선해양청년단(朝鮮海洋靑年團) 소속의 백영기(白英基), 문균석(文均錫) 등이 여운형 피살 사건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김성수조병옥을 노렸던 거라고 밝혔다.[340] 김성수한민당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는데도 김성수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한민당은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341][342]

흑함운동 배후 의혹편집

1946년 11월 3일 38선 이북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때 월남했던 반공세력이 일부다시 월북하여 선거방해를 도모하였다. 김일성은 이를 이승만과 김구가 배후에서 조종한 짓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이들의 방해로 선전대원 몇 명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선거가 비민주적이다”, “승려들과 목사들은 선거하지 말라”, “공동후보가 아니라 자유경쟁” 등으로 선거에 비판적이었고, 유권자들에게 선거에서 찬성하면 흑함에 넣으라는 흑함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하여 김일성은 인민의 원수이며 반동파들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간첩배가 된 세력으로 몰았다. 김일성은 선거기간에 생산기관의 방화, 운수부분에서 충돌사건, 주요 인사의 암살미수사건 등이 반동세력의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였고, 나아가서 북한에서 일어난 방화를 이승만과 김구가 파견한 방화단으로 규정하였다.[343]

남북협상 참여 논란편집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가 민족의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한 행동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남북협상이 북한에게 '합법 정부'를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실제로 북한은 남북협상을 근거로 1948년 5월 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였다.[278]

또한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가 순수하지 않은 정치적 전술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모든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 시점에서 새로운 정국 반전을 노린 것이라는 것이다.[325]

사상과 신념편집

민족주의편집

김구는 민족의 적을 북한인민이 아닌 북한군, 노동당, 북한정권이라고 봤다. 그래서 북한수뇌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백의사 등을 통해 김일성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론 민족의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김일성남북협상을 갖기도 했다.

반공산주의편집

그는 공산주의를 일종의 독재체제로 이해하였다. 김구는 《백범일지》 상·하편 뒤에 붙은 〈나의 소원(1947)〉 제2장 '정치 이념' 에서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비판하며 자신의 반공주의 사상을 강조하였다.[344]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중략)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통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로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325]

자유주의편집

《백범일지》 중 〈나의 소원(1947)〉 제2장 '정치 이념' 에서 김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344]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애국가에 대한 관점편집

애국가가 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일부 개사했다는 소문은 1920년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이에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345]'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345]'고 반박하였다.

기타 일화편집

1947년 백야 김좌진의 추모회에 참석한 김구는 김좌진의 추도사를 했다.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346]

김구의 '구(九)'와 호 '백범(白凡)'의 유례편집

김구는 자신의 호인 백범의 유래에 대해서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1912년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36]

이승만과 김구편집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승만과 김구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낙방 후 이승만은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던 중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김구는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 28세 때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이승만과 김구 모두 우파였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화민국(대만) 노선으로 갔다.[347]

이승만과 김구는 1920년 12월경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임시 대통령과 경무국장의 관계로 첫 대면을 하였으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서른여섯 살 때인 1912년부터 투옥 시절 '감옥 선배' 이승만을 흠모했다고 고백하였다. "서대문 감옥에는 역대의 진귀한 보물이 있다. 지난날 이승만 박사가 자기 동지들과 투옥되었을 때에 서양인 친구들과 연락하여 옥중에 도서실을 설치하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진귀한 서적을 구입하여 5~6년 동안 (중략) 강연했다. 그 가운데 이 박사의 수택(手澤·손때)과 누흔(淚痕·눈물 자국)이 얼룩진 책자를 볼 때 배알치 못한 이 박사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無限)의 느낌이 있었다."[348]

이승만과 김구는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 한편 김구도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1946년 모친 곽낙원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뒷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하며,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 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349]

이승만과 김구는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김구의 말년에 발생한 장덕수 피살 사건 때문에 이승만과 김구가 결별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948년 3월 8일 김구가 장덕수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정에 출석하자,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234]

윤경빈에 의하면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냐 '남북 통일 정부 운동'이냐 노선을 두면서 이승만과 김구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350] 이 갈등조차 1949년 5월 19일 이승만과 김구의 회동을 거치며 봉합되고 있었다.[351] 1949년 5월 20일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국민들이 3영수의 재합작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현 시국에 비추어 있음직한 일이나 본래부터 대통령과 김박사와 나의 사이에는 별반 간격은 없었던 것이므로... (중략) 과거 우리들의 노력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과 공간은 차차로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합일점으로 도달케 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중략) 대통령과 金박사와는 앞으로도 종종 만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352] 그러나 한 달 후인 1946년 6월 26일 김구의 피살로 인해 화해의 결실을 맺진 못하였다.

옥관빈 피살 사건편집

옥관빈이 암살당한 사건.

정화암은 이 사건이 옥관빈이라 밀정이라 암살했다 주장한다. 다음은 전문가의 검증을 받지 않은 증언록을 인용한 내용이다.

인성학교에 돈을 준 옥관빈은 우리나라 신문을 이용하여 자기를 과대선전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353] 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를 했다.[354]

옥관빈은 상하이에서 유명 인사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수백 명의 제약회사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고, 많은 돈을 써서 신문사를 포섭하여 상하이의 고급 관리는 물론 재계와 종교단체까지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354] 호화스러운 저택과 고급 승용차에 거만한 언동 등 그의 위세는 너무나 당당했다고 증언한다.[354]

어느 날 이를 보다못한 김구가 정화암을 찾아갔다고 주장한다.[354] 김구는 즉석에서 정화암에게 옥관빈을 죽이자고 제의하였으며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한 그 언동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거 주장했다.[354] 정화암은 동의하였고, 백범하고 정화암안공근 셋이서 이야기를 하며[354] 이어 옥관빈 암살을 지원하였다고 주장한다. 옥관빈은 그해 8월 1일 불조계에 살던 다른 흥사단원 이모의 처를 만나 몰래 간통하고 나오던 길에 남화한인동맹원 엄형순 등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고 주장한다.[355]

하지만 김구가 직접관여했다는 주장을 교차검증하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백범일지에는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356]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선 옥관빈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357]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358]에는 옥관빈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359]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해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근거가 없다고 결론이 나왔다.

또한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이란 가설은 어디에도 확인이 되지않는다. 구글학술검색에 의하면 옥관빈이 논란이 되는 건 밀정여부로만 나오며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원인설은 확인되지 않는다.[360]

그리고 본래 친일(親日)이라는 단어 자체는‘일본과 친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다. 현대 한국 내의 '친일'은 본래 의미와 다른 의미이다.[361] 그리고 일본 사전에는 한국과 같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친일'언급만으로는 현대 한국 내 통용되는 친일파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이에 비해 소수설에 의하면 옥관빈은 밀정이라고 한다. 이호룡은 옥관빈을 밀정이라 주장했다. [362]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고 기술하였다.[363],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364]

사학계 외부인인 언론인 겸 국회의원인 손세일은 옥관빈을 밀정이라 주장했다.[365]

안공근과의 결별편집

1939년 5월 30일경에 발생한 안공근 피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는 첫번째는 일제 밀정이다. 당시 상해에서 일제의 간첩 공작이 매우 활발했고,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원으로서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여 일제의 주요 목표물이었다. 두번째는 중국계 마적인 나검북(羅劍北)에 의한 암살설이다. 세번째는 오영섭이 제기한 김구계에 의한 암살설이다.[366] 도진순도 김구계에 의한 암살 가능성을 크게 보았다.[367] 단 김구계가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며, 김구가 안공근 암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1934년 1월 2일 김해산은 "나는 몇 년전에 위혜림과 한국인 安恭根이 대공원(The Great World Amusement Resort) 근처에 도박장을 설립하자는 한 광동인의 술수에 수천달러를 사기당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고 진술하였다.[368]

1935년 11월 하순 김구파는 임시 정부의 당권을 장악한 김원봉파에 대항해 한국국민당을 창립했는데, 한국국민당은 김구를 중심으로 결속이 견고한 편이었지만 내분이 있었다. 그 원인은 대체로 김구의 비서격인 안공근의 인색함과 그의 전횡 때문이었다. 한때 김구의 팔다리로서 무장투쟁을 전담했던 김동우(金東宇) 즉 노종균(盧鐘均), 주효춘(朱曉春) 또는 양여주(楊汝舟) 즉 오면식(吳冕植), 한도원(韓道源) 등의 유력분자는 이에 극도의 불만을 품고 1936년 1월 초순 잇달아 난징(남경)을 탈출하여 상해에 잠입하였다.[369]

1937년 10월경 김구는 일본군이 점령한 난징에서 형수(안중근의 처)를 모셔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안공근을 심히 질책하였다. 《백범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안공근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 이로써 안공근은 김구와 결별하고 단독활동을 시작했다.[370]

1938년 2월 임정을 따라 후난성(호남성) 창사(장사)로 이동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안공근·안경근을 홍콩에 파견해 안정근·안우생·김인과 동지 규합과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다.

1939년 5월 안공근중국 국민당을 통해 가족들을 데리고 충칭(중경)에 거처를 잡고 유진동(劉振東) 내외와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며칠 뒤 충칭(중경)에서 실종됐다. 훗날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은 "당시 한인 청년들이 충칭에서 개업중인 한인 의사 유진동(劉振東) 선생의 병원으로 안공근 선생의 시신을 들고 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371]

1939년 10월 3일 임시 의정원 제31회 정기회의에서 안공근은 의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의원 안공근은 그의 종적이 묘연하야 도원(到院)할 가능이 없다고 인정됨으로 그의 의원자격이 상실되는 것으로 인정하기로 결의하다"[372]

1940년 2월 1일 안공근임시 의정원에서 제적되었다.[373]

경교장 생활편집

김구 비서 선우진의 증언으로는 경교장 생활은 전혀 풍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우진은 정기적으로 얼마씩 수입이 들어오는 형편이 아니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돈과 관련된 일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에 자연 김구를 모시는 이들의 생활도 여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1946년에 상공회의소 부회장 강익하가 300만 원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그 돈을 받지 않고, 이승만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이승만에게는 이미 500만 원을 보냈고, 상공회의소 공의(公議)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김구는 이승만에게 전달하라고 했다.[322][374][375]

한미호텔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형편이 어려워 점심을 굶는 일이 많게 되자, 주위에서 김구에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승만에게 돈을 부탁해 보라고 했다고 한다. 김구가 마지못해 돈을 부탁하러 돈암장을 찾았는데, 이 박사가 난색을 표해서 그냥 돌아왔다는 의견도 있다. 조완구 선생과 엄항섭이 다시 김구에게 어려운 형편을 말하자 김구는 이 박사를 다시 찾아가 30만원을 얻어 한미호텔에 있던 요인들의 경비로 사용했다. 선우진에 의하면 김구를 수행하여 돈암장을 방문했는데, 이승만은 “남들은 모두 내게 돈을 주는데, 백범은 내게서 돈을 가져가는구먼”하며 입을 실룩거렸다고 하며, 김구는 아무 표정 없이 돈암장을 나섰다고 한다.[322][374]

한편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상해 시절에 대한 증언으로 안공근과 감정이 있었던 백찬기는 “김구파의 간부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나와 같이 병으로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는 의료원으로 가라고 여비 정도만 주어 쫓아버리는 식”이라며 비판하였다.[374][376]

백범일지 윤문편집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의 교열과 윤문은 이광수가 하였다. 《백범일지》 판본은 크게 4가지다. 김구가 1929년과 1942년에 탈고한 친필본과 그것을 옮겨적은 필사본 2종, 1947년에 공식적으로 출간된 국사원본까지다.[377] 여기서 말하는 이광수의 윤문은 해방 이후 나온 1947년 책을 말한다. 《백범일지》는 명문장가인 이광수의 윤문이라는 꽃단장을 통해 재탄생했다. ‘국사원본 백범일지’는 처음부터 유려한 문장, 쉽고 간결한 문체로 출발했다. ‘친필본 백범일지’와는 차이가 너무 많은 작품이다.[378] 1994년 백범의 아들 김신이 친필 원본을 공개함으로써 이광수의 윤문과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45년 11월 김구가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출간할 때 이광수가 윤문을 자청했다 한다.[379] 백범일지의 윤문을 허락한 사람이 백범 자신인지, 아니면 백범 비서 등 주변 사람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380] 문제는 춘원이 윤문 과정에서 친필본에 없는 문장을 임의로 첨삭해 원전의 텍스트적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380] 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이광수가 《백범일지》 편찬에 참여한 것을 김구가 알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따르면 “(친일파 이광수가) 속죄하는 심정으로 맡겠다고 하니 시켜보라고 주위에서 백범께 말했다. 김구는 그의 행실(일제 후반에 변절한 것) 때문에 망설였다”[379] 고 한다. 그러나 곧 이광수에게 《백범일지》 윤문을 맡긴다.

둘째 아들 김신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건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는 의문입니다.”(김신 씨의 대담, <신동아>, 1986년 8월, 347쪽.[379])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저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