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한국의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대한제국승려, 교사,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정치인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남북통일 활동가이다. 항일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김구
金九
Kim Gu in 1949.jpg
대한민국 임시정부제9·10대 국무령
임기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8월
부통령 이인성
전임: 홍진(제8대)
후임: 이동녕(제11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제18·19·20대 주석
임기 1940년 3월 13일 ~ 1947년 3월 3일
국가 부주석 김규식
전임: 이동녕(제17대)
후임: 이승만(제21대)

신상정보
국적 조선 조선 (1876년 - 1897년)
대한제국 대한제국 (1897년 - 1910년)
일제 강점기 일제강점기 조선 (1910년 -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년 - 1948년)
대한민국 대한민국 (1948년 - 1949년)
출생일 1876년 8월 29일(1876-08-29)
출생지 조선 조선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
(現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대한민국 기준))
(現 태탄군 지촌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준))
사망일 1949년 6월 26일(1949-06-26) (72세)
사망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본관 안동
정당 한국독립당 (1930년, 상하이)
한국국민당 (1935년, 항저우)
통합 한국독립당 (1940년, 충칭)
배우자 최준례
종교 감리회
군사 경력
서훈 건국훈장1대한민국장.png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독립운동가 김구의 필체

황해도 해주에서 김방경의 25대손으로 태어났다.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하다가 부친 3년상을 탈상한 뒤엔 기독교에 입문하였다.[1][2]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을 역임했고, 안악양산학교, 재령보강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안악양산학교 재직 중 안악사건에 연루, 조선총독부에 연행되어 5년간 수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 정부(9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개편)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내무부위원, 내무부 경무국장 등을 지냈다. 임정 내 좌우이념 갈등이 극심했을 때 임정고수파(현상유지파)의 입장에 있었다. 1924년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다. 이후 임정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노동국 총판, 국무령, 내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등을 거쳤다. 1931년 만주 사변 직후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이후 임정은 일본 제국의 표적이 되어 1940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외무부장, 재무부장 등을 지냈다. 1938년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1940년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였고, 1940년 10월 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정 주석을 역임하였다.[3][4][5][6][7]

광복 후에는 이승만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임정 법통 운동을 추진하였다.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9년 5월 19일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재합작이 태동하였으나,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총격에 서거하였다.

본관은 구 안동(安東), 자(字)는 연하(蓮下),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8] 초명은 창암(昌巖)이고,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즉 9인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임정 이동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고, 부친상 탈상 후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사후에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리고 백범 선생님 이라고 불렸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 (1876 ~ 1949)편집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基洞)[9][10][11][12] 에서 (구)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郭樂園, 당시 17세) 부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7대 독자로 알려져 왔으나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4형제였고 할아버지 김만묵, 증조부 김영원에게도 각각 형제가 있었다.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충렬공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었다.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의 옥 당시 그의 11대조로 사과(司果)를 지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개성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해주로 피신해 왔다. 해주군 서쪽 80리에 있는 백운방 텃골, 팔봉산(八峰山) 양가봉(楊哥峰) 아래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구의 선조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신분을 숨기고 상민으로 행세하여 연명해왔다. 생계를 위해 군역전(軍役田)을 짓게 되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이때부터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한다.

이렇게 되자 텃골 근방의 양반이던 덕수 이씨와 진주 강씨 일족에게 대대로 천대를 받게 되었다. 김구의 회고에 의하면 '우리 집안의 처녀가 강씨, 이씨 문중으로 출가하는 것은 영광이지만 두 문중의 처녀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13]'라 하였다. 그러나 김구의 7대조 할아버지인 김언함(金彦喊)의 부인이 진주강씨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상민이었던 가계는 김구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 소년기의 창수로 하여금 과거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광복 이후의 김구의 가계를 소개한 것은 경순왕의 후손임을 강조했는데, 1947년도왜실기》의 한국어 번역판의 서문을 쓴 이승만은 그가 명문의 후손 임을 강조했고, 안재홍(安在鴻)도 김구가 암살된 직후인 1949년 8월에 쓴 백범김구선생약사(白凡金九先生略史)의 서두에서 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니 그 선조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후예라고 기술하였다.

김만묵(金萬默)의 둘째 아들로 24세의 미혼이었던 아버지 김순영은 그의 누이동생의 시누이(매제의 자매)가 되는 장연군 목감방(牧甘坊) 문산촌(文山村) 출신 현풍곽씨의 딸을 삼각혼이라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한다. 태어날 무렵 난산이었던 탓에 일가의 권유로 그가 태어나던날 밤 그의 아버지는 지붕위로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흉내낸 끝에 순산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가 태어나던 날은 그의 조모가 사망한 날이었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아버지 김순영은 학식은 없었으나 이씨, 강씨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혔기에 해주감영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다. 그를 두려워한 양반들은 그를 존위로 천거했다가 도존위로 승진시켰으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잘하고 양반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다. 하위 감투를 썼음에도 양반들에게 굴하지 않자 양반들은 아버지 김순영에게 공금흠포죄(公金欠逋罪)를 씌워 바로 해고해 버렸다.

유년기 (1880 ~ 1888)편집

유년기에 그는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4세 때 백부 김백영(金伯永)의 상을 당하였고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 때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의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14][15]

문중에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 중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이 친척 대부가 서울에 다녀오던 길에 자녀 결혼식에 쓸 갓을 샀다가 양반에게 빼앗기고 강제로 찢김을 당했다. 이 일로 몹시 충격을 받은 소년 창암은 과거 시험에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부터 한글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16]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이러한 학문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었다.[17]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하였다.[18] 한 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18]

청소년기 (1888 ~ 1892)편집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 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그는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14] 이때 목동 노릇도 했지만 그는 학업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이름있는 스승을 모실 수 없어, 큰어머니 정씨의 친정 6촌인 정문재의 서당에 부탁하여 무료로 통학하면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1892년 정문재의 권고로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김구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며 자신의 이름 대신 아버지 김순영의 이름으로 응시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하여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 시험 중 양반이나 부자들이 돈을 주고 대신 다른 사람을 들여보내 대신 과거를 보게 하거나 매관매직 하는 등의 시험부정을 보고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서당 공부를 그만두었다.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마의상서로 관상 공부를 하였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과 동네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을 하였다.[19]

청년기편집

동학농민운동 참가 (1893~1895)편집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신도(信徒)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14] 입교한 지 1년도 안돼 연비(신도)를 수백 명을 포덕하였으므로 이름이 알려져, 접주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상비방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894년초 김구가 거느리던 연비의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감에 따라 그는 18세의 나이로 수백 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3년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연비의 명부를 보고하라는 연락이 왔기 때문에 황해도에서 황해도 동학을 대표하여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접주 대표를 선발할 때 황해도 대표자로 선발되었다.

1894년 가을 최시형을 찾아가는 황해도 동학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충북 보은에 찾아가서 최시형을 만나고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귀향길에 한성에서 동학농민군 거병소식을 접하였고,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해주 팔봉에서 거병하여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17] 그의 부하는 700여 명이었으나 일본 제국의 군부대가 쏘는 소리에 놀라서 모두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고 한다.[18]

이후 김창수의 부대는 조직 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이동엽 일파의 기습공격으로 김창수의 포수 부대는 패하고, 고열과 함께 홍역을 앓던 그는 몽금포로 피신하여 몽금포에서 하은당 스님의 치료를 받으며 3개월간 잠적해 있었다.[14] 한편 김창수의 부대를 접수하려고 이동엽은 그의 최측근 영장 이종선(李鍾善)을 잡아 처형하였다. 아끼는 부하를 잃은 뒤 그는 이종선을 묻어주고 안태훈(安泰勳)을 찾아가게 되었다.

동학군 장수로 있을 때 안태훈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895년(19세), 동학농민운동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세워 경성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의 원조와 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1894년 12월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 명을 크게 이긴 적이 있을 정도로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지역 유력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한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품을 사랑하여, 동학이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불가침협정과 공동원조계획을 세웠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자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된 것이다.[20]

산채 은신과 고능선의 가르침 (1895~1896)편집

 
스승 후조 고능선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안태훈은 그를 배려하여 1895년 2월 그의 부모까지 모셔다가 산채에 함께 살게 했으며, 무례하게 대하는 측근들을 혼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안태훈의 장남 안중근을 처음 만났으나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태훈의 사랑에 들다 성리학자이자 화서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 후조 고능선을 만나 감화받았는데, 그로부터 학문, 성리학대의명분과 의리, 위정척사적 가르침을 받고 춘추대의와 의리에 눈뜨게 되었다. 고능선은 청년 김창수에게 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해있음을 말해주었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고능선화서학파이항로의 문인인 유중교의 제자이자 의병장 유인석의 동문이었으며 노론 계열이었다. 고능선은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 하며 청나라로 갈 것을 권하였다.

20세에 청나라행을 결심, 청나라로 가기 전 안태훈의 사랑채에서 참빗장수를 만났다. 연령은 김구보다 8~9세 위로 전라북도 남원 출신 김형진(金亨鎭)으로 그를 만나 백두산까지 기행하였다. 청년 김창수는 김형진을 길동무로 삼아 청나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고, 백두산을 관람하고 만주를 돌아서 북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만주 의병부대 활동 실패와 귀국편집

신천을 떠나 평양 을밀대와 모란봉에서 휴식하다가 강동 양덕 맹산을 거쳐 함경도로 넘어서 고원, 정평, 함흥에 도착했다. 함흥에 도착해서 함경도의 교육제도가 황해도평안도보다 발전된 것에 탄복하였다. 단천, 혜산진을 지나 백두산 참배는 위험하다 하여 중단하고 만주 통화(通化)로 갔다. 김이언을 만나기 전 청나라 장교를 만났는데, 중국어를 모르던 그는 종이한자로 써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청일전쟁 당시 평양에서 전사한 청나라 장수 서옥생(徐玉生)의 아들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실패하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계속 불구대천의 원수임을 알리자 청나라 장수는 자신은 금주(錦州) 출신으로 집안에 5백명의 가병이 있으며, 청나라로 동행할 것을 권하였으나, 김이언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 정중히 사양하였다.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김이언의 부대가 강계성을 습격할 때는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성에 들어가 화약을 사 오는 일을 하였다. 화약을 사오던 길에 압록강에 얼음에 빠져 동사할 위기에 처했으나 동민들의 구조로 살아났다. 강계성 습격 시는 11월 압록강이 완전히 얼어붙을 때로 정하고 공략하기로 결정, 그와 함께 청나라군의 원조를 받아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몸을 숨겼다. 강계성 아래에 몸을 숨겼다가 신천군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귀향하였는데 스승 고능선의 장남 고원명 내외가 병으로 요절하였으므로, 고능선은 김창수를 손녀사위로 삼아 의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22일 안태훈은 해주군의 집사로 추정되는 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검들이 산포를 모아 청계동을 습격하려던 김창수(김구)를 추적했으나 김창수는 도망하고 말았으니, 자신도 김창수의 발자취를 사방으로 추적하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오영섭은 안태훈 자신이 청계동에서 김구를 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어나자 신천군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보신적 조치로 보았다.[21]

치하포 사건과 투옥생활편집

치하포 사건 (1896)편집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 금주(서옥생의 집)로 향하던 중 평안북도 안주에서 단발 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1896년 2월 하순(3월 8일) 용강군에서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 많은 빙산(큰 얼음덩어리)을 만나 갇혀 죽을 고비에서 여러 선객과 뱃사공을 독려하여 빙산을 헤쳐나감으로써 치하포 인근 5리 밖의 강 어귀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이후 치하포의 한 여관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여관방에 있는 여러사람들 중에 단발에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은 정씨로 장연에 살고 있으며 진남포로 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장연말이 아니고 경성(서울)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흰 두루마기 밑으로 칼집이 보였다. 또한 치하포는 진남포 맞은편 기슭이므로 매일매일 평범한 일본상인(商倭)이나 일본기술자(工倭) 등 여러명의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본래 행색대로 통행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이거나 그의 일당으로 도피중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어떻든(미우라나 그 일당이 아니더라도) 칼을 소지하고 밀행하는 일본인이라면 우리 국가와 민족에게 독버섯(毒菌)같은존재임이 명백(明白)하다고 확신하였고, '저 놈 한 명을 죽여서라도 국가에 대한 치욕을 씻으리라' 다짐하였다.

1896년 3월 9일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는 것을 지켜보던 그를 기습적으로 발로 차 넘어뜨렸고, 이에 칼을 뽑아 달려드는 것을 재차 발로 차  넘어뜨린 후 칼을 빼앗아 그 칼로 살해했다. 김구는《백범일지》에 살해한 일본인의 소지품을 통하여 일본인의 이름이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이고, 신분은 일본 육군중위임을 확인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22]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23]

쓰치다 조스케의 소지품에 있던 엽전 8백여량은 선주에게 선가로 일부 떼어주고 나머지는 여관주인이자 동장(洞長)인 이화보(李化甫)에게 가난한 집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였다. 또 이화보에게 필구를 가져오게하여 "국모보수의 목적으로 왜인을 타살하였노라" 라는 살해이유(동기)와 "해주 백운방기동 김창수" 라는 신분을 밝힌 포고문을 써서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연락을 기다렸다.[22]

1896년 6월 말 해주부에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인천에 있는 인천감리서로 이감되었다.[24]

사형 모면, 옥중 계몽운동, 탈옥 (1896~1898)편집

인천 감리서(인천옥)로 이감된 후, 인천항경무서 경무관 김윤정(김순근)이 주재하는 신문이 있었다.  이때 치하포에서 일본인 살해사실을 묻는 질문에 대하여 김구는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왜구 1명을 타살한 사실이 있다고 답하였다. 이 신문에 참석한 일본경찰을 향하여는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이 몸으로 너희를 다 죽여서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호령하였다.  추가신문을 위하여 착석한 인천감리 이재정에게  군부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몽백(상복)을 입지 않는 것인데, 국모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도 몽백을 입는 것의 염치없음을 질타하였다. 이에 이재정 등 관리들은 부끄러워하면서 김구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수사단계: 1896.8.31, 초초)

경무청(경무서)에 열린 제2회 신문일의  신문(김순근 주재)에 대하여는  "나는 전에 다 말하였으니 다시 할 말이 없다."고 말을 끝냈다(수사단계: 1896.9.5, 재초)

제3회 신문은 감리서에서 감리사 이재정주재하에 열렸다. 감리가 매우 친절히 질문을 하였고, 마지막에 신문서 꾸민 것을 열람하고 수정할 것은 수정한 후에 백자에 서명하였다(재판단계: 1896.9.10, 삼초).

수일 후 일본영사관 측에서 김구의 사진을 촬영하기 위하여 김구에게 수갑을 채우거나 포박을 하여 죄인된 모습을 요구할 때, 김구는 일반 관중들에게 " 이제 왜놈이 국모를 살해하였으니 전국민의 대치욕일 뿐만 아니라 왜놈 독해는 궐내에만 그치지 않고 당신들의 아들과 딸이 필경은 왜놈의 손에 다 죽을 터이니, 나를 본받아서 왜놈을 보는 대로, 만나는 대로 다 죽입시다!" 라고 고성을 질렀다.

1896년 9월 10일 일본영사관 경부신곡청(警部神谷淸) 참석하에 '회동심리'가 열렸고, '삼초(조서)'가 작성되었다. '삼초'에서 김구는 "신위국민함원어 국모지수유차거야(身爲國民含寃扵 國母之讐有此擧也)"라고 진술하여 살해동기가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재판이 끝나고, 1896년 9월 12일 일본영사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는 ‘대명률(大明律)의 인명모살인죄(人命謀殺人罪)’로 김구를 참형(斬刑)으로 처단할 것을 주장하는 의견서를 인천항재판소판사 이재정에게 제출하였고, 다음날인 1896년 9월 13일 인천항재판소 판사이재정은 당시의 형사법인 '형률명례'의 절차(사형선고를 한 후 법부를 거쳐 임금에게 사형집행을 주청하는 절차)에 따라 법부에 '조율재처(조율처판)'를 건의하였다. 1896년 10월 2일 인천일본영사관의 압력을 받고 있던 이재정은 김구에 대한 조속한 처리를 법부에 전보로 재차 건의하였고, 법부에서는 임금에게 마땅히 상주하여 칙명을 받아야 할 사안이라는 답전을 인천감리에게 보냈다.[24] 이에 따라 1896년 10월 22일 법부는 김구를 포함한 11명에 대한 교형(絞刑)을 고종에게 건의(상주안건)하였으나 고종의 재가(사형집행명령)는 이뤄지지 않았고, 1896년 12월 31일 '상주안건'을 거쳐, 김구가 제외된 1897년 1월 22일 최종 '상주안건'이 재가되어 김구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로서의 신분을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사형집행을 면할 수 있었다.[24]

이러한 사법적 절차에 따라 사형을 면하게 되는 과정과 내막을 속속들이 알 수 없었던 김구는 자신이 체험했던 사실들을 바탕으로 사형을 면하게 되는 과정을 《백범일지》에 기록해 놓았다. " 옥중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고종이 이재정감리에게 사형을 정지하라는 칙명을 친히 내렸다. 그때 관청수속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생각으로는 이재정이 그 공문을 받고 상부, 즉 법부에 전화로 교섭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후에 대청에서 나오는 소식을 들으면, 사형은 형식으로라도 임금의 '재가'를 받아 집행하는 법인데, 법부대신이 사형수 한 사람 한 사람의 '공건'을 갖고 조회에 들어가서 친감을 거친다고 한다. 이때 승지가 '공건'에서 살해동기가 '국모보수'라고 적힌 것을 보고 고종에게 보고했고, 고종은 '재가'가 끝난 '안건'을 어전회의를 여는 등 심의한 후, 일단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하여 전화로 친칙하였다 한다. 사람들은 만약 전화개통이 사흘만 지체됐어도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라고 했다."라고 썼다.

김구는 수감 중에도 그의 아버지가 구입한《대학》, 김구의 인물 됨됨이를 눈여겨 본 간수가 넣어 준《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등을 읽고 '오랑캐'라고 생각하던 서양인들이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훌륭한 법규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등 신학문과 개화사상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또한 대부분 문맹인 감옥안의 재소자들을 위하여 글을 가르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에 대하여 1898년 2월 15일자  독립신문(외방통신)은 '김창수(김구)가 감옥 속에서 주야로 학문를 독실히 하는 한편, 다른 죄수들을 권면하여 공부를 시킴에 따라 인천옥은 감옥이 아니라 인천감리서 학교라고들 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또 재소자들은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한 간수들을 위하여 대서를 해주었고, 동료 재소자들로부터는 시조와 타령 등의 노래를 배웠다.

1897년 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은 동료 상인, 객주들과 함께 김구의 석방(방면)을 위하여 관청을 상대로 온갖 시도를다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25] 후에 김구는 김주경의 동생 김진경을 찾아 그의 형 김주경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1898년 3월 19일 김구는 동료 죄수들과 탈옥을 감행하여 성공하였고, 그의 아버지가 대신해서 수감되었다가 1년 후인 1899년 3월 석방되었다.[24]

승려생활 (1898~1899)편집

1898년 3월 탈옥 후 풀밭과 걸식, 민가에 숨어 생활하다가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가을께에 출가자인 공주 출신 이서방 이라는 남자를 따라 공주 마곡사에 도착했다. 먼저 삭발한 공주의 이서방이 찾아와 마곡사에 식객으로 유숙하던 그를 찾아와 "하은당은 이 절 안에 갑부인 보경(寶境)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후하기에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이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하은당을 은사로 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출가 초기부터 불경을 외우는 일과 법당의 허드렛일 도중 실수로 스승인 하은당과 다른 선임 승려들에게 질타를 당하였다. 다른 승려들은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다 고령이라 이 분들이 작고하면 마곡사 법당의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인의 확고한 결심에 의한 출가도 아니며 승려의 길에 뜻이 없었던 백범은 산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승려들과의 마찰 등으로 후회하던 중 이듬해인 1899년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주지인 하은당은 뜻이 그러하다면 보내주겠다 하고 여비로 쓸 곡식을 주어 보내주었다. 이후 이곳저곳 방랑하며 동료 승려를 따라 평양부에 도착, 1899년 4월 동료 승려를 비밀리에 고향에 보냈다가 그를 따라온 부모와 상봉하였다. 식솔들을 이끌고 방랑중 5월 평양 영천암에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다.[25] 그가 환속하자 실망한 동료 승려는 그를 떠났고, 1899년 가을 황해도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아버지 김준영은 성실하게 농업에 종사하면 혼처를 마련해주겠노라며 농사일을 권유하였다.[25] 그러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고 얼마뒤 본향을 떠난다.

계몽운동 및 교육활동 (1900~1910)편집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1년 뇌졸증으로 반신불수가되 투병중이던 아버지 김순영이 사망하였다.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 대부인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예수교에 입교시켜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왔다. 2월에는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교회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25] 1903년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백남훈(白南薰)에게 학교를 인계하고, 김구는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26] 1903년 여름에는 농상공부 종상위원(種桑委員)에 임명되었다. 이는 공립학교 교원직과 함께 그가 대한제국에서 맡은 유일한 관직이었다.

1904년 12월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16] 장련 읍내로 이사한 김구 일가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을사조약 반대에 대한 가두연설을 했다.[26] 그러나 정부의 강제진압으로 저지당하였고,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26]

1905년 11월부터 1907년 2월까지 《대한매일신보》 황해도 장연지사장직을 맡았다.[27]

1906년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 종산리의 서명의숙(西明義塾)에서 교원(敎員)이 되었다.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자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황해도지부 총감(摠監)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학무총감에 선임되었다.[28]

1909년 황해도안악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재령 보강학교(保強學交) 학교장에 초빙되어 학교장직을 겸임하였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 의거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29]

안악사건, 수감생활, 망명준비 (1910~1919)편집

1910년 경성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 때, 그는 신민회 황해도지부의 대표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였다.

망명 중이던 안명근은 한국에 입국하여 배경진·박만준(朴萬俊)·한순직(韓淳稷)과 함께 각 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시키려는 계획 하에 황해도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비밀리에 모으던 중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게 발각, 1910년 12월 27일 평양에서 재령헌병대원에 체포되어 관계자 전원이 구속되었다.[30] 이를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이라 한다. 일제는 안명근사건과 엮어서 황해도 일대의 김홍량(金鴻亮), 김구, 崔明植, 李承吉, 都寅權, 金庸濟 등 안악양산학교(安岳楊山學校) 관련자와 면학회 및 부호, 지식인층 160여명을 체포하였다.[31][32] 그래서 안명근사건을 '안악사건(安岳事件)'이라고도 한다.

1911년 8월 30일 김구는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강도 및 강도미수죄'를 적용받아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았다.[33]

191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의 형을 받은 김좌진과 조우하였다.

1912년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34]

1914년 7월 감형되어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으며, 죄수번호는 55호였다.[35][29]

1915년 8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특별 가출옥되었다.[36]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병으로 죽었는데, 출옥후 어머니 곽씨로부터 소식을 접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1916년 문화 궁궁농장 간검(看檢)에 취임했고, 셋째딸 은경(恩慶)이 태어났다.[25]

1917년 2월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37]

독립운동 및 임시정부 활동기편집

경무국장 시절 (1919~1921)편집

 
경무국장 시절 카이저 콧수염으로 단장한 김구 (1920년)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참여하였다.[38] 1919년 3·1 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34]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 1919년 4월 22일 임시 의정원 내무부위원에 임명되었다.[4]

1919년 8월 12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부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1919년 9월에는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자신의 소원을 말하며 문지기가 되기를 청하자 안창호는 그에게 경무국장(警務局長)을 천거하였다. 자신의 학식이 낮음을 이유로 경무국장직에 대한 사의를 표하였으나 안창호는 거절하면 젊은 사람들 아래에서 일하기 싫다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하여 그는 안창호의 임명을 받아들였다. 1919년 9월 11일 상하이를 거점으로 한성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등 각지의 임시 정부들을 통합하여 통일 임시 정부(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구성되자 김구는 내무부 경무국장에 취임하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였고, 일제의 밀정 검거 활동을 하였다. 경호부장으로 여순근을 임명하고 한인 청년들을 고용하여 경찰, 정보감찰 업무, 밀정색출 업무를 분담시켰으며 동시에 재판소가 없는 임시정부에서 재판장으로서 재판을 행사하였다.

 
부인 최준례(오른쪽)와 장남 김인(가운데)

1920년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로부터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김구는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39][40] 일본 영사관 경찰은 임정 요인 체포를 위해 경무국장인 그를 사살하려 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스파이 선우갑·강린우(康麟佑)가 왔으나 자발적으로 그에게 이실직고하자 추방하였다. 일본 영사관의 첩자로 독립운동가를 따라 상하이에 나타났던 17세 소년 김도순을 총살하였고, 이후 일본 영사관과 조선총독부의 납치, 암살기도에 시달렸다. 황학선(黃鶴善)은 병원을 차리고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은 뒤 한번에 독립운동가들을 잡아서 약물로 독살하려 했다. 김구는 황학선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1920년 8월 아내 최준례가 아들 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왔다.[25]

 
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맨 아랫줄 왼쪽에서 세번째 앉은 이가 김구(밝은색 양복)

1920년 12월경, 이승만이 임정 인사들의 임시 대통령 현지 부임 요청에 따라 하와이에서 상하이로 밀입국하였다. 김구는 임정에서 이승만과 첫 대면을 하였다. 김구는 대통령 이승만이 참석한 행사의 경호를 담당했다.[41] 《이승만과 김구》를 쓴 손세일은 "이승만은 경무국장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김구에 대해 신뢰감을 느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독립운동 기간 내내 지속됐다"고 했다.

1921년 5월 경무국장직에서 물러났고, 후임은 김용원이 임명되었다.

제2차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김립 피살 사건) (1922)편집

1922년 2월 8일 김구는 임시 의정원 청원징계과 위원에 선출되었다.[4]

1922년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해 상하이로 건너왔다.

1920년 9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은 임정의 군자금 지원을 목적으로 이동휘 계열의 한형권에게 40만 루블을 지원하였다. 1920년 11월 20일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한형권김립에게 40만 루블을 전달했고, 김립은 이 자금을 임정에 보내지 않았다.[42][43] 이 돈 중 일부는 김원봉에 의하여 독립 운동 자금으로 사용되었을 뿐 운반 책임자인 한형권김립에 의하여 불투명하게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동휘는 임정에서 심한 문책을 받았다. 이동휘는 쇄신안으로서 임정을 시베리아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1921년 1월 24일 다음과 같은 선포문을 발표하면서 국무총리직에서 사퇴하였다. "自己의 쇄신의안(刷新議案)을 정무회의에 제출하였던 바 일언의 심의도 없이 유멸(揉滅)하였다. 고로 自己 실력으로는 이 난관을 타개하기 어렵다."[44] 1921년 9월 23일 베를린에서 코민테른한형권에게 '임정의 내부분열 타개'를 조건으로 다시 20만 루블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한형권은 20만 루블을 상하이로 가지고 왔지만 임정에 거의 내지 않고 이동휘 계열끼리만 비밀리에 사용했다.[43][45][46] 이에 김구는 김립을 임정 공금 횡령범으로 단정하여 오면직(吳冕稙), 노종균(盧種均)을 파견해 1922년 2월 6일 김립을 사살하였다.[47][48] 이것이 공산진영(고려공산당 상하이파)과 민족진영 간에 발생된 제2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다.

1922년 7월 신익희, 안창호, 이시영, 여운형, 조소앙, 이유필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1922년 9월 21일 차남 김신이 출생하였다.

1922년 10월 여운형·조동호·이유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25]

내무총장 및 노동국 총판 시절 (1923~1924)편집

 
임정 요인들(뒷쪽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이석, 김구, 조성환, 송병조, (앞줄)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1923년 4월 9일 내무총장에 선출되었다. 이 당시 임정은 개조론과 창조론이 계속 대립하는 가운데 그는 임정고수파(현상유지파)의 입장에 섰다. 그러나 임정의 해체와 개조를 놓고 국민대표회의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1923년 6월 6일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선포하여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다. "이른바 국민대표회의 6월 2일 연호 및 국호를 달리 정한 것은 국민에 대한 모반이기에 한두 차례 만나 타일러 귀순을 간곡히 권유했는데도 도무지 고집만 부려 방자하게 헌법을 제정한 것은 조국의 존엄한 권위를 침범했음이니라. 본 내무총장은 2천만 민족이 공동으로 위탁한 치안의 책임과 4천년 遺業의 神器를 保衛해야 하는 직권에 의거 소수인이 집회한 6월 2일 이래 모든 不軌행사의 繳銷를 명하고 국민대표회의 자체의 즉각적인 해산을 명한다."[49] 또한 임정을 거부하는 세력에 대한 상하이 추방령을 선언하였다. 국민대표대회 소집의 주요 인물이기도 한 박은식을 규탄, 성토하였고 그의 아들 박시창이 찾아와 항의하자 구타하기도 했다.

1923년 무렵 국내외 임정 연락망인 연통제가 완전히 와해되면서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김구는 독립운동의 자금 중 상당부분을 미국의 이승만, 안창호 등과 미국 교민들의 성금에 의존하였다. 1923년 이후 구미위원부 소속 허정 등은 구미위원부 통보를 통해 임정으로의 송금을 촉구했고 재미 동포들은 각자의 여유에 따라서 10달러, 또는 20달러 등을 구미위원부로 보내주어 얼마 되지 않아 몇천 달러의 기금이 모였다.[50] 허정은 이 돈을 즉시 당시의 임정 재정부장 이시영에게 보냈다. 허정은 그때는 미국에서 상하이로 쉽게 송금했다고 한다.[50] 이 돈을 받자 김구와 이시영은 곧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허정에게 보냈고, 김구는 자신이 독특한 붓글씨로 쓴 친필 자서전 백범일지(친필)를 허정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50] 미주 동포들이 후원금과 성금을 보내면 그는 친필로 쓴 붓글씨와 백범일지의 사본을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1923년 12월 상해대한교민단 산하의 치안조직인 의경대(義警隊)가 설치되었을 때, 김구는 상해 한인의경대 고문에 추대되었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하이 홍구 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사망하여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숭산로 공동묘지에 장사하였다.[51] 최준례상하이 홍구 폐병원에서 사망했으나, 수배중이라 아내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최준례는 뒤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 숭산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임정에서는 다른 요인의 부인들과는 다르게 불평불만이나 파란 없이 남편 김구를 내조한 최준례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최준례의 비석은 한글학자김두봉이 직접 지어 주었다.

내무총장 재임 도중 1924년 4월 9일부터 4월 23일까지 국무총리 대리를 잠시 겸임하였다. 6월 2일부터 12월 17일까지는 노동국 총판을 겸임하였다.[5][52]

1925년 3월 23일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탄핵된 후, 박은식, 이상룡 등 잇단 사퇴와 사망 등으로 임정은 내각 구성에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

1925년 8월 29일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잡혀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어머니의 환갑 잔치를 못한 것을 죄스러워하던 김구는 이후 자신의 생일잔치는 하지 않았다 한다. 11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임시정부의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아들의 활동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차남 김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53]

친일파 척결 및 일본영사관 폭파 미수 (1924)편집

1924년에는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 오동진 선생에게 만철연선(萬鐵沿線)의 친일파를 토벌 하라는 특명을 내려,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으로 3인조 암살특공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친일파인 보민회괴수(保民會魁首) 최정규(또는 최창규 崔晶奎)의 가족을 백주대낮에 토벌했다. 이 사건은 1924년 7월 26일자 독립신문에 크게 게재되었으며, 이후 이들은 여순조선인회(旅順朝鮮人會)서기인 악질 친일파 정갑주, 이등박문수양녀이자 매국녀인 배정자, 일진회 회장 이용구 등을 암살 하라는 지령으로 암살을 시도하였다.

1924년 7월에는 일본 주요관계자 및 요인제거를 목적으로 박희광 등이 봉천성 일본영사관 폭파를 시도했으나, 불발로 실패했다.[54] 이들은 같은날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당시 일본군 장성이 드나들던 고급요정인 금정관에 침입하여, 거액 군자금을 탈취,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본경찰과 총격전 끝에,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박희광, 김병현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김구는 이외에도 친일파 척결작업과 부족한 자금조달을 위한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활동을 배후에서 비밀리에 지휘 또는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국무령 시절 (1926)편집

1926년 5월 임시 의정원에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55]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지 13일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1926년 9월임시 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김존위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34] 임시정부도 정부인데 한미한 가계에서 태어난 자신이 수반이 되는 것은 정부의 위신을 격하시킬수 있을 것, 이상룡, 안창호, 홍면희은 실력을 갖추었으나 독립운동가들이 입각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렇다할 배경이 없는 자신이 수상이 되면 다른 실력과 배경을 갖춘 독립운동가들이 더욱 호응하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이동녕과 임정 요인들의 거듭된 요구로 1926년 12월 10일 김구는 국무령직을 수락하였다.[5]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곤란한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라고 하면서, 국무령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 어렵다고 판단, 개헌을 추진하였다. 김갑, 이규홍(李圭洪) 등을 중심으로 약헌기초위원회(約憲起草委員會)를 구성하였고, 이를 통해 개헌안이 마련되었다. 이로써 3차 개헌안이 마련되었고,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약헌(大韓民國臨時約憲)이라고 하였다. 이는 1927년 2월 15일 임시 의정원을 통과하였고, 1927년 4월 11일 공포되었다. 이로써 임정의 국무령제가 폐지되고 국무위원제로 개편됐다.[56]

내무부장, 재무 겸 군무부장 시절 (1927~1932)편집

1927년 8월 19일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면서 김구는 임정내무부장에 선출되었다.[57][5] 이어 각 정당사회단체를 통합하는 움직임에 참여하여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다.[58] 1927년 9월에는 장남 김인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25]

 
1930년대 초의 김구
 
1928년 11월 20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서신. 추운 겨울에 털옷 조차 입지 못하는 임정의 어려운 자금 사정을 호소하였다.

임시정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침투를 피해 프랑스 조계(프랑스 대사관 관할구역)와 영국 조계, 중국 국민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건물에 월세를 주고 입주했다. 그러나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 건물주, 토지주로부터 고발당하였고, 청사의 각부 직원과 잡일을 하는 급사, 경무국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였다. 일부 급사들은 임정을 떠나거나 임정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일부는 생계를 위해 다른 곳에 취직했다. 김구는 임정 운영 자금의 대부분을 재중국 한국인 교민단체와 교포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모금, 중국인 기업체에 근무하는 한인, 중국의 군인·공무원으로 취직한 한인, 시장 상인, 아편장사 등이 내는 돈에 의존했으며, 일부는 3인조 암살단등 비밀조직을 움직여 일본군의 군자금 탈취하여 조달하기도 하였다.[59] 자금을 걷을 인력이 부족해 김구 자신과 임정 직원들이 직접 성금과 자금을 걷으러 다녔다. 이재에 밝지 못했고 장사수완이 부족했던 김구는 사업이나 장사에 종사할 수도 없었다.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이후, 한인 교포들은 그를 '두상(頭相)', '수상(首相)'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망명정부의 수반이라는 위치 역시 그를 장사나 공업, 상업에 종사할 수 없었던 원인이 되었다. 변변하지 못한 임정 청사의 월세도 대지 못해 김구는 늘 쩔쩔맸다. 정화암의 증언에 의하면 그런 와중에도 임정을 떠나지 않고 임정의 충복인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다 한다. '그때 임정에는 삥천이라는 중국인 하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렇게 충성스러운 하인이 없었다.[60]'는 것이다. 이런 충복에게 몇 푼 안되는 월급을 몇년 동안 주지 못하였다. 삥천의 부인이 해산할 때 돈이 없어 밀린 월급의 일부만이라도 달라는 호소조차 들어주지 못할 정도였다.[60]

1928년 10월 16일 박용만텐진에서 의열단 단원 박인식, 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내의 언론과 방송 담화를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의열단의 경쟁세력인 임시정부의 김구가 나서서 이승만에게 박용만은 총독부에 매수된 밀정이라는 답신을 보냈으나 이승만은 그럴리 없다면서 비난 철회를 거부하였다.[61]

1929년 5월 《백범일지》 상권을 탈고하였다.

1929년 8월 29일 김구상해대한교민단 단장이 되었다. 이로써 쇠퇴하던 상해대한교민단 세력이 일시적으로 개선되었다. 이후 김구이봉창 의거 등을 위해 1932년 1월 11일 상해대한교민단을 독립운동기관으로서 개편하였다. 개편 후 교민단장은 이유필이 맡고 김구는 의경대장을 맡았다. 김구가 교민단을 자치단체가 아닌 독립운동기관으로 활용하자 비난하는 일반교민들도 있었다고 한다.[62][63]

'전민족유일당 운동'이 실패하자 공산진영을 필두로 한 좌익진영은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일방적으로 해체하고 1929년 10월 26일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留滬韓國獨立運動者同盟)을 조직하고 기관지 《앞으로》를 발행하는 등 철저히 독자적인 행보를 하였다. 이에 1930년 1월 25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민족진영은 공산진영에 대항하기 위해 이동녕·안창호·이유필·김두봉·안공근·조완구·조소앙 등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김구는 당무이사에 선출되었다.[64]

1930년 11월 18일 김구는 내무부장 임기를 마치고 재부무장 겸 군무부장에 선출되었다.[5] 이때 김구는 1927년 신약헌에 의한 국무 위원제의 국무위원회가 채택된 이후 그간 4년간의 정부 예산 집행의 결산서(決算書)를 무더기로 의정원 의장 앞으로 제출하였다. 자금난과 독립운동가들의 이탈, 변절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간판을 지키고 임정의 법통을 수호해 나갔다.[65]

1931년 11월 6일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4]

한인애국단상해한인청년당 지휘 (1931~1932)편집

1931년 10월 김구는 대한통의부 산하 암살 비밀조직을 강화한 임시정부 내 항일무장투쟁단체인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66] 간부는 단장인 김구를 비롯해 이유필·이수봉(李秀峰)·김석(金皙)·안공근 등이며, 단원은 이봉창·윤봉길·이덕주·유진만(兪鎭萬)·최흥식(崔興植)·유상근(柳相根) 등이었다.[67] 김구는 홍보를 통해 청년단원을 모집하였고, 1931년일본어에 능한 이봉창(李奉昌)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잘 구사하던 이봉창을 의심하였으나 같이 지내면서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 이봉창이 왜 일왕을 죽이지 못하느냐고 힐난하자, 김구는 자극을 받아 이봉창이 묵던 숙소로 찾아갔고, 이어 히로히토가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觀兵式)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일본 도쿄에 파견, 사쿠라다몬(桜田門)에서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1932년 2월 12일 중국인 잠수부들을 고용, 상하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출운호(出雲號, 이즈모호)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배 밑에 폭탄을 장착하는 과정에서 머뭇거리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일본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사장 등 인사들이 국제연맹 대표단 방문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구는 1932년 3월 말과 4월 27일상해한인청년당 유상근(柳相根)과 최흥식을 만주 다롄으로 각각 파견하였다.[68] 유상근은 상해를 출발하기 2~3일 전인 4월 25일 임시정부 청사가 위치해 있는 보경리 4호 문 앞에서 윤봉길 의거에 사용한 것과 같은 모양의 수통형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 2개를 받았다. 그리고 이 폭탄을 갖고 4월 27일 상해를 출발하여 5월 4일 다롄에 도착하였다.[69] 최흥식은 북대산통(北大山通) 5호 한인어부조합 내 김정순(金正順)의 집에서 거주하며, 다롄의 상황을 알아보고 있었다. 최흥식은 상해를 출발할 때 김구에게 먼저 대련의 상황을 확인하고 폭탄이나 권총을 사용하여 혼조 시게루(本庄繁) 일본 관동군사령관, 내전강재(內田康哉) 남만철도 총재, 산강만지조(山岡萬之助) 관동청장관 등을 처단하라는 비밀지령을 받았다.[69] 4월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만주사변을 규탄한 뒤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만주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키로 했다.[70]

1932년 4월 김구는 윤봉길 의거를 보내기 직전 상해한인청년당 유진식이덕주를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조선에 파견해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암살을 지시하였다.[68] 하지만 4월 24~28일 사이에 유진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71] 이후 이덕주도 해주에서 체포됨으로써 조선총독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932년 2월 윤봉길한인애국단에 입단하자 중화민국 정부 요인인 왕백수, 천궈푸(진과부) 등과 중국군에 복무하던 김홍일의 도움으로 폭탄을 입수, 3월 3일 윤봉길상하이로 파견, 훙커우 공원 부두 근처 비행장 격납고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중화민국이 패전하여 비행장 접근이 어려워져 포기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 및 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봉길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새벽 6시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최후의 아침식사를 같이 하였다. 자신의 손목시계를 영원한 이별의 기념으로 김구에게 건넨 윤봉길은 7시경 거사장소인 훙커우 공원으로 향하였다.[72] 윤봉길 의거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행사 참석자들이 여러 명 부상을 입었다.

1932년 5월 26일 오후 7시 40분 리튼 단장이 이끄는 국제 연맹 조사단이 다롄역에 도착할 때 유상근, 최흥식혼조 시게루(本庄繁)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에게 폭탄투척을 계획하였으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다롄 우체국을 통해 보낸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걸려 유상근과 정보원 최흥식, 폭탄 운반책인 이성원·이성발 등이 모두 체포됐다.[70]

"김구일파"한인애국단의 중국인 옥관빈 피살 사건편집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함. 옥관빈은 삼덕양행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함.(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8권 한인애국단 Ⅰ, 2008년 11월)[73]

 
옥관빈

중국에서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서 평가"[74]되는 중국인 옥관빈이 "김구일파"에게 사살된 사건.

대한민국 역사를 전공한 중국인 박사 1호인 쑨커즈(孫科志)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성빈(玉成彬), 관빈(觀彬) 형제는 원래는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악랄한 친일분자로 변절한 뒤 상하이에 눌러앉았으며 일부 친일파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일제에 투항하도록 선전하기도 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처럼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자 독립운동 세력은 친일파들을 처단하기 위해 병인의용대(丙寅義勇대)나 의경대 등을 조직해 암살활동을 펴기도 했다'고 하였다.[75]

1933년 8월 1일 옥관빈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내리는 즉시 양여주(楊汝舟, 본명 오면직 吳冕植), 엄순봉(嚴舜奉, 일명 엄형순)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산하 흑색공포단 소속이었다.[76][77]

1933년 8월 9일 사건의 진상이 오리무중인 가운데 '韓人除奸團(한인제간단)'이라는 이름으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단체는 옥관빈에게 6개조의 죄목이 있다면서 '옥관빈이 중국 국민당과 상해시민연합회의 요직을 맡으면서 중국의 군사정치정참을 하였다'고 주장했다.[78][70][79]

피살 당시 옥관빈은 독일화학약품(獨逸化學藥品)의 동양전매특허를 맡아 삼덕양행(三德洋行)을 경영하여 100여 만원의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이 종종 옥관빈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하였는데, 옥관빈은 "너희만 일하겠느냐, 나도 돈 버는 목적이 있다"하고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 언론은 옥관빈의 이러한 태도가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원한을 사서 암살을 당한 것으로 보았다.[80]

1933년 10월 2일 조선총독부 상해 주재 사무관 나카노 가쓰지(中野勝次)는 이 사건을 "김구 일파의 애국단 대 이곳 한국독립당의 알력은 최근 마치 평안도파 대 황해도파의 대립과 같은 색채를 띠어 왔고 점점 더 격화하는 형세임은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음. 원래 이 항쟁의 연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독립당 측이 ‘이른바 애국단이라는 것은 우리 독립당의 일부분적 단체인 성질을 띠는 것으로, 애국단이라는 명의로써 헛되이 허장성세할 것이 아니라 一國一黨의 대세에 준거하여 독립당이 이를 지휘해야 할 것이다’라는 견해를 가진 데 대하여 김구 일파의 애국단 일파에서는 ‘우리 애국단은 東京 및 신공원의 폭탄사건, 大連 사건 등 위대한 공적을 거두었는데 이 모두 우리의 자발적 행동이며 그 위대한 행동은 결코 멸시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범위의 확충과 아울러 바야흐로 혁명운동의 선봉임을 꾀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라는 주장을 하는 데에 기인하고 있어서 도저히 당분간 원만한 결합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됨. 그간 독립당 측에서는 행정의 가장 중요한 구역인 上海 일대가 李春山의 체포 이래 유야무야 형세가 되어 시들하고 느른해져 부진한 경향이 있을 때 한편 애국단 방면에서 근래 부하에게 비밀리에 위촉하여 프랑스조계 일대에 불온 세력을 더하려는 기세가 있음. 安恭根, 安敬根의 이면적 활동에 대해 金東宇, 金玄九 등은 그 이면적 운동자로서 활약하는 듯하며, 독립당원으로서 몰래 애국단에 들어가 행동하려는 자가 있는 상황이라 하여 우려하고 있으며,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이 애국단 일파가 玉觀彬 외 車利錫, 金弘叙, 玉成彬, 李星鎔, 崔錫淳도 암살하려고 예정하고 있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자못 우려하여 지난달 15일의 독립당 區會에서도 대 애국단과의 알력 완화에 관해 결의한 사정이 있음. 그런데 최근 전기 차리석 등 피살 예정의 소문이 있는 5, 6명은 연명으로써 그 사실의 철저한 조사 및 이에 기인하는 독립당원 無辜怨殺 등 불상사의 미연 방지를 독립당 중앙(이사회)에 청원하겠다고 말함. 이 항쟁은 당분간 여전히 계속될 것이며 그 되어가는 형편에 주의를 기울이는 중임"이라고 보고했다.[81]

김구는 안창호의 후견인 옥관빈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82] 1933년 9월 20일 김규식이용직, 한길수에게 다음 내용이 포함된 서신을 보냈다. "상해에서는 옥관빈과 유주발(유인발) 등 악한들을 모두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인 김구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비록 김구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이 일을 모두 자신이 한 것이라는 취지의 편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83] 1936년 3월 23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 피살 사건이 오면직엄순봉안공근, 안경근 등과 협력해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경성지부법원 검사정에 보고하였으며 김구는 언급되어 있지않다.[84] 하지만 다른 일본 자료에선 김구가 언급되어 있다.[81][85]

옥관빈이 친일밀정인지 정부와 학계에서 진상규명에 나섰고 결론은 객관적 증거가 없고 친일반민족행위나 부역자로서 친일파에 분류되지 않는 인물로 결론이 났다.[독자연구?]

백범일지에는 옥관빈이 언급되나 옥관빈을 친일파나 밀정으로 분류하지 않는다.[86]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87]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관빈은 예비후보부터 제외되어 친일반민족행위로 분류되지 않았다. .[88]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89]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90] 편찬결과물에 옥관빈이 제외되었다.[91] 친일반민족행위나 부역자란 객관적 증거가 없으므로 예비후보에도 제외되었다.[92] 최종출판물에서 제외된 케이스가 아닌 예비 후보에서부터 제외된 케이스로 친일반민족행위나 부역자로 분류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이 났다[출처 필요].

옥관빈이 친일밀정이라 주장한 이는 정화암으로 친일인명사전 "주요전거" 중 정화암의 증언이 포함되었다.[93] ("전거"는 증거가 아니다.[94])150여명의 학자들이 편찬위원을 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 측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95] 그 결과[출처 필요] 옥관빈은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어 분류되지 않았다.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해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객관적 증거가 없고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출처 필요] 친일반민족행위나 부역자로 분류되지 않았다.[독자연구?]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또한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이 원인이란 가설은 어디에도 확인이 되지않는다. 구글학술검색에 의하면 옥관빈이 논란이 되는 건 밀정여부로만 나오며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원인설은 확인되지 않는다.[96] 구글 학술검색은 논문 검색 사이트이다.


옥관빈이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한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 '증거불충분'이란 용어개념은 적용할 수 없다.[독자연구?] '증거불충분'은 오직 법률용어이며 법률 외에는 적용되지 않는 용어개념이다.[97][독자연구?] 그리고 '증거'의 1번의 의미이자 법률 외의 의미는 '증명하는 근거'란 의미이다. "실을 인정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재료"라는 의미는 오직 법률 용어이다.[98] 법률 외 용어개념을 기준으로 옥관빈은 '증거없음'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실제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지 않는 인물은 객관적 증거가 없는 것이라 설명된다.[출처 필요][독자연구?]



친일인명사전에도 명백히 '객관적 증거가 없고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독자연구?] 수록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사전 수록은 오로지 선정기준에 따를 뿐이며 일부의 형평성을 잃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사전에는 다수의 좌파 인물이나 월북 인사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고 기준에 부합한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사전에 등재한다는 것이 편찬위원회의 일관된 방침입니다.[99]

수록되지 않으 인물은 객관적 증거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독자연구?] 편찬위원회는 수록되지 않는 인물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연구소와 편찬위원회는 이의신청 사유가 다소라도 개연성이 있어 보이면 최선을 다해 확인하고자 했다. 설령 이의신청이 없더라도 단 한 명의 부당한 오명을 쓴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검증을 거듭하는 노력을 기울였다.[100]

수록되지 않은 이유를 "단 한 명의 부당한 오명을 쓴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이 이유라 설명하였다.

옥관빈이 친일파란 주장하는 전거가 검토됐음에도 옥관빈은 수록되지 않았다. 옥관빈은 객관적 증거가 없고 기준에도 부합되지 않는 인물이며 친일반민족행위나 부역자로 분류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출처 필요].[독자연구?]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소수파[출처 필요][독자연구?]의 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2008년 이호룡은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을 사살했다"고 기술하였다.[101] 2011년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한국에서 옥관빈은 친일파, 변절자, 밀정 등으로 낙인이 찍혀 기피인물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79]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 등 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102] 2019년 2월 12일 한국일보 보도에는 "무장항일을 지향했던 맹혈단은 일제 밀정 옥관빈을 사살하고, (후략)"라고 기술되었다.[103]

2006년 손세일은 "(1933년경)옥관빈은 친일파로 변신해 있었다"고 기술하였다.[104] 그러나 손세일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언론인이다.[105][독자연구?]

기타로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관빈이 독립운동가들을 멸시하여 관계가 좋지 않았고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1933년 서간단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기술하며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악화를 옥관빈의 처형 이유로 기술하며[106] 친일파나 밀정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한홍구는 옥관빈에 대해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106] 고만 서술할 뿐, 학계의 합의[출처 필요]에 의하면 "친일"행위 존재 자체는 친일파의 판단 증거가 아니며 "반복성과 중복성·지속성 여부도 주된 참고사항"이며 "친일단체 참여 등 협력행위가 일회적이라면 참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107][독자연구?] 그러므로 단순히 "친일"행위 언급만으로 친일파로 규정되지 않는데[독자연구?] 한홍구의 논문에선 옥관빈을 "밀정" "밀고"나 "친일파"로 기술하는 내용은 없다.[독자연구?]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해 옥관빈이 사살됐는데 김구 일파의 주장에 의하면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했다하며[77]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85] 그러나 일제강점기에서 양측이 인식한 "친일"이 현대 한국에 통용되는 "친일" 용례와 같은지는 전문가의 견해없이는 알 수가 없다.[출처 필요][독자연구?]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친일"은

명사

  • 1. 일본과 친하게 지냄.
  •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함.[108]

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표준국어사전에 의하면 "친일파"는

  • 1.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한 무리.[109]

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국어사전에 의하면 본래 친일, 친일파 ≠ 한국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친일, 친일파(2번 의미)는 차이가 있으며[출처 필요][독자연구?] 전문가의 분석없이 비전문가의 가설은 위키백과에서 금지하고 있다.[독자연구?] 본래 친일(親日)이라는 단어 자체는‘일본과 친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다. 현대 한국 내의 '친일'은 본래 의미와 다른 의미이다.[110][출처 필요][독자연구?] 해당 논문의 정의[출처 필요]는 표준국어사전과 일치하는 용례이다.[독자연구?] 표준국어사전은 친일을 "1. 일본과 친하게 지냄",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함"라고 이분적인 정의를 내렸다.[108] 그러므로 '친일'언급만으로는 현대 한국 내 통용되는 친일파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다.[출처 필요][독자연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두가지 의미라 나온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따져보면 반민족행위자란 민족을 반역한 자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다.

민족을 하나의 실체로 인정할 경우 민족반역자는 근대 민족이 형성된 이후 반민족행위자는 친일세력 외에도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어 매우 넓은 용어라 하겠다. 친일파란 일본에 우호적 이고 일본문화를 찬양하는 자 또는 일제 강점기 민족을 반역한 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

- 국사편찬위원회의 <반민특위 특별조사부 조사 기록> 해제[111][112]

"친일파란 일본에 우호적 이고 일본문화를 찬양하는 자 또는 일제 강점기 민족을 반역한 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면서 다른 두가지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국사편찬위원회는 "반민족행위자(친일파)"라고 명시하였다.[112]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는 해당 문서에서 "반민족행위자(친일파)"라고 기술하였다.[112]

참고로 친일인명사전에서 설명되는 "친일"은 일제의 침략을 당한 일반인의 기준이다.

"친일파란 용어는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관행어로서,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역사적 용어로 정착했다.18 이 시기 일반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친일파의 범주는 위로는 매국행위의 대가로 귀족이나 중추원 참의의 지위를 차지한 자로부터 아래로는 공출·징용·징병 등의 말단 집행자로서 직접 민중과 적대하면서 일제의 수탈과 전쟁동원에 앞장선 면서기·순사 등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었다. 당시의 관점에 따르면 친일파는 상하 유형을 막론하고 모든 일제 부역자를 지칭했던 것으로 이해된다."[113]

이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

토의결과 편찬위원회는 일제강점기와 그 직후인 해방공간은 물론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부역한 자를 강도 있게 비판할 때 널리 사용되었던 ‘친일파’란 용어를 그 역사성을 고려하여 그대로 수용하기로 하고, 사전 명칭도 원안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113]

"일반인"의 국어사전 의미는

"특별한 지위나 신분을 갖지 아니하는 보통의 사람."[114]

"김구 일파"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니깐 일반인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다.[독자연구?] 특히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해당되지 않는다.[출처 필요][독자연구?] 대한민국 역사를 전공한 중국인 박사 1호인 쑨커즈(孫科志)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성빈(玉成彬), 관빈(觀彬) 형제는 원래는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악랄한 친일분자로 변절한 뒤 상하이에 눌러앉았으며 일부 친일파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일제에 투항하도록 선전하기도 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처럼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자 독립운동 세력은 친일파들을 처단하기 위해 병인의용대(丙寅義勇대)나 의경대 등을 조직해 암살활동을 펴기도 했다'고 하였다.[75] 애초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애초에 일본인으로서, 친일인명사전에 설명하는 친일은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관행어"인데 일본인은 일제에게 침략당한 당사자가 아니라서 아예 해당되지 않는다.[출처 필요][독자연구?] 즉 친일인명사전에서 설명하는 "친일"은 일본인이 인식하는 "친일"이 아니라 피침략된 조선의 일반인이다.[출처 필요][독자연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는 "일제강점기와 그 직후인 해방공간은 물론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부역한 자를 강도 있게 비판할 때 널리 사용되었던 ‘친일파’란 용어를 그 역사성을 고려하여 그대로 수용하기로 하고, 사전 명칭도 원안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라고 하였다.[113] 옥관빈은 조상이 화교출신인 한국계 중국인이다. "옥관빈은 다른 상해의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28년 그는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국적 회복을 인정받았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새로이 중국 국적을 얻는다는 ‘입적’이 아니고 원래의 중국 국적을 되찾는다는 의미의 '복적'이라는 방법을 취하였다. 즉 자신은 조부 때 중국 윈난에서 평양으로 이거한 화교라는 것이다."[115] 중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실업가의 행적을 한간(매국노, 반역자, 무역자)으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독자연구?] 오히려 중국에서 "그는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서 평가되고 있다."[116] 대한민국 역사를 전공한 중국인 박사 1호인 쑨커즈(孫科志)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성빈(玉成彬), 관빈(觀彬) 형제는 원래는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악랄한 친일분자로 변절한 뒤 상하이에 눌러앉았으며 일부 친일파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일제에 투항하도록 선전하기도 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처럼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자 독립운동 세력은 친일파들을 처단하기 위해 병인의용대(丙寅義勇대)나 의경대 등을 조직해 암살활동을 펴기도 했다'고 하였다.[75] 한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를 친일반역자/부역자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독자연구?]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20. 경제

20-1. 일제의 경제침탈정책을 입안 또는 의사 결정을 주도한 자와 이의 수행에 적극 협력한 자

20-2. 국책 경제 기관(동양척식주식회사ㆍ식산은행 등)과 경제 단체의 간부

20-3. 군수품 제조업체의 책임자

20-4. 기고ㆍ광고ㆍ좌담ㆍ강연 등을 통해 일제의 경제침탈을 합리화하고, 전쟁 물자 동원에 적극 협력한 자

(친일인명사전의 친일파 분류기준 경제부문)[117]

친일인명사전의 경제부문 친일파 기준을 확인해보아도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가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친일파(반역자/부역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독자연구?] 옥관빈의 경제활동은 중국에서는 한간이 아닌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 평가받으며 친일인명사전의 친일파 기준에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독자연구?] 옥관빈의 암살범을 찾으려는 옥성빈도 암살됐다. 역사학자가 아닌 언론인인 손세일은 옥성빈도 친일파라 주장하였다.[118] 그러나 백범일지에는 옥성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86][독자연구?]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87]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성빈이 예비에서 제외되었다.[88]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89]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90] 편찬결과물에 옥성빈이 제외되었다.[91] 친일파란 증거가 없으므로 예비후보에도 제외되었다.[92] 최종출판물에서 제외된 케이스가 아닌 예비 후보에서부터 제외된 케이스다.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하면 옥성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객관적 증거가 없고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며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는다.[독자연구?]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1935년일본 제국의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함.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함."[119] 1936년 3월 12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120] 2008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호룡은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에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을 사살했다"고 기술하였다.[121]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고 기술하였다.[122] 2011년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는 자신의 논문에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한국에서 옥관빈친일파, 변절자, 밀정 등으로 낙인이 찍혀 기피인물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123]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자신의 논문에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124] 옥관빈은 2009년 발행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친일인명사전에는 미등재되었다(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임시정부 이동시기 (1932~1940)편집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로 임정은 14년 상해시대를 마감하고 이동해야만 했다. 임정은 항저우(항주)와 진강으로 이동하였다가,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선이 확대되자 장사-광주-유주-기강으로 옮겨 다녔다. 1940년 5월 중국의 전시수도인 중경에 정착하기까지 임시정부는 8년에 가까운 이동시기를 거쳤다.[125]

상해 탈출 및 장제스와 제휴 (1932~1934)편집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직후 김구는 군무부장 김철과 행동을 같이 하며 상하이 자우퉁 대학(상해교통대학) 체육교사이자 중국국적의 한국인인 선궈췐(신국권)의 주선으로 일찍이 김철의 면식이 있는 외국인기독교청년회 주사 미국인 조지 애시모어 피치의 비호를 받아 그가 아는 모목사의 사택에 잠복하였다.[126]

1932년 5월 9일 김구는 상해 각 신문에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본인임을 발표하였다.[127] 이후 일제에 의해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고 한다. 김구가 일제에게 수배되자 장제스(장개석)는 중국 국민당 조직부장 천궈푸(진과부)에게 김구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천궈푸는 상해의 피치 박사 집에 은신해 있던 김구를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시키고자 하였고, 그것을 조직부에서 일하고 있던 샤오정(소쟁)에게 맡겼다. 샤오정은 그가 잘 알고 지내던 추푸청(저보성)에게 부탁하였다. 추푸청중국 국민당 당원으로 저장성(절강성) 주석을 역임한 바 있고 자싱(가흥)의 유지였다.[128]

1932년 5월 14일 김구는 상하이를 탈출해서 항저우로 가서 쥐잉뤼서(聚英旅社)에 투숙하였다. 그리고 3일 후 자싱으로 이동해 추푸청의 집에 피신하였다.[126] 이후 장제스-천궈푸-샤오정-김구로 이어지는 연락통로가 마련되었다. 상호간의 연락은 주로 서신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중국 국민당공패성이 남경과 자싱을 오가며 연락을 담당하였고, 또 중국 국민당에 근무하고 있던 박찬익도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천궈푸는 중요한 사항의 경우에는 장제스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맡았다.[128]

이후 해염 등으로 피신하여 광동인 '장진구(長震球, 張震球)' 또는 '장진(長震, 張震)'으로 행세하며 숨어지냈다. 김구의 친할머니가 장씨(張氏)였기 때문에 성을 장씨로 바꾼 것이다. 자싱에서 김구는 주아이바오(주애보)라는 처녀 뱃사공과 위장결혼하여 일경을 피해다녔는데, 김구는 주애보와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겼다고 회고하였다. 하련생의 소설 '선월'은 김구의 자싱에서의 도피생활을 소재로 삼았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주애보와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때 그녀에게 여비로 겨우 100위안을 준 일이다. 그녀는 근 5년 동안 나를 광저우 사람인 줄 알고 섬겨왔고 나를 보살핀 공로가 적지 않았다. 당시 나는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노자 외에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이후 김구의 후손들은 주애보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129][130]

일제에 수배를 당하면서 1933년 3월 22일 군무부장직에서 사임하였다.[5] 10월 3일 임시 의정원에서 해임되었다.[4]

김구와 장제스 간에 연락관계가 맺어지면서 1933년 5월 김구는 박찬익을 통해 장제스와의 면담을 추진하였다. 이에 중국 측에서는 천궈푸, 김구, 장제스의 면담을 주선하였다.[131] 5월 장제스와 만났으며,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1934년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자싱으로 온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다시 만났다.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132]

옥관빈 암살 (1933)편집

김구1933년 8월 1일 발생한 옥관빈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는다.[133] 이 무렵 대표적인 친일파로 독립운동자들의 지탄을 받고 있던 인물은 옥관빈이었다.[134][119][120][122][79][124] 그는 일찍이 국내에서 김구와 함께 교육계몽운동에 앞장섰었고, 3·1 운동 뒤에는 상해로 건너와서 안창호의 측근으로서 임시정부활동에도 참여했다가, 임시정부활동이 쇠퇴해지자 임시정부를 떠나서 '慈藥敞(자약창)'이라는 제약회사와 '三德洋行(삼덕양행)' 등을 운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아 상해의 유명인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돈으로 신문사를 포섭하고, 상해정부의 고급관리는 물론 경제계와 종교단체와도 교분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호화주택을 가지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위세를 부렸다. 그는 독립운동기관에는 자금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일본군대를 위하여 2만원 상당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정보를 밀고하는 등 밀정행위를 하고 있었다.[134][121][123] 옥관빈1928년 중국에 귀화한 후에는 주로 법명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중국인 사회에서는 '옥혜관(玉慧觀)'으로 널리 알려졌다.[79] 대한민국 역사를 전공한 중국인 박사 1호인 쑨커즈(孫科志)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성빈(玉成彬), 관빈(觀彬) 형제는 원래는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악랄한 친일분자로 변절한 뒤 상하이에 눌러앉았으며 일부 친일파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일제에 투항하도록 선전하기도 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처럼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자 독립운동 세력은 친일파들을 처단하기 위해 병인의용대(丙寅義勇대)나 의경대 등을 조직해 암살활동을 펴기도 했다'고 하였다.[75]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떠나고 없는 상하이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독립운동단체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이었다. 이 단체는 만주사변 이후에 상해로 집결한 무정부주의자들이 정화암, 유자명, 李康勳(이강훈), 백정기 등을 중심으로 하여 1931년 9월경에 조직한 것이었다.[134]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중국과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연대하여 1931년 11월 중순에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일본의 주요기관 파괴, 요인 암살, 친일분자 숙청, 배일선전 등을 실행할 연맹의 행동대로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134] 김구는 중국인들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자금은 확보했으나 일을 수행할 마땅한 인물이 없었고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사람은 있으나 돈이 없었다. 그리하여 김구의 자금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인력이 합작하여 옥관빈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이 일은 김구·안공근·정화암 세 사람만 알고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134]

1933년 7월 22일~7월 23일옥관빈일본 군대를 위하여 약 2만원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 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밀정행위를 한 사실이 포착되었다.[135] 이에 오면직엄형순정화암과 연락을 취하면서 옥성빈(玉成彬, 옥관빈의 형)의 집 맞은 편 중국인의 집 2층에 수일간 잔복하며 사살할 기회를 엿보았다.[135] 김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정화암은 자전거 몇 대를 구입하여 옥관빈의 신원추적에 착수했다. 두 달 동안 추적한 끝에 그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옥관빈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 공무국 경찰로 근무하는 그의 종형 옥성빈(玉成彬)의 집 뒤쪽 정자칸 방에 사는 흥사단 단원 이아무개의 부인과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주일에 한두 번씩 그 집에 드나들었다. 이아무개는 漢口에서 소규모의 세발자전거 공장을 차리고 있어서 집을 비우고 있었다.[134] 옥관빈 암살은 김구의 심복으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해 있는 오면직(吳冕稙)과 엄형순이 맡았다.[134] 이들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산하 흑색공포단 소속이었다.[119]

1933년 8월 1일 저녁 9시 무렵 옥관빈옥성빈의 집에서 나올 때에 기다리고 있던 엄형순이 자동차로 접근하여 권총 세 발을 쏘았고, 옥관빈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134] 다른 문헌에 따르면 1933년 8월 1일 밤 12시(8월 2일 0시 경) 옥관빈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이모씨의 처와 간통하고 나오던 중 이모의 집 근처에 숨어있던 엄순봉의 총격을 받았다. 총소리에 놀란 동네 주민들과 경찰관들이 '강도야! 도적이야!' 소리치며 몰려오자 엄형순은 '강도가 저 쪽으로 뜁디다'고 말하고는 유유하게 나왔다.[136] 1933년 8월 1일 보도에 따르면 옥관빈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차에서 내리는 즉시 양여주(楊汝舟, 본명 오면직 吳冕植), 엄순봉(嚴舜奉, 일명 엄형순)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137]

옥관빈을 암살한 뒤에 김구 쪽에서는 1933년 8월 8일에 한인제간단(韓人除奸團) 이름으로 '역적 옥관빈의 죄상을 선포함'이라는 斬奸狀(참간장)을 작성하여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는 한인신문과 중국신문에 배포했다.[134][138][139] 1933년 9월 1일 《삼천리》 제5권 제9호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상해 옥관빈 씨가 피살 당하였다. 그는 안창호의 부하로 있어 일도 많이 하다가, 정계에서 발을 끊고 실업에 종사하여 벌써 10년, 독일화학약품(獨逸化學藥品)의 동양전매특허를 맡아 삼덕양행을 경영하여 100여 만원의 거부를 이루었다. 각금 운동자금을 달라고 가면 '너희만 일하겠느냐, 나도 돈버는 목적이 있다' 하고 모두 거절하여 왔으며 이것이 원한에 의한 피살(含怨被殺)의 주원인이라 한다."[140]

1933년 9월 20일 김규식은 이용직, 한길수에게 다음 내용이 포함된 서신을 보냈다. "상해에서는 옥관빈과 유주발(유인발) 등 악한들을 모두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인 김구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비록 김구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이 일을 모두 자신이 한 것이라는 취지의 편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141]

옥관빈이 암살되자 옥성빈은 동생을 살해한 범인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 역시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있던 친일파였다. 옥성빈도 넉 달 뒤인 1933년 12월 18일 오후 6시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해산(金海山)의 집 입구 길가에서 암살되었다.[134][142][123]

1935년일본 제국의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함.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함."[119] 1936년 3월 12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120] 2008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호룡은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에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을 사살했다"고 기술하였다.[121]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고 기술하였다.[122] 2011년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는 자신의 논문에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한국에서 옥관빈친일파, 변절자, 밀정 등으로 낙인이 찍혀 기피인물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123]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자신의 논문에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124] 옥관빈은 2009년 발행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친일인명사전에는 미등재되었다(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김원봉과의 갈등과 한국국민당 창립 (1935~1937)편집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국민당은 김구, 조소앙, 김규식,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의견의 대립이 심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의 결성에 앞서 임시정부 해체론이 제기되자, 1935년 5월 19일 김구는 '임시의정원 제공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임정 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한 경고문을 발표했다.[143][144][145] 또한 이 문서로부터 상해 탈출 이후 김구의 임시정부 복귀를 확인할 수 있다.[143]

1935년 7월 5일 조선혁명당, 조선의열단,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을 해소하고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146][147]

이로써 김원봉의열단 계열이 임시 정부 내 당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김원봉파가 매사에 전횡을 일삼고 한국독립당에서는 조소앙 한 명만 중앙위원으로 선출하는 등 냉대를 하자 노종균·조소앙 등은 1935년 9월 25일 민족주의적 주장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민족혁명당에서 탈퇴하고 한국독립당의 재건을 선언하였다.[148][149] 10월 5일 한국독립당 임시당무위원회는 민족혁명당의 공산주의 이론과 노선을 세세히 비판하였다.[150]

1935년 11월 2일 김구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임시 의정원 비상회의에서 외무부장에 선출되었다.[5] 김구는 난징 국민정부와의 관계와 명망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와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루어 같이 항일운동에 힘쓰도록 협의하였다.[151]

1935년 11월 김구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정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고 김구는 이사장에 추대되었다.[152] 이후 유명무실화된 임시정부에 대한 해산 주장이 일부 독립운동가들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자, 김구는 이에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유지를 천명하였다.

1936년 8월 27일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陣中吟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를 휘호로 썼다.

1936년 10월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김구는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강화할 것을 다짐하였다.[153]

1936년 11월 10일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4]

1937년 2월 지청전 등이 민족혁명당을 탈퇴하여 조선혁명당을 재건하였다.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 일로 김구는 종가부터 챙기는 것이 도리라며 안공근을 질타하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154] 그 뒤 안공근은 김구의 대가족에서 이탈하였다.

1937년 김구는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구는 자신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으며, 김구는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고, 김원봉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155][156]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중화민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157]

중일 전쟁 발발 직후 (1937)편집

1937년 7월 중일 전쟁 발발을 계기로 조소앙한국독립당, 지청천조선혁명당이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제휴를 원하였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대한인국민회와도 연대하게 되어 반김원봉 세력이 갖추어졌다.[158]

1937년 8월 7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대한인단합회, 대한부인구제회, 대한인동지회, 한인애국단,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등이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을 결성하고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명의로 중일 전쟁에 대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을 발표하였다.[159][160]

1937년 8월 말 김구는 안경근, 엄항섭 등을 따라 상하이에 잠입, 중국 측의 군정 각 방면을 두루 방문하였다. 특히 프랑스 공부국 정치차장 러시아인 엠랴노프와 장시간 회견하였으며, 3일 간 머무른 뒤 엄항섭을 동반하고 난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김구는 시국이 시국인 만큼 김원봉파와의 싸움을 접고 중한합작 하는 방책을 연구하게 되었다.[161]

1937년 9월 9일 전장(진강)에 잠입 대기 중이던 김구는 무정부주의자 유자명정화암에게 보내어 "서로 과거 일체를 잊고 주의, 주장을 초월하여 이 기회에 악수하자. 나는 이번에 자금도 생겼고 기계(권총, 기타 흉기의 뜻)도 입수했다. 김원봉 일당 약간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광복운동자는 전부 의사소통을 보았다. 이번 기회에 옛날처럼 사이좋게 일을 하고 싶다. 속히 협의하고 싶으니 와 달라"는 친필 편지를 보내어 대동단결을 종용하였다.[161]

1937년 9월 29일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손자 김인을 데리고 몰래 상하이에 와서 프랑스조계 패륵로(貝勒路) 신천상리(新天祥里) 20호 안공근의 집에 피난하였다.

1937년 10월 30일 상해 난시 지역의 함락이 목전에 다가오자 한국국민당, 한국국민당청년단, 조선혁명당 등의 당원들은 일본군을 피해 가족과 함께 속속 오지로 향해 피신하기 시작했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안공근을 따라 자동차를 타고 난징으로 달아났다.[161]

1938년 2월경 임정을 후난성 창사로 옮겼다.

남목청 사건과 구사일생 (1938)편집
 
총탄을 맞고 수술 후 회복한 김구 (1938년)

1938년 5월 7일 후난성(호남성) 창사(장사) 남목청에서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통합을 논의하는 회의장에 조선혁명당이운한이 돌입하여 권총을 발사하여 김구·현익철·유동열이 중상, 이청천이 경상을 입었다. 현익철은 입원 즉시 사망하였다. 김구는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절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162] 타고난 체력으로 그는 과다출혈을 하고도 오래 버틸 수 있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김구는 총격 직후 4시간 이상 방치되었다가 병원으로 실려가 입원되었다. 병원에서 치료 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움직임에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그의 글씨체는 떨려서 구부러진 글씨를 썼는데 이를 일명 총알체라 한다. 김구는 이운한의 공범으로 강창제(姜昌濟), 박창세(朴昌世)를 지목하였다.[162]

이 사건 소식을 들은 중국 국민당 천궈푸는 매우 마음 아파해하면서 샤오정에게 "당신도 이 일로 고생을 했으니 우리로서는 협조를 끊고 그 방도를 모색하여 남에게 넘기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국민당 내 임정 담당자가 천궈푸에서 주자화(주가화)로 바뀌었다.[128]

1939년 4월 모친 곽낙원 여사가 인후증(咽喉症)과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82세로 사망하였다. 아들이 일본군 타살사건으로 체포된 뒤에도 아들을 신뢰하였고, 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뒤에도 늘 정신적으로 후원해주었다. 곽낙원은 사망하며 자신과 며느리의 유해를 반드시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구는 노가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로 운구, 이장하였다.

김원봉과의 좌우합작 노력 및 실패 (1939)편집

1939년 5월 10일 김구와 김원봉은 공동명의로 '동지동포 제군들에게 보내는 공개신'이라는 제목의 성명서에서 기존의 모든 조직을 해체하고 우파세력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좌파세력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통합된 단일당을 수립하자고 제안하였다.[163]

1939년 8월 기강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조선민족전선연맹에 속한 7개 정당·단체 대표대회가 개최되어 단일당 결성을 논의하였다.[125] 그러나 이때 이승만은 '김원봉, 김규식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단합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민족혁명당에서는 '각 단체들의 연합단체 구성에는 찬동하지만 기왕의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의 당을 만드는 데는 찬동할 수 없다'고 하여 대동단합은 성사되지 못하였다.[164]

1939년 10월 23일 외무부장 임기가 종료되고 재무부장에 선출되었다.[5][6]

1940년 3월 13일 이동녕 주석이 병사하자 임시 의정원은 내무부장 홍진을 임정 주석으로 승계시켰다.[3]

1940년 5월 9일 치장(朞江)에서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이 통폐합하여 임정의 여당으로서 한국독립당을 통합 창당하였고, 김구는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165][166]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1940~1945)편집

한국 광복군 결성 및 주석 취임 (1940)편집
 
광복군 성립전례식에 참석한 김구 (우측)

1940년 5월~9월 임정은 중국의 전시수도인 중경에 정착하였다.[125]

1940년 9월 17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개최하였다.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 국가 주석 장제스광복군의 통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중화민국군의 예하대로서 그 통수권은 중화민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었다. 김구는 중화민국 정부에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생활비 이상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으므로 미국에서 활동할 의향을 밝히고 중국정부에 여행증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164] 중국정부는 이곳에서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하자 김구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활동 계획서를 작성하여 중국정부에 제출하였다.[167]

1940년 10월 9일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5]

 
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
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오른쪽 김붕준
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구미위원부(주미외교위원부) 부활 (1941)편집

1941년 6월 4일 워싱턴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하였다.[164] 이후 주미위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 등 재미인사들과 연락하여 미국 국방성과 접촉, 광복 직전에는 미군 전략사무국(OSS)과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41년 6월 임정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임정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김원봉의 광복군 합류와 재갈등 (1942)편집

1941년 10월 임정의 정식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10월 반파쇼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연안에서 개최된 동방각민족 반파쇼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대회의 명예주석단의 1인으로 선출되었다.[168]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였다.

1941년 12월 9일 임정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였다.[169]

광복군 확대 개편 과정에서 민족혁명당 인사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임정에 참여했다. 1942년 김원봉조선의용대를 흡수하여 규모가 확대, 개편되었다.

1942년 11월 18일 장건상이 학무부장에, 1944년 4월 24일 김성숙, 김원봉이 군무부장에 당선되었다.[5] 그 후 임정에는 공산주의계, 민족주의계, 무정부주의계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1942년 3월 1일 무정부주의계 내부 갈등으로 나월환 암살 사건이 있었다. 1943년 민족혁명당한독당의 김구 등 국무위원 5명을 암살제거하고 민족혁명당김원봉 등이 대신 입각하겠다는 미수로 끝난 모의문서도 발견되었다.(출처 필요)[170] 미국에 체류중인 이승만은 김구에게 항의하며, 이들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1943년 7월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민족혁명당과의 갈등으로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다시 주석에 복직하였다.[154]

임시 정부 주석 재선 (1944)편집

민족혁명당에 치인 1944년 임정은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했다. 1944년 4월 24일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출되었다.

1944년 8월 중화민국으로부터 한국 광복군 통수권을 되돌려 받았다. 그 즉시 한국 광복군 통수부를 설치하고 통수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 겸 광복군 통수부 주석 겸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 당권, 정권, 군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당·정·군의 삼위일체의 지도체제를 확입하고 광복군을 이끌며 그 확대, 발전을 도모하였다.[171] 9월 그는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그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 광복군한반도 진주를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그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한국 광복군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1945년 3월 29일 장남 김인이 폐질환으로 중국 쓰촨성에서 병사하였다.

1945년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재선출되었다.[172]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에 합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산시성(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와 저녁만찬 중 광복 소식을 접하였다. 외국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통탄해하였다고 한다.

광복 이후편집

귀국 직전 (1945)편집

 
1945년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번과 면담한 김구

1945년 8월 18일 김구는 중경 임시 정부로 귀환하였다.[173]

1945년 9월 3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174] 김구는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하였으나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환국을 추진했으나 미군정은 정부자격의 귀국을 반대, 존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은 개인 자격의 환국을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1945년 11월 4일 장제스 중국 총통은 해방을 맞아 귀국하는 김구 주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위한 전별식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중국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吳鐵城)에게 명하여 미화 20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280만 달러 또는 30억원)의 금액을 김구에게 전달했다.[175] 장 주석은 "비록 우리 정부가 가난하긴 하지만 어찌 한국에 후하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말했다. 중국 국민당 역시 당시 항일 운동과 공산당과의 내전 등을 치르느라 재정적으로 어려웠지만, 장 주석은 김 주석이 돈 문제로 고생하지 않게 자금을 주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구는 이 돈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실패했다.[175] 중국과 경쟁하기를 원치 않았던 미군은 중국측이 제공한 정치자금을 허용하지 않았다. 장제스가 돈과 함께 보내준 3명의 무전사와 무전기에 대해서도 무전사를 추방하고 무전기는 압수했다. 다급해진 김구는 뉴욕의 주미중국대사관을 통해 서울로 송금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결국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이를 국고에 보관했다가 1947년 6월 한국에 전달했다.[175][176] 전문가들은 장 주석이 김 주석에게 준 전별금의 의미를 우정, 공동운명체, 해양세력과의 완충지대 활용 등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176]

장제스와의 회담에서 김구는 "안중근 자식이 일본에 항복하여 상하이에서 여러 가지 불법행위를 하며 아편을 매매하므로 실로 유감이다. 직접 명령을 내려 안준생을 구금해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1945년 11월 귀국길에 김구는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리에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안준생 암살 부탁은 중국 관원으로부터 거절당했다.[177]

1945년 11월 5일 김구 등 임정 환국 제1진은 두 대의 비행기에 분승하여 상하이로 향하였다. 11월 12일11월 13일 두 차례에 나누어 미군 수송기편으로 상하이를 출발한 임정 환국 제1진은 11월 23일 조국 땅을 밟게 되었다.[178]

귀국 직후 (1945)편집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요인 환국기념회에서 (단상 첫줄 왼쪽 끝에 앉은 이가 김구)
 
상해 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

1945년 11월 23일 오후 김구 등 임정 환국 제1진이 귀국하였다. 김구는 죽첨정 숙사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승만과 회견한 다음 기자회견을 하였다. 여기서 김구는 "나는 조선이 남북의 2점령지대로 분열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연합국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지는 않겠으나 장차에는 승인을 요구할는지도 모르겠다", "조선내의 정당수를 감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내의 정당은 하나로서는 아니되고 유력한 정당 몇이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을 위하여 민주주의정체가 좋다고 믿는다" 등 앞으로의 정치 방향에 대해 언질을 주었다.[179] 임시 숙소는 조선호텔이었고, 1945년 11월 24일 광산재벌 최창학이 기부한 죽첨정(경교장)에 이주하여 김구 자신의 사저 겸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로 활용하였다.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나 김구는 '내가 귀국할 때 한국의 정부도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180]

1945년 11월 23일 김구는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휘호를 작성하여 헌정하였다. 복간축하 휘호의 내용은 '유지자 사경성'(有志者 事竟成)으로 '뜻이 있으면 끝내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181] 김구가 귀국하자 윤치호는 그와 만나자는 연락을 취했지만 그는 친일파의 거두로 지탄받고 있었다. 윤치호의 영향력과 일제 강점기 당시 그로부터 받은 지원금 등 윤치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김구는 거절하는 대신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1945년 11월 25일 오후 2시 20분 돈암장이승만을 방문하고 저녁까지 당면문제에 관하여 요담을 하였다.[182]

1945년 11월 28일 죽첨정 임시정부요인 숙소에서 열린 정례기자회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조선인민공화국 입각설을 부인하였다. 김규식은 "나는 인민공화국 내각조직에 관하여 하등의 의사 교환도 없었고 내가 각원으로 된 것은 비법적이다. 그런 고로 나는 이 내각에 입각할 것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고, 김구는 "나도 동감이다"라고 말했다.[183]

1945년 11월 한국민주당 인사들이 찾아왔고, 최창학·방응모 등이 그를 찾아왔다. 그러나 귀국 직후 이광수가 한동안 그를 방문하지 않자 대노하여 이광수를 찾았다. 김구의 불호령을 듣고 경교장에 불려간 뒤 이광수는 종종 경교장을 찾았으며 1947년 이후 김구의 7촌 조카 김흥두와 함께 《백범일지》 한글판 번역작업에 동참한다.[184]

 
임정요인 환영식에 이승만과 김구 (1945.12.01)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1945년 12월 1일 조소앙, 홍진 등 임정 환국 제2진이 군산비행장에 도착 후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날 오후 1시 서울운동장에서 임시정부봉영회(臨時政府奉迎會)가 열렸다. 윤보선의 사회로 시작되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이 이어진 뒤 조선국민학교생도를 선두로 기행렬에 옮기어 행렬은 오후 2시 20분경 안국정 네거리에 이르러 조선생명보험회사 2층에서 축하를 받는 김구, 이승만 앞에서 "대한임시정부 만세, 김구 만세, 이승만 만세"를 부르고 경성역 앞에 이르러 해산하였다.[185]

1945년 12월 19일 오전 11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정개선환영대회에 참석하였다. 15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11시 정각이 가까워오자 김구 이하 임정요인 일동의 입장에 뒤 이어서 각 정당대표 및 기타 인사의 입장이 있었고 장엄한 취주악에 맞추어 일동 총기립으로 환영대회가 개막되었다. 36년간 잊었던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일동의 애국가 제창, 이화여전의 환영가 제창, 홍명희의 환영사, 러취 군정장관의 축사 후 김구의 답사와 이승만의 답사가 있었고, 만세삼창으로 환영회는 폐회되었다.[186]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는 순국선열추념대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김구가 총재로 선출되었다.[187] 12월 24일 한국소년군 총본부 총재에 추대되었다.[188] 12월 25일 돈암장이승만을 방문하던 길에, 전속 주치의 류진동을 대동하고 돈암장 산기슭 판자촌을 찾아 세민을 위문하였다.

1945년 12월 27일 김구는 '삼천만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하였다. "완전히 독립자주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합시다."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합시다"라며 그 방안으로 보선제 실시, 부와 생산의 점진적 국유화, 의무교육 도입을 주장하였다. "친일분자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여야겠습니다." "세계적 대가정을 건립합시다"라며 우방과의 교류를 환영하면서도 "그러나 이것이 절대로 우방 단독적이나 공동적으로 우리를 통치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한인은 마땅히 한인의 정부가 통치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강고한 국방군을 건립합시다"라고 말했다.[189]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직후 (1945~1946)편집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3상회의) 결과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를 논의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리자 김구 등 임정 측은 오후 4시 긴급 국무위원회의를 열고 각 정당, 종교단체, 언론기관 대표들을 초청하여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한 끝에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구성을 결의하였다.[190] 김구는 처음부터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강력히 관철하였다.

송진우 피살 사건과 한국민주당과의 갈등 (1945)편집
 
송진우

1945년 12월 29일 임정 주최로 경교장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회의에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다 모였고, 조선공산당 사람들까지 다 나왔다. 다들 아주 격해 있었다.[191] 이때 석상에서 김구는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면서 흥분했다. 강원룡에 의하면 "당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다"고 한다.[191]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 독립정부를 우리들 손으로 세워야 한다" 고 절규하였다.[192] 반면 송진우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생각에서 김구와 맞섰다.[193] 송진우는 김구의 충칭 임정의 통치권 주장을 미군정에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194]

1945년 12월 30일 오전 6시 10분경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송진우 피살 사건이 발생되었다.[195] 이 사건이 전해지자 미군정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의심하고 1946년 1월 1일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196] 사건 전날의 정황상 한국민주당 측도 김구를 배후로 의심하였고, 그래서 사건의 진실과 무관하게 임정 측과 민주당 측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1946년 4월 9일 경기도경찰부는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을 체포하였다. 이날 경찰은 한현우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송진우를 돕고 있던 자인데 그의 지휘하에 유근배, 김의현이 권총을 발사하여 송진우를 암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197] 이날 경찰 취조결과 발표에 따르면 한현우는 1941년 12월에 와세다 대학 정경과를 졸업하고, 1943년 5월경 동경에서 국수주의자 일인 나카노 세이고(中野正剛)와 고이치 호즈미(穗積五一)을 숭배하여 이와 5년간 직간접으로 교양을 받고, 고이치 호즈미의 지지로 재일조선인 유학생 5천 명으로 조선독립연맹(朝鮮獨立聯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지하운동을 한 자인데, 당시 일본경비청의 탄압이 심하므로 고이치 호즈미의 지도로 한현우은 일본국체연구소(日本國體硏究所)라는 간판을 내걸고 일본황실중심주의를 표방하다가 1944년 3월에 비밀이 탄로되어 인심교란죄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4년을 받은 후 1945년 2월 25일경 강원도 춘천 한현우의 처가집에서 수양하다가 1945년 8월 17일 상경하여 시내 종로 2정목 마포 노량진 신당정 등으로 전전하였다. 한현우 등은 1945년 11월 초부터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를 매국노로 규정하고 암살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데, 12월 말 신탁문제가 일어나 격분하여 12월 30일 오전 6시 10분경 송진우를 먼저 암살한 것이었다.[198]

1946년 9월 3일 한현우에게 일본제 권총을 내어준 한현우의 지도자 전백(全栢)에 관한 공판이 있었다.[199] 1947년 2월 14일 한현우는 최종언도공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200] 1948년 9월 5일 한현우는 옥중 인터뷰에서 "송진우씨 암살사건에 관해서는 범행 당시나 지금이나 별로 심경의 변화가 없습니다"라고 했고 자신이 "대한임정 지지자"라고도 했다.[201] 1950년 한현우는 마포형무소 복역 중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하여 석방되었다가 9·28 서울 수복 당시 자수하지 않고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202] 1960년대에 이르러 신원이 확인되었는데, 한홍건(韓弘健)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일본 여성과 결혼하였다.[203]

전국 반탁파업과 미군정과의 갈등 (1945)편집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김구는 이후 그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

1945년 12월 30일 김구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존 하지에게 보냈다. 하지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김구의 성명서를 맥아더에게 송신하였으며, 미국이 이것을 모스크바 협정에 언급된 3개국에 전달해줄 것을 강조하였다.[204]

1945년 12월 31일 오전 김구는 국자(國子)를 발표한다. 그 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의 포고령이 떨어지자 미군정청의 한국인 직원들이 파업을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렀다.[205]

임정 주최의 반탁 운동이 극치에 달한 1945년 12월 31일 오후 하지 중장은 조병옥에게 연락관을 보내 사령관실에서 요담할 것을 요청해 왔으므로 즉시 하지를 만나러 갔다. 하지는 '군정을 접수하려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즉시 처치해야 되겠다'고 말하면서 그날 저녁 임정 요인 처치에 대한 방송을 하겠다고 조병옥에게 원고 전문을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원래 중경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33명은 한국에 입국할 때 미군정의 법과 질서유지에 복종하겠다는 맹약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빙자하여 미군정을 접수하고 미군들을 축출하려고 획책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획책과 군정 접수운동의 여파로써 공공 안녕질서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므로 오늘밤 0시를 기하여 인천 소재 전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겠다." 조병옥은 이 원고를 다 읽고 난 뒤 경악하면서 하지중장에게 말하기를 임정 요인들은 우리 민족사에 찬연히 빛나는 3.1 운동 이래 자유독립의 혁혁한 경력을 가진 분으로 민족의 자유전치운동의 봉화를 든 민족운동의 투사이므로 이 애국자들의 국외추방은 미군정에 협조하는 한국인의 민심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동시에 미군정은 한국에 있어서 실패로 끝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니 그런 조치는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 중장은 조병옥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러면 방송을 중지하겠다고 하였다. 조병옥은 즉석에서 김구와 하지의 면담을 약속받았다. 조병옥은 하지 중장에게 "나에게 김구 주석과 협상할 전권을 맡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 중장은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206]

1945년 12월 31일 저녁 조병옥서대문에 있는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의 숙소를 방문하였다. 조병옥은 김구와 여러 시간 면담하였다. 조병옥은 김구에게 진언하기를 "주석께서 입국하실 때에 독립군 한 명도 대동하지 못하고 정치자금도 한 푼도 없이 미군정에 협력하겠다고 맹약한 이상 현재의 임정이 계획하고 있는 미군정 접수 운동은 포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북한공산주의 치하에 붉은 물이 들어가고 그에 따라 한반도는 전역에 걸쳐 공산주의 철제에 휩쓸려 갈지도 모르는 이 역사적 단계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미군정의 단계를 통과하지 않고는 도저히 자유독립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오니 주석께서는 그 점 신중히 심사숙고하시어 한번 하지 장군과 만나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해 보심이 어떻습니까?" 조병옥의 말에 김구는 하지 중장을 만나 보겠다고 수락, 그의 진언을 들어주었다.[206]

1946년 1월 1일 김구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호출되었다. 이시영, 신익희, 조소앙, 엄항섭 등 다른 임정요인도 함께 군정청으로 불려갔다. 이때 김구는 하지로부터 명령을 거역하면 죽이겠다는 경고를 들었고, 김구는 하지의 융단에 올라 이자리에서 죽겠다고 대들었다 한다. 송남헌은 그가 하지로부터 추방시키겠다고 위협당하였다고 증언했다.[207]

1946년 1월 1일 미 국무장관 번즈는 전국에 보내는 라디오방송 가운데서 조선 탁치 불필요 가능성을 시사하였다.[208] 그러자 이날 밤 8시 엄항섭 선전부장은 김구를 대리하여 중앙방송국을 통해 일반 민중이 파업을 중지하고 곧 복업하라고 방송하였다. "오늘 워싱턴에서 온 보도에 의하면 미국 국무장관 번즈씨는 우리나라에 신탁통치를 실행치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나도 그렇게 되기를 믿는다. 그러나 만일 불행히 신탁통치가 결정될 때에는 또 다시 반대운동을 할 것은 물론이다. 지금부터 작업을 계속해서 평화적 수단으로 신탁통치를 배격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고로 우리 동포는 곧 직장으로 돌아가서 작업을 계속할 것이며 특별히 군정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일제히 복업하고 또 지방에서도 파업을 중지하고 복업하기를 바란다."[209][210]

공산진영과의 갈등 (1946)편집

1945년 12월 30일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점에 있어서 의견이 전부 일치하였었다.[211] 그런데 조선공산당조선인민공화국 등 좌익진영은 3상회의 직후인 1946년 1월 2일 기점으로 신탁통치 찬성(찬탁)으로 일제히 돌변했다.[212][213][214] 이로써 좌익과 우익의 분열이 노골화하였다.[215] 좌익의 찬탁표명에 대해서는 모스크바와 평양으로부터의 지령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216] 민족진영은 외세를 적이라고 보았고, 공산진영은 동족을 포함한 지주·자본가를 적이라고 보았다.[217] 이후 김구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면서 공산진영과 갈등을 빚었다.

비상국민회의 및 민주의원 결성 (1946)편집
 
한국 방문 중 경교장을 찾아온 피치 박사 부부와 함께 (1946년)
앞줄 가운데가 김구, 앞줄 오른쪽이 피치 박사 부부, 앞줄 왼쪽은 조완구, 프란체스카 도너 순, 뒷줄 왼쪽 첫 번째는 엄항섭, 세 번째는 이기붕, 네 번째는 안우생, 가운데는 안미생, 오른쪽 첫 번째는 선우진, 네 번째는 서영해
 
이승만. 1920년 상하이에서 김구와 첫 대면 후 호형호제하며 정치적으로 협력하였다.

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예비회담이 개최되자 각 정당과 사회단체는 서둘러 반탁진영과 찬탁진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김구와 이승만은 미소공위 반대 및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미소공위 찬성 및 참가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민주당장덕수가 찾아와 김구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미소공위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반면 장덕수는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193]

반탁진영은 1946년 1월 20일 임정을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비상정치회의주비회를 개최하여 전국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소집하였다.[218] 1월 21일 비상정치회의주비회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합류시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로 개칭하고 김구·이승만을 공동회장으로 추대하였다.[219] 1월 23일 임정 측 혁신계인 민족혁명당의 김원봉·성주식(成周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등 3명은 '임정이 중립을 지키지 않고 반탁에 가담해 우익 편향화하고 있다'면서 비상국민회의주비회 탈퇴성명을 하였으며,[220] 임정의 장건상도 임정과의 결별을 고하였다. 또한 공산진영 산하단체도 모두 참가를 거부해왔으므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는 우익진영만의 집결체가 되었다.[221] 1월 30일 비상국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이 상임위원회는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김구·이승만에게 위임하였다. 2월 1일 비상국민회의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다.[222] 2월 13일 김구·이승만은 28인의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하였다.[223]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가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개편되었다. 이승만이 의장에, 김구·김규식이 부의장에 추대되었다. 이날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정인보, 조소앙은 결석하였다.[224] 또한 이날 찬탁진영의 조선인민당민주의원 탈퇴성명을 발표하였다.[225]

찬탁진영은 1월 19일부터 여운형조선인민당박헌영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을 추진하였고,[226]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227] '우익 편향화'를 운운하며 비상국민회의를 탈퇴했던 이들은 고스란히 찬탁진영이자, 민주의원의 반대진영이자, 좌익진영인 민전에 참여하였다.[228]

1946년 2월 8일 이승만 계열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라는 공통 분모 하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통합 결성하였다.

1946년 3월 1일 기미독립기념회와 3·1기념회가 주관한 3.1절 기념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였다.

1946년 3월 5일 문봉제(文鳳濟) 등 월남 청년들이 주도한 집회가 성공하고, 이에 힘입어 평남동지회가 조직되고, 다시 평남동지회는 평남북 조직을 합친 평안청년회로 확대되었다. 결성대회에는 북한 지역 연고자(이윤영, 김병연, 강기덕)는 물론 김구도 참석했다.[229]

김일성 암살 미수 (1946)편집

1946년 2월 초 임정은 신익희를 본부장으로 하는 정치공작대 중앙본부를 조직, 산하 지하 단체인 백의사의 지원을 받아 이북의 김일성·강량욱·최용건·김책 등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지도자 암살을 준비했다. 김정의·김형집(김성만)·최기성·이성렬·백시영·이희두 등으로 구성된 임정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결사대'는 신익희의 낙산장(駱山莊)에서 정보수집 요령과 지하활동 방법에 대한 훈련을 받은 뒤 북한에 파견되었다.[230][231]

1946년 3월 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평양역 광장에서 3·1절 27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원래는 연단의 좌측에서 김형집이 김일성 연설 시작과 동시에 수류탄 투척, 연단의 중앙에서 김정의가 저격 지휘 및 저격순간 촬영, 연단의 우측에서 최기성이 수류탄 불발에 대비해 일제기관총(모제르1호)으로 김일성을 저격하기로 계획했지만, 김정의에게 미행이 붙어 차질이 생겼고 당황한 김형집김일성의 연설이 끝나자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소련군 부대장 노비첸코 소위의 한 발 앞에 떨어졌고 그는 수류탄을 되잡아 던지려고 했지만 그의 손에서 폭발하였다.[230][231] 노비첸코는 이 폭발로 오른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을 다치는 중상을 입었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232][233][234] 김일성 암살에 실패하자 나머지 요원들은 최용건김책의 집에 습격·폭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량욱의 집에 던진 폭탄은 강량욱의 부재로 아들과 딸 등 그의 가족만 죽게 만들었다.[235][234] 청년단원 중 한명이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의 명의로 2월 15일에 발급된 무임승차권(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임정 신임장)을 분실했고 이는 북한측에 의해 입수되었다.[234][236] 이 테러가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한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격렬히 비난하였다.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을 “봉건 잔재세력과 외국 팟쇼세력과 제국주의 잔재세력과 친일파의 삼위일체”이자, “이완용을 배운 조선매국노”로 규정짓는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조선공산당은 김구의 귀국시 그들의 기관지를 통해 '김구를 민족혁명의 지사', '반제에 일생을 바친 고결한 지사'로 예찬했었지만 이 테러사건 이후 김구는 북한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런 연유로 당시 북한의 출판물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개 구자', '김구'(金狗)로 부르며 매도하였다.[237]

1946년 4월 6일자 소련군정문서에 의하면 소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김일성을 암살미수의 배후로 보았다. 그 때문에 이승만과 김구는 좌익에게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 받았다. "(라) 보고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는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 전에 북조선으로 파견된 테러분자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다. 자동차에 수류탄이 투척되었는데 자동차는 어떤 파손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분자들은 이승만이 교부한 것으로 보이는 추천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만식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소련군정문서, 남조선 정세 보고서 1946년 4월 16일자, '13. 구두 정보 보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1946)편집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1946년 제1차 미소공위.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

1946년 3월 20일에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은 미국의 예상대로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을 과도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련측은 “북한 주민도 모스크바 협정문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되었다.[238]

미소공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민족주의진영 통합에 나선 한독당1946년 3월 22일 국민당과의 통합을 선언하였다.[239] 4월 7일 한독당, 국민당, 한민당, 신한민족당 등 4당 합동교섭위원 합당 협의를 하였는데, 한민당측이 '중앙위원수와 인선배치가 명확치 않아 당을 헌납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 통합에 난항을 겪었다.[240] 이에 김구는 4월 9일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당에 얽매이지 않은 거국적이고 초당적인 국민운동의 필요'하다며 거부하였다.[241] 4월 18일 한독당으로의 통합에 국민당, 신한민족당만이 참여하였고 한민당은 이탈하였다. 김구는 한독당 위원장에 추대되었다.[242]

이후 미소공동위원회는 난항을 거듭하다가, 1946년 4월 18일 과도정부 수립에 참여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 즉 '공동성명 제5호(제5호 코뮤니케)'가 발표되었고,[243] 이어서 4월 27일 존 하지가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하더라도 반탁의견 발표를 보장하겠다는 특별성명을 냈다.[244] 이에 5월 2일 비상국민회의, 독촉국민회,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한국독립당, 한국민주당 등 25개의 우익 정당과 사회단체가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되 탁치를 전제로 한 일체 문제는 절대 배격한다"고 발표하며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하였다.[245] 그러나 소련은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했어도 신탁 통치 반대를 포기하지 않는 한 협의할 용의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 5월 6일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246][247]

 
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반탁운동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 운동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248]

 
1946년 6월 16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 서울역에서 (오른쪽 두 번째가 김구)

1946년 6월 3일 이승만정읍 발언을 할 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상공회의소 강익하가 찾아와 김구에게 3백만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그는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249]

1946년 5월 15일 윤봉길 등 7의사의 유해가 일본에서 부산항에 도착했다.[250] 김구는 6월 15일 낮 12시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 추도회에 참석하였다. 6월 16일 오후 5시 40분 3열사의 유해를 모시고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서울역장 안내로 일단 귀빈실에서 잠시 휴계한 다음 소년군을 선두로 태고사에 안치하였다.[251][252] 7월 7일 아침 수만명의 시민이 시내 태고사에 운집하였고, 국민장의 행렬은 오전 10시 삼의사봉장위원회의 지도를 받아 엄숙한 주악리에 효창공원으로 향하였다. 이승만, 김구, 오세창, 이시영, 여운형과 각 정당 단체 대표자와 각 정화 각 학교대표자들 5만여 명이 참석하였다. 안국정 사거리 종로 남대문 앞을 지나 경성역을 거쳐 연병정으로 행하여 금정(錦町, 현 용산구 효창동)에 이르니 이곳이 곧 이봉창의 출생지이다. 효창공원에 도착한 것은 오후 12시 40분이었다. 오후 2시부터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의 국민장이 거행된 뒤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253]

1946년 6월 11일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전국대회 2일차에 강연을 하였다.[254]

1946년 6월 29일, 새로운 민족통일기관의 설치구상과 단독정부 수립 준비 및 지지기반 확보를 위하여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하였다.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255]

1946년 8월 15일 미 군정청에서 열린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하지 중장, 이승만에 이어 인사말을 했다.[256]10월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1946년 8월 26일 조병옥, 장택상, 김성수, 장덕수, 이승만, 김구를 암살하기 위해 북한에서 특파한 요인암살대원 이종섭(李鍾燮), 최한(崔翰), 이원희(李元熙), 김천호(金天虎) 등 8명이 검거되었다.[257]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김구는 이승만·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258]

1946년 11월 23일 김구는 서울신문 1주년 축사에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혔다. 그 중 친일청산에 관한 발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친일분자 숙청은 마땅하지만 그 죄상을 □衝하지 않고 그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용서할만한 자도 기어이 매장하라고 한다. 왜적 이상으로 나쁜 친일분자는 감히 머리도 들지 못하고, 죄가 비교적 가벼운 무리도 자숙하는 태도를 보이건만, 소위 황국의 성전을 위해 글장이나 쓰고 연설쯤 한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면서 도리어 날뛰는 무리를 대할 때에는 구역질이 나지 아니 할 수 없다.'[259] 사실상 한국민주당을 지목하여 비난한 것이었다.

반탁독립투쟁위원회 활동 (1947)편집

 
8.15 광복이듬해인 1946년 백범 김구와 윤봉길의 가족. 왼쪽부터 김구, 부친 윤황, 모친 김원상,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 아들 윤종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이후 경교장에서 기념사진. 왼쪽부터 손기정, 서윤복, 본인, 남승룡

1946년 12월 이승만이 도미 외교에 나섰을 때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민족 외교'를 위해 11월 26일 '외교사절 후원회'를 조직했다.[260] '이승만 박사 외교사절 후원회'의 부위원장은 조소앙이 맡았고, 김구와 배은희 등은 반탁총동원위원회나 비상국민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거뒀다. 그리고 김구와 조소앙은 이승만의 국내 책임자로 적극적으로 도미 외교를 지지하였다. 12월 2일 이승만 출국시 김포 비행장에 나가 환송하였다.

1947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움직임에 따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다시 가열되기 시작했다. 1월 14일 미군정은 경향신문을 통해 1월 18일 전국학생총연맹(전국학련) 주도 하에 반탁데모가 이루어질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261] 한편 1월 16일 서울로부터 '전국학련 산하의 학생들이 1월 18일 반탁데모를 전개시키고자 계획하고 있다'는 전보를 받은 이승만은 "조선에는 여하한 데모도 전개되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행동이 외국배척운동으로 오해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답장을 보냈고,[262] 1월 18일 민주의원에도 시위를 자제하라고 전보를 보냈다.[263] 이에 전국학련은 매국노소탕대회, 반탁의 재계몽운동, 학생운동사 보고대회, 반탁웅변대회 등 기존 계획[264]을 전면 수정하고, 1월 18일 오후 2시 경운동 천도교강당에서 '반탁학생투쟁사 발표대회'만을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김구 등도 참석하였다. 이철승의 '반탁이냐 죽음이냐', 최성의 '이북학생투쟁사', 송원영의 '1·18 반탁학생의 투쟁사' 등의 발표가 있었다.[265]

한편 이승만, 김구 등은 서북청년단 등에도 종종 경제적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이는 대부분 일회성이었다.[266]

1947년 1월 21일 김구, 조소앙, 김준연 등 9명이 협의하여 각 사회단체가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함께 역량을 집중하기 위한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설치키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결성은 24일 경교장에서 42개 단체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최고 고문으로 이승만, 위원장으로 김구, 부위원장으로 조성환, 조소앙, 김성수를 추대하였다.[267]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회김규식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한다고 결의하자, 김구가 위원장으로 있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에서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유령집단으로 공격했다.[268]

1947년 2월 14일 오후 1시반 서울 천도교대강당에서 김구와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 및 방청객 2천여 명이 참석한 '반탁독립궐기대회'가 열렸다. 반탁독립궐기대회는 '과도적 독립정부'를 서울에 수립할 것과 아울러 '신탁통치 내용의 여하와 기간의 장단을 불문하고 결사반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267][269]

1947년 2월 28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위원장 김구3·1절을 맞아 정치적 소견을 피력하였다. 이때 김구"반탁운동도 독립운동이다."라고 말하였다.[270]

김구, 조완구, 조경한 등은 한독당 내 국내파가 정치이념의 차이 등의 이유를 내세워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한민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고[271], 김구는 1947년 2월 26일 3.1절까지 한민당과 한독당의 합당이 거부될 때에는 한독당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초강경자세로 나왔다.[271]

미군정 접수 운동 (1947)편집

한편 이승만이 미국에 나가 있는 동안 국내 임정 지지세력은 임정 법통을 계승하는 단체를 수립하고 미군정을 접수하기 위한 운동을 빠르게 추진하였다.

1947년 2월 17일 민족통일총본부·독촉국민회·비상국민회의를 통합하고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로 개칭하였다.[272] 3월 1일 독촉국민회국민의회의 임정 법통을 승인하고 임정을 봉대한다고 결의하였다. 3월 3일 국민의회는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였다. 장건상, 김붕준, 차리석, 김원봉, 김성숙, 성주식 대신에 오세창, 김창숙, 박열, 이청천, 조만식, 이을규(李乙圭) 등 6인을 국무위원에 보선하였다.[7]

1947년 3월 5일 미군정의 요청에 의해 김구, 조소앙, 이시영, 유림은 덕수궁에서 브라운 소장과 2시간 요담하였다. "(金九) 정권을 대한임정에게 이양해 주지 않겠는가? (브少將) 할 수 없다." "(金九) 우리가 국내에 들어와 보니 입국 이래 조선국민이 임정을 절대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국무성에서 내세운 두 가지 조건은 해소된 것으로 보며 따라서 임정을 승인해 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브少將) 사실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그 당시의 미국 견해와 현재의 정세와는 다르니 승인해 줄 수 없다." 등의 대화가 오갔다.[273] 미군정은 다시금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7년 3월 12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김구는 '트루먼이 전 세계 자유애호 인민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1947년 4월 21일 비행기편으로 경기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김구는 김포공항에 나와 그를 친히 마중하였다.[274]

1947년 4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귀국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공산주의와 합작을 단념하였으므로 우리는 총선거법안을 빨리 만들어 남한과도정부를 수립하고 UN을 참가시켜 소련을 설득한 후 통일을 이뤄야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제 김구와 김규식은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단념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할 것'이라고 요구하였다.[275] 이승만이 임정법통론을 보류한데다가 4월 29일에는 국민의회 주석 취임까지 거부하자 급기야 5월 2일 경교장에서 이승만, 김구, 조소앙, 조완구, 이청천, 김창숙 등 국민의회 국무위원들과 독촉국민회 지방대표 여러 명이 모여 회담을 하였는데, 이승만의 임정봉대가 필요할 시기가 올 때까지 보류하자는 의견과 임정 일부요인의 임정봉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좁혀지지 못하였다.[276]

1947년 5월 9일 이승만은 "대한임정법통관계는 지금 문제삼지 말고 아직 잠복상태로 계속하였다가 정식국회와 정식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임시 의정원과 임정의 법통을 정당히 전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277]

건국실천원양성소 설립 (1947)편집

 
단국대학 설립시 격려차 방문 1948년 1월 18일 낙원동
앞줄:김구 장형, 뒷줄:장도빈, 엄항섭, 양주동, 김정실, 박정숙

1947년 3월 20일 김구는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광복군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였다.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하였다. 명예소장에 이승만, 소장에 김구, 이사장에는 장형으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인재 양성의 발상은 청년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김구 개인의 신념에서 나왔다. 이 단체는 임정이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강사는 조소앙·조완구·신익희·지청천·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양주동·민영규(閔泳珪)·엄상섭·엄항섭·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정인보·황기성(黃基成)·이인·김활란·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된 후 재정난 등의 문제로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산했고,[278] 건물(원효사)은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됐다.[279]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1947)편집

 
김구 (1947년)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를 놓고 우익진영이 분열되었다. 6월 10일 한민당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우익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였다.[280] 이에 이승만은 "공위 참가할 사람은 5호 성명에 서명(찬탁)하기로 되었는 즉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중략) (5호 성명에)서명해서 (신탁통치를)지지하기로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이니... (후략)"라며 한민당을 비판하였다.[281][282] 6월 22일 한국독립당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3당으로 분립하였다. 한국독립당이 미소공위에 불참한다고 하자, 이에 반발한 안재홍·박용희 등 혁신파는 신한국민당을, 권태석 등 민주파는 민주한독당을 각각 결성하여 미소공위에 참가하기로 하였다.[283] 이렇게 우익진영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한민당 중심, 이승만·김구 중심, 유림 중심의 3파로 분립하였다.[284]

1947년 6월 23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주관 하에 전국 각지에서 반탁시위가 벌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많게는 수만명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 반탁시위를 하였다. 종로 군정청 앞에서는 마라톤 선수 서윤복 귀국환영회가 끝나자마자 전국학련 학생들의 주도로 반탁시위가 있었다(1만명).[285][286] 이 외에 경무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오류동(200명), 평택(150명), 춘천 단양대(1만명), 대전(2천명), 김제 석수각(300명), 전주(3천명), 이리(익산)(3천명), 고창중학교정(3천명), 군산(5천명), 임실(400명), 진주(1천명), 광주(2만명) 등에서 반탁시위가 이루어졌다.[287][288] '비폭력 무저항'을 표방한 반탁시위는 대체로 평온하게 이루어졌다.[289]

 
덕수궁에서 이승만과 함께 (1947년)

1947년 7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 강연회에 김구, 김규식은 연사로 참여하였다. 김구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왔다. 다음 연사인 김규식이 장내에 소개되었다. 장내의 열띤 청중들은 김규식의 예정된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마침내 한 청년이 나와서 김규식과 같은 유물론자의 연설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두가 귀를 막자고 제안했다. 청중들은 이 문제를 표결에 붙여버렸다. 김규식의 연설을 듣지 말자는 주장은 바로 가결시켰고, 이어 김규식은 조용히 퇴장해버렸다. 김구는 이를 보고 말리지 않았다.[290][291]

1947년 9월 5일국민의회 부주석에 재선되었다.[292]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은 한국 문제를 UN으로 이관한다고 밝혔다. '미소공위를 통해 한반도에 민주적 독립국가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소련은 반발하였고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293]

정치 자금 조달 노력편집

김구는 환국 초기 조선일보방응모와 연대하였다. 방응모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의 위원으로 활동했고,[294][187]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임됐고,[295][296] 1946년 2월 8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에 선임됐고,[297]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으로 결정되었고,[298] 1946년 8월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299] 1947년 1월 26일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재무부장에 선임되었다.[300] 방응모1948년 1월 이후 김구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노선에서 이탈하여 남북협상 노선으로 가자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방응모1948년 2월 3일 '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라는 글을 발표하였다.[301] 방응모한국독립당 재정부장을 맡았었다는 데에는 그렇다 또는 아니다 하는 이견이 있다.[302]

김구는 중국 화교 무역으로 정치자금 마련을 모색하였다. 해방 이후 가장 비중이 컸던 대일무역을 비롯해 대외교역이 거의 끊어진 상태에서 유일한 것이 타이완·홍콩·마카오 등지와 이뤄졌던 화교무역이었다. “타이완산 소금이 한국에 수입됐는데 반응이 좋았고 빈 배로 돌아가기 아까워서 인삼을 실어갔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같은 한·중간 경제활동을 관장함으로써 양당의 정치자금으로 쓰고자 했다. 김구의 한국독립당중국 국민당 사이에는 모종의 계획이 추진됐다. 1947년 말 임시정부 주화(주중국)대표단에서 국민당과 김구의 연락을 맡고 있던 민석린은 ‘중한동제실업공사 조직요강 초안’을 작성, 중국 국민당 사무장 우티에청을 통해 장제스에게 올린다. "중국 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은 각 당의 경제기초 건설을 위해 중한동제실업공사(中韓同濟實業公司)를 조직한다. 업무범위는 무역·운수·어업·부동산·공장·은행·농장 등으로 정한다. 자금은 우선 1백억원을 중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이 절반씩 출자하고 장래 업무발전 상황에 맞춰 증자한다." 민석린과 우티에청 간에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고 갔다. 국내에서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운 김구나 장기간의 대일전과 국공내전으로 자금이 소진된 장제스, 양측의 이해가 맞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임시 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결고리였던 우티에청은 바람직한 내용으로 판단하고 장제스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국공 내전이 심화되면서 중화민국이 대부분의 영토를 중국 공산당에게 뺏기게 되었고, 이로써 화교무역을 통한 김구의 정치자금 조달 역시 실패로 끝났다.[175]

생애 후반편집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 출판사에서 백범일지를 활자화한 책을 처음 펴냈다.[303]

장덕수 피살 사건과 한국민주당과의 결별 (1947~1948)편집

 
장덕수. 재령 보강학교 당시 김구의 제자이기도 했다.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장덕수가 자택인 청설장(聽雪莊)을 방문한 박광옥(朴光玉), 배희범(裵熙範)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입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304]

1947년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 배희범을 체포하였다.[305]

1947년 12월 23일 국민의회장덕수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애국자들이 검거되고 있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였다.[306]

1948년 1월 16일 수도청장 장택상은 장덕수 살해 혐의로 한독당 중앙위원 김석황을 체포하였다.[307]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다. 배희범은 연대상과 2년생으로 초등학교 교사였다. 김석황한독당 중앙위원이자 국민의회 정무위원 겸 동원부장이자 대한보국의용단(대한독립의용단) 단장이자 임정에 관여한 인물이었다. 또한 이들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다.

1948년 1월 21일 한국민주당임정수립대책협의회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로 개칭, 자신들의 당론이던 임정봉대론을 철회하고 사실상 임시정부 측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다.[308]

1948년 2월 26일 군정장관 윌리엄 F. 딘김석황, 조상항(趙尙恒), 신일준(辛一俊), 손정수(孫禎洙), 김중목(金重穆), 최중하(崔重夏), 박광옥, 배희범 등이 장덕수 암살의 범인들이라고 발표하였다.[309]

 
김구의 군정청 법정 출두 장면 (1948. 03. 12)
 
미군 군사법정에서 증인 자격으로 심문중인 김구

1948년 3월 2일 장덕수 피살 사건 제1회 공개재판에서 미군 검찰은 권총·사진 등과 함께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 하였다.[310]

1948년 3월 8일 미국 군율재판 위원회는 북미합중국대통령 트루만의 명의로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에 출정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 하였다.[311] 같은 날인 3월 8일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김주석 부하에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범죄로 김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312]

1948년 3월 12일 미군 군사법정에 증인심문을 받았다. 김구를 심문한 미군정군법무관들은 대위, 소령, 중령급이었다. "(問) 선생의 제자격인 피고인들이 진술한 것마다 왜 한결같이 선생과 관련한 내용으로 부합 일치될까요? (答) 알 수 없지요. 그러니까 모략이라 생각됩니다." "(問) 누구의 모략이란 말이요? (答) 그것을 이루 다 말하자면 모단체나 개인에 관한 것이 나오겠지만 어쨌든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일 리가 없다."[313]

1948년 3월 15일 오전 공판에서 김구의 증인 신문 때 법무장교와 김구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자 암살범인 박광옥은 피고석에서 김구 선생을 모욕한다고 고함을 지르며 혁대를 풀어들고 횡포를 벌여 미군 헌병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미군정 라만 검사의 "애국자로서의 선생은 장덕수씨를 애국자로 생각했오?"라는 질문에 김구는 마지 못해 "張 개인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적은 없지만 환국이래 나와 같이 일한 사람이면 모두 애국자로 보니까 장씨도 애국자로 봤겠지요"라고 답했다. 김구에 대한 증인 심문이 끝나고 오후 공판에서 배희범은 "정권을 잡기 위하여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한 것",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분자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 때문에 장덕수를 암살했다고 증언하였다.[314]

1948년 3월 17일 제11회 공판 내용에 따르면 박광옥, 배희범 등 용의자들은 장덕수 등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1947년 8월 한양의원에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다. 최중하의 진술에 따르면 원래 안재홍·배은희·장덕수를 암살하려 했으나 "안재홍씨는 찬탁을 부르짖은 죄는 크나 그후 남북통일을 제창하게 되었으므로 용서하였고 배은희는 그 정치적 실력이 크지 못하므로 제거하지 않아도 좋을 것으로 결정되어 오직 장덕수 1인을 죽이기로 된 것"이었다고 하였다.[315]

1948년 4월 1일 제21회(최종) 공판에서 김석황, 趙尙恒, 辛日俊, 孫禎洙, 金重穆, 崔重夏, 박광옥, 배희범 등 8명에게 교수형이 선고됐고, 趙燁, 朴鼎悳 등 2명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316]

1948년 4월 22일 존 하지는 군사위원회의 판결을 검토 후 중앙청공보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최후적 조치를 발표하였다. "1) 박광옥 및 배희범의 사형은 승인하나 그 집행은 추후 재심할 시까지 보류함. 2) 김석황·申一俊·金重穆·崔重夏의 사형은 종신형으로 감형함. 3) 趙尙恒 및 孫禎秀의 사형은 10년형으로 감형함. 4) 趙燁 및 朴鼎悳의 10년형은 5년형으로 감형함."[317]

남북협상 (1948)편집

남북협상 선언편집

1947년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 총선거는 "국토를 양분하는 비극"이라고 발표했다가,[318] 11월 30일 오전 10시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한 뒤 1시간 정도 요담한 결과 "독립정부수립 견해에 완전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하였다. 의견 일치를 입증하듯 오후 1시경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319] 12월 1일에는 김구는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하는 조건이라면,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320] 12월 4일 김구는 "국민의회민대와의 완전합작은 민족단결 공작에 기초를 주는 것이며 심히 경하할 일이다. 나와 이승만 박사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즉시 실현하자는 목적에 완전한 합의를 보았다"고 하였다.[321]

1947년 12월 12일 수도경찰청 장택상은 '국민의회 측 간부 몇 사람이 장덕수 피살 사건에 관계된 사실이 있다'며 국민의회한국민족대표자회의(민대) 합동회의에 대한 집회금지조치를 내렸다.[322] 이에 12월 14일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하여 장덕수 피살 사건 때문에 한독당원들이 구속된 문제에 관해 요담을 나눴다.[323] 12월 20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을 맞이할 한국민족대표단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공동고문으로 추대되었다.[324] 12월 21일 집회금지조치로 인하여 한국민족대표단 선정이 보류된 상황에서 이승만민대가 일방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결정 발표하자 김구의 국민의회측이 반발하였다.[325] 하지만 12월 26일 이승만과 김구가 이에 대해 원만히 합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326][327]

1947년 12월 20일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조소앙은 "국민의회 민대의 단결에 실패된데 상심한다"면서 "무력과 테러로써 정권을 찬탈하는 것은 벌써 고대의 악습"이라면서 돌연 정계은퇴를 선언했다.[328] 이는 1948년 1월 11일 국민의회민대 합동문제가 해결되고 소위원회 의장에 조소앙, 부의장에 명제세가 추가 선출되면서 일단락되었다.[329]

1948년 1월 12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1948년 1월 23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 소련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330] 그러자 1월 28일 김구는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에게 '미소양군이 철수하여 군정의 간섭없이 유엔 치안 하에 자유스러운 선거를 치러야 하며,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331] 2월 9일 김구와 김규식유엔 한국 임시위원단크리슈나 메논에게 남북한 동시 총선거 성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재차 제안하였다.[332] 이는 남한 단독 총선거를 통해 국제적으로 공인된 정부를 수립한 뒤 압도적인 득표율을 근거로 소련을 쫓아내고 통일을 이루려던 이승만의 계획에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승만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단체와 언론이 남북협상에 회의적이었다.

 
38선에서 모습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할 뜻을 굳히자 신익희, 조소앙이 찾아와서 그를 만류하였고 이철승 역시 그를 찾아가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당시 김구의 현실적인 처지는 더욱 어려웠다. 김구는 한편 으로 선거 참여를 권유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덕수 암살 사건에 관한 군율 재판으로 곤욕을 치러야 할 형편이었다.[333]

김구가 남북협상론으로 노선을 바꾸자 측근의 한사람이던 김학규도 반대하였다.[334] 그리고 김학규는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하고[334], 그를 한국독립당에 입당시켰다.

1948년 2월 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 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 총선거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자기위안을 받으려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은망념(邪恩忘念)은 해인해기(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정부 독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335]

이어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336]

1948년 2월 26일 유엔은 남한 단독 총선거를 가결하였다.[337] 3월 1일 김구'초대 대통령은 나의 숭배하는 선배인 이승만 박사를 추대하나 남한 단독 총선거에는 불참한다'고 선언하였다.[338]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339] 한편 한민당으로부터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이 남로당 주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그들이 "크렘린 궁의 사자"라느니 하며 비난을 받았다.[339] 한민당은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 에서 김규식은 한 때 공산당원이었으니 그 태도가 공산당과 동일할 것은 필연의 귀결로 볼 수 있고, 김구도 토지국유정책 등을 볼때 공산당과 통할 가능성이 있다.[339] 는 공격을 당했다.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340]

1948년 4월 1일 이승만은 남북협상 찬성은 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341]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열린 YMCA임시회의에 연사로 참석한 윤치영으로부터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342]

1948년 4월 15일 오후 5시경 김구는 경교장 출입기자단을 초청해서 '남북협상은 성공되리라고 그다지 큰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통사정하려는데 지나지 못한다는 것'과 또 "내가 이번 북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김구는 통일독립을 위해서 끝까지 투쟁하였다고 3천만 동포에게 전하여 주기 바란다"는 비장하고 중대한 발언을 하여 남북협상을 주장하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동시 정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343]

제1차 남북연석회의 참석편집

김구는 북행에 앞서 남북협상의 목표는 오직 통일임을 천명하였다. "금차 회담에 방안이 무엇이냐고 묻는 친구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미리부터 특별한 방안을 작성하지 않고 피차에 백지로 임하기로 약속되었다. (중략) 남쪽에서 단선군정을 목숨 걸고(誓死) 반대하던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 후에 그와 유사한 어떤 형태를 표현시키지나 아니할까 하고 걱정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있는 한 완전한 기우가 되리라는 것도 단언하여 둔다."[344]

1948년 4월 19일 오전 5시반경부터 대동청년단, 이북학련(以北學聯), 대한학생총연맹(大韓學生總聯盟)에 속하는 대학중학생 140여 명이 밀려와 마당에 늘어 앉은 한편 뒷문까지 가로막고 김구의 북행을 만류하였다. 이 때문에 김구는 오전 8시경 차를 타고 임시외출하려다가 마당에 내려 다시 실내에 들어갔다.[345] 그리고 오후 3시경 비밀리에 김신, 선우진을 대동하고 자동차로 서울을 떠나 오후 6시 20분경 38선 경계선인 여현(礪峴)에 도착해 기념촬영을 한 후 평양으로 향했다.[346]

1948년 4월 19일 밤 평양에 도착하여 21일 평양신문기자단 회견에서 38선 제거에 남북 공동노력을 역설하였다.[347]

한편 신병이 심하여 병원치료를 받던 김규식도 평양으로 출발하였다. 북행 직전 장건상은 김구를 찾아 방북할 의향이 있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김구는 방북할 의향이 없다는 의사를 밝혀왔다.[348]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나타나자 장건상은 놀랐다고 회고하였다.[349]

1948년 4월 21일 0시부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려는 개인 및 대표자들의 38선 이북 월경이 금지되었다.[350]

1948년 4월 21일 김구는 남북연석회의에서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자주의 독립을 진취할 대계를 상토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발전이며... (생략)"[336]

남북연석회의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이를 눈치챈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였다.[351]

1948년 4월 23일 남북연석회의에서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전조선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 결정되었다.[352] 그리고 4월 25일 평양방송이 이 결정서와 격문을 방송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내 정계에 일대 파문이 일어났다. 즉 이 결의서와 격문이 발표되자 김구·김규식 산하 진영에서는 이때까지 남북협상을 추진해 온 근본이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26일 민주독립당 등에서는 연락원을 급파하였으나 소련측의 입국거부로 인하여 드디어 빈손으로 귀경하였다.[353] 같은날 4월 25일 이승만은 선출되지 않은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대표의 자격이 없으며, "남북협상은 소련에게 이용당한 결과"라고 혹평했다.[354] 4월 27일 민족진영 각계는 남북협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355]

1948년 4월 26일 김구는 송태산장을 찾아 안창호의 형인 안치호, 여동생 안신호를 만나고 내려왔다.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에서
왼쪽부터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1948년 4월 30일 평양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1948년 5월 2일 북한은 남북협상을 근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였다.[356] 남북협상이 북한에게 '합법 정부'를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357]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연석회의 당시 대부분의 인사들은 김일성 만세를 불렀고, 그러면 누군가 술을 따라주고 밴드가 울린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전혀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안했다.'고 증언하였다.[358]

1948년 5월 5일 오후 8시경 김구·김규식 등은 일행 60여명과 같이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359]

1948년 5월 6일 김구는 "경교장에서 내가 떠날 때 만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다녀왔는데 이번 우리 일행의 큰 소득은 말할 수 없으나 장차로 남북의 우리 동포는 통일적으로 영구히 손잡고 살아가겠다는 기초를 튼튼히 닦아 놓았다. 첫술에 배부르는 법은 없는 것이니 다만 한 두 번 또다시 만난다면 우리의 목적 달성을 확신하는 바이다"라고 소감을 밝힌 후 남북협상의 성과에 대한 김구·김규식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359]

김구의 남북협상 참가 배경에 대해, 남북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다고 한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다녀온 후, 한독당 중앙 간부에게 북한방문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일부가 남로당에 유출되었는데, 이를 목격한 남로당원 출신 박갑동에 의하면 김구의 생각이 나와있다고 한다.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이북사람들이 전부 김구를 지지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 "만일 단독정부를 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되는데, 통일적으로 하면 자기가 대통령이 된다."고 확신했다는 것이다.[360]

남북협상에 다녀와서 나 없는 동안에 총선거니 뭐니 해서 거기 입후보한 사람은 다 탈당해라고 했다.[361] 그러자 김선(1910~) 등 총선거에 출마한 당원들은 '그래도 다 같이 애국운동 하던 사람인데(이승만) 이젠 나라 세운다니까 여기서 일하자.' '말이 당수지 나가랄때 나가자 우리가 아쉬울 것이 있냐' 하며 한독당을 탈당했다.[361]

김구와 이승만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한독당의 당원이던 김선의 회고에 의하면 남북협상에 다녀온 뒤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이승만 박사 욕을 하더라[361]'는 것이었다. "우리가 중국서 뻣뻣한 빵 한 조각으로 며칠씩 끼니 할 때 이승만이 반역자 자금 걷으러 미국 간다 하고선 돈커녕 미국 여자 하나 얻어서 침대서 잠자고 이제 와서 지가 애국자라고 나와?" 그러면서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김선에게 '거 뭣하러 가서 만나느냐'고 대응했다.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 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라며 조롱하였다.[361]

김구는 김일성이 1948년 6월 29일에 열리는 제2차 남북연석회의를 제의해 왔을 때는 완전히 거절해 버렸다.[362]

제1차 남북연석회의 참석 직후편집

1948년 6월 4일 제헌 헌법 초안이 발표되자,[363] 6월 7일 김구내각책임제를 거론하는 현 국회는 임정 법통 계승과 무관함을 시사하였다. "대통령을 군주같이 앉혀놓고 수상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비민주제도일 것이다. 민중이 대통령을 전출한 이상 모든일을 잘하던지 못하던지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일을 하여나가야 할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사리에 맞지않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영국과 일본과 같은 제도는 군주국제도고 미국은 민주제도인 만큼 민주국제도가 우리나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고로 그것을 깊이 이해하도록 노력하겠다."[364] 같은 날인 6월 7일 이승만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책임제와 임정 계승을 언급하였다. "현재의원 형태(내각책임제)로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고 본다."[365] 1948년 6월 22일 헌법기초위원회는 국무원책임제를 대통령임기제로 하는 번안을 가결하였다.[366]

1948년 7월 10일 김구는 제2차 남북연석회의는 서울에서 개최하자는 회한을 평양에 보냈다.[367] 그런데 7월 13일 평양방송은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7일간에 걸쳐 평양시에서 전반 회의에 참가한 남북제정당사회단체 참가하에 제2차 남북연석회의가 재개됐었으며, 결정서를 만장일치로 채택 발표하였다'고 보도하였다.[368] 7월 19일 기자회견에서 김구는 기자의 "제2차 남북협상을 서울에서 개최코자 미군정 당국의 협력을 요청한 바 있었다는데 사실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그러한 일이 있고 없는 것을 모르겠다"라고 답하였다.[369]

1948년 7월 19일 김구·김규식은 제2차 남북협상의 독단성과 졸속성을 비난하면서 제1차 남북협상의 이행을 촉구하였다. "최근의 신문보도에 의하면 이것으로 보아 우리는 괴이치 아니할 수 없다. 그 회의(제2차 남북협상)가 일반의 독단일뿐 아니라 그 참가단체로 보더라도 제1차 남북협상의 남한을 대표하여 참가한 정당 사회단체 41개에 비하여 과연 寥寥無幾 있다. 그래도 이것이 민의에 의한 통일이라 주장하면서 인민회의라는 것을 통하여 그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헌법에 의하여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국기까지 바꾸었다. 물론 시기와 지역과 수단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반조각 국토 위에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는 일반인 것이다. 그로부터 남한 북한은 호상 경쟁적으로 국토를 분열하여 동족상잔의 길로 나갈 것이다."[370]

1948년 7월 21일 김규식과 함께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김규식와 공동 주석에 추대되었다.[371] 김구는 반공주의자였고 김규식 또한 반공적이어서 두 사람은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북의 정부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372]

1948년 7월 28일 통일독립촉진회는 제2차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勤民 民獨 新進 社民 勤大 朝農 등 각 당의 참가를 거부하였다.[373]

김구는 차남 김신을 시켜 상하이쓰촨성 충칭에 있는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의 시신을 발굴하토록 하였다. 1948년 8월 8일 부인과 장남의 유골이 환국하였다.[374]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하고 정릉 가족묘지에 안장했다.[375][376] 어머니 곽 여사의 유골을 정릉 뒷산에 안장할 때 기수들이 기마의 장대 역할을 맡아 운구차를 호송해주었다.[377]

1948년 8월 25일 통일독립촉진회는 25개 정당·사회단체 명의로 제2차 남북협상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378]

여수·순천 사건 당시 (1948)편집

1948년 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조선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948년 10월 19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여수·순천 사건의 경위와 성격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하고 반국가적 반란군을 책동하여 일으킬 책동을 하였다. 불행히도 군정이양전이 되어서 그 가운데 그 중 오동기란 자가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소령으로 승진하여 여수연대장에 취임하였다. 이 자는 여수에 가서 소위 하사관 훈련의 기회를 포착하여 단순한 하사관들을 선동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극우진영인 해외와 국내의 정객들과 직접 간접으로 연락하여 가지고 러시아 10월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전국적인 기습 반란을 책동하였다." "천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의 패악은 물론 여기에 국가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하여 죄악적 행위를 조장시키고 사리(私利)를 위해 합한 것은 가증한 일이다."[379]

이범석은 극우진영, 즉 한국민주당을 지목하였지만 이를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구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1948년 10월 27일 여수·순천 사건 진압 직후 김구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였다.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금번 반란을 우려하고 있다. (중략) 현재까지의 당국 발표에 의하면 반란무리의 목적은 북한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후략)"[380] 같은 날 10월 27일 한국민주당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금번 반란의 주요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신신훈련(神神訓練)의 결핍에 있다고 논하였다.[380] 김구는 본인이 극우가 아니라 해명했고 민주당은 그저 정부를 탓했다.

1948년 10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전남지구 반란사건 배후관계에 관하여 전번 李국무총리는 극우진영과 좌익계열의 합작이라고 말한 바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사실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번 반란사건에 있어서 국무총리로부터 일부 극우분자와 좌익계열의 합작이라고 말한 데 대해서는 좌익계열이라고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 극우분자라고 한 데 대해서는 국무총리로부터 이에 대한 해명이 있을 줄로 믿는다"라고 답하였다.[381]

1948년 10월 30일 김구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방화·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금번 여수·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 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 처지지 아니할 수 없다."[382]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한국민주당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이범석의 발표 때문에 인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계속 주장하였다.[383]

민족진영 재결합의 노력 (1948~1949)편집

 
김구 (1949년)

한편 1948년 초 남한 단독 총선거와 남북협상 문제로 인해 틀어졌던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의 관계는 우여곡절을 거쳐 점차 회복되었다.1948년 초 단선단정론과 남북협상론의 노선 차이로 인해 틀어졌던 이승만김구·김규식의 관계는 우여곡절을 거쳐 점차 회복되었다. 한편 단선단정 노선 하에 반 년 가량 연대하던 이승만한국민주당의 관계는 1948년 7월 대한민국 초대 내각 인성 과정에서 이승만김성수 천거를 무산시키고 한민당계를 내각에 배제함으로써 파탄이 났다. 1948년 5월 29일까지만 해도 김구는 "당분간 이승만과의 합작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384] 이어 8월 14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하루 앞두고 김구는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라며 "강력한 통일독립운동을 추진하자"고 하였다. 반면 김규식은 점진적 통일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385]

1948년 9월 6일 장제스이승만김구·김규식의 합작을 희망한다고 밝혔다.[386]

1948년 11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336]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제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에서, 대한민국 정부(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1948년 12월 15일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3영수 합작운동 태동이 보도되었다.[387]

1948년 12월 16일 김구는 "금번 유엔에서 대한민국정부가 48 대 6이라는 절대 다수로 승인되었는데 금후에 있어서도 법통을 주장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세계 각국이 모두 현정부를 승인하였다고 하더라도 현재 분열되고 있는 만큼 법통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법통을 강조하였다.[388]

1949년 1월 1일 김규식이 신년인사차 경무대이승만을 방문하였다.[389]

1949년 1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남북협상에 대해서 일부 인사들이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피력하면서 북한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맹약 파괴에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390]

1949년 1월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336]

1949년 1월 7일 이승만은 기자의 "유엔위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민족진영 단결, 특히 3영수 합작공작이 진행되고 있다 하는데 어느 정도 진척을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나는 민족진영이 합작되지 못한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自初에 총선거와 정부수립에 이의를 부친 몇 단체들이 있어 안으로서는 민간에 의혹을 주고 밖으로서는 혼란한 상태를 표시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문제가 다 충분히 해결되니 만큼 아무리 장애를 부치려는 분들이 있을지라도 많은 손해를 끼칠 수 없을 것이요, 필경은 그분들의 입장만 곤란하여 질 것이다. 그리고 3영수합작문제에 있어서는 전에도 말한 바 있었지만 나 한 사람의 사정으로는 두 분 인도자(김구·김규식)에게 조금도 간격이 없고 다만 합작 여부는 그 주장하는 의도가 공개적으로 합의되어야 할 것이니 서로의 의도가 다 같은지 아닌지는 민중의 공정한 판단을 따라야 할 것이다."[391]

1949년 5월 19일 덕수궁에서 이승만김구가 회동을 하였고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재결합이 가시화되었다.[392] 5월 20일 김구는 "일반국민들이 3영수의 재합작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현 시국에 비추어 있음직한 일이나 본래부터 대통령(이승만)과 김박사(김규식)와 나의 사이에는 별반 간격은 없었던 것이므로... (중략) 과거 우리들의 노력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과 공간은 차차로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합일점으로 도달케 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중략) 대통령과 金박사와는 앞으로도 종종 만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하였다.[393]

한편 김구는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제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서거 (1949)편집

피살편집

 
경교장에 안치된 김구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김구는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격에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394] 생전에 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394]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하였다.[395] 며느리인 안미생의 권고도 있었다 한다.[395] 6월 26일 사망하자 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395]

김구가 피살된 1949년 6월 26일, 이승만은 저녁 9시가 넘어서 서울중앙방송국 방송을 통하여 애도방송을 하였다. "...나와 백범 선생 사이의 사분(私分)으로 말하면 호형호제하고 의리는 실로 사생을 같이하자는 결심이 있던 터이며, 임시정부 주석으로 내가 절대 지지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가 귀국했을 때에 나는 무조건하고 지지하여 온 것입니다. 중간에 와서 정치상 관찰의 약간 차이로 말미암아 정계에 다소 의아하는 점이 없지 아니해서 우리 두 사람이 양편으로 시비를 듣고 있었으나 내가 믿고 바라기는 백범 선생이 조만간에 나의 주장하는 것이 아무 사심이 아니요 민국 대계에 유일한 방침으로 각오될 날이 있을 것을 믿고 있었으며, 근자에 와서는 이런 희망이 점점 표면에 나타난 것을 보고 나는 마음에 기뻐하는 중인데 졸지에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어공어사에 원통한 눈물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후략)"[396]

이승만은 남북통일에 앞서서 민족진영을 재결합하는 데에 실패했고, 반민특위는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이득을 본 것은 오직 공산당과 친일파와 민주당이었다.

경찰은 암살자가 자신의 동료로부터 김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행동을 강행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한민국 경찰은 암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외부에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397] 6월 27일 이승만 정부는 김구의 죽음이 그의 한국독립당 내에서의 의견 분열 때문이었다고 비판했다.[397] 그러나 정부의 한 고위 인사는 김구의 쿠데타 미수를 발설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하여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라고 보도했다.[397]

장례편집

1949년 6월 27일 김구의 장례는 국민장이 결정되었다. 이날 오후 5시부터 김규식·최동오·조소앙·안재홍·명제세 등이 회합하여 '고백범김구선생국민장의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는 오세창, 부위원장에는 김규식·조완구·이범석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묘지는 김구의 유언대로 효창공원 3열사묘 서록에 안치하기로 되었으며, 장일은 7월 5일로 결정되었다.[398] 이승만 부부는 7월 4일 오전 9시 40분경 조문하였다.[399] 김구의 국민장광복 이후 3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253]에 이어 두번째 국민장이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국민장이었다. 조가(弔歌)는 시인 이은상이 지었다. 행진곡은 쇼팽장송행진곡을 다단조로 연주하였다.

1949년 7월 5일 새벽 1시경 경교장에서 결관식(結棺式)을 가진 뒤, 오전 10시 30분 운구가 경교장을 출발, 오후 12시 ­서울운동장에 도착하여 영결식을 갖고, 오후 3시 발인을 하였다. 오후 4시 50분 장지인 효창공원에 도착하여 오후 5시 하관하고 오후 6시 폐식하였다. 1949년 7월 5일 오후 6시 30분경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400]

암살의 배후편집

김구의 암살 배후는 미궁이다. 안두희6.25 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국회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민주당 김준연,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 소위 88구락부가 암살을 주도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한때 백의사의 소행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였던 백의사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라는 점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401]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에 의하면 염동진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김구의 비서로 지냈던 선우진은 김구의 암살에 백의사의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염동진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으며 명백한 오보라며 반론하였다.[402][403][404] 실제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황상 염동진이 지시했다는 가능성은 전무하다.

사후편집

 
김구의 묘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 《도왜실기》, 《백범어록》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도 둘째 아들 김신은 계속 대한민국 공군으로 복무하였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공군 중장으로 퇴역한다. 한편 미국으로 떠난 맏며느리 안미생미국인과 재혼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 행방은 미상이다. 안미생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한 손녀딸 김효자 역시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범김구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60년 고정훈 등에 의해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에 의한 암살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창숙 등에 의해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암살범 안두희(安斗熙)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1963년 서울특별시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405]

1998년 백범기념관이 준공되어 2002년 10월 22일에 건립되었다.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원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 이승만이 또 다른 후보로 등록되어 논란이 일어나자 10만원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406][407]

2009년 6월 26일 소지품인 회중 시계, 유묵 작품 3점, 인장(印章) 3점 및 피살 당시 착용한 혈의(血衣)가 등록문화재 439~442호로 등록되었다.

평가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독립운동가편집

일제 강점기 당시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성사시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린 것을 높이 평가된다. 김구는 이념을 내세워 분열시키는 냉전세력을 비판함과 함께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독립국가를 모색했다는 점, 민족과 인류의 현실을 고려하여 문화국가가 되기를 주장했다는 점 등에서 높이 평가받는다.[408] 그러나 이는 반탁투쟁과 반공주의 확산에 기여한 뒤에, 뒤늦은 행동이었다는 부정적인 시각들도 존재한다.

1999년 한겨레21이 실시한 '20세기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설문조사에서 백범은 가장 많은 사람이 꼽은 인물이었다. "사상가라기보다 정치지도자에 가까운 백범은 역사 속에서 민족자주를 위한 실천을 치열하게 전개한 점에서, 많은 응답자들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정화"라는 평가를 받았다.[409]

단국대 사학과 교수 한시준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많은 지도자가 있었고 군대 편성 계획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현시킨 이는 김구 뿐"[410] 이라며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만들어 낸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410] 중국 푸단(復旦)대 교수 쑨커즈(孫科志)는 "혼란스러웠던 중국에서 정치적 난민에 가까웠던 한인 사회를 유지하고 임시정부 등 독립 운동의 기반을 갖춘 것은 김구의 면모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보았다.[410]

2006년 9월 22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3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410] 이 학술대회에 참가한 한국과 중국의 학자 12명은 김구에 대해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410]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백범은 민족의 독립만을 생각한 지도자”라며 “청년시절부터 동학, 불교, 기독교에 차례대로 귀의한 것은 모두 독립을 위한 힘을 모으려고 했기 때문[410]”이라고 봤다. 대학교수 리영희는 김구의 장례식때 울려 퍼진 추도곡을 반세기 넘게 기억하며 추모하기도 했다.

박용만(1924)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411]

외교력편집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신용하는 “당시 장제스(蔣介石)를 설득해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한 것은 백범 외교의 진가”라고 평가하였다.[410]

이승만을 통해 미국과도 외교관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평가도 있다. 단국대 교수 한시준도 “백범이 광복군의 연합군 OSS부대 참가를 주도한 것은 승전 후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려 한 것”이라며 “이는 백범이 외교에서 상당한 전략을 구사했음을 보여 준다”고 평가하였다.[410] 중화민국 장제스 정부에서 임정에 대한 지원을 줄이자 그는 이승만과 함께 임정미국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당대의 여론편집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18%의 득표로 33%의 여운형, 21%의 이승만에 이어 3위에 기록되었다.[412]

1945년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293명이 김구를 지목하여 2위로 집계되었다.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56표를 얻어 4위였다.[412]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702표로 전체의 10.5%를 확보했다.[412]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568표로 2위를 하였다.[412]

부정적 평가편집

백색 테러편집

김구가 해방 이후 한국인 정치가들에 대해 대해 백색 테러를 했다는 평가가 있다.

김구는 임시정부 정치공작대를 조직하여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의 지도자 및 관료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백의사가 북한의 관료였던 강량욱을 암살하고자 할 때 죄없는 아들, 딸, 친구 목사까지 죽게 만들었다. 강량욱은 고위관료여서 민간인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희생당한 강량욱의 가족, 친구는 민간인이므로 강량욱의 집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은 백색테러라 볼 수 있다고 하였다.[413]

친일파 출신 김성수의 절친인 송진우, 친일파 출신 장덕수민주당 요인들이 암살되었을 때 김구가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단, 송진우를 암살한 한현우와세다 대학을 졸업 후 일본에서 지하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송진우를 돕던 자로 김구 및 한국독립당과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장덕수를 암살한 박광옥, 배희범, 김석황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다.

권위주의편집

권위주의적인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남로당 출신 박갑동은 "경교장에 가서 만나면 언제나 김구 선생은 한복차림으로 있었다. 내가 김구선생과 얘기하고 있을 때 비서가 와서 외출하자고 하니까, 바지저고리 차림의 김구 선생이 일어섰다. 그러면 비서가 두루마기도 입혀 주고, 모자도 씌워 주면서 문도 열어주는데,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비서가 구두도 신겨 주고, 손에다 지팡이를 쥐어 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선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414][415] 당시 박갑동은 해방일보 기자 자격으로 경교장, 한국독립당, 한민당, 수도경찰청 등에 출입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방북시에도 숙소에서 여자 접대원들에게 "야!"라고 불렀더니 그들이 못들은 체 한 것이다. 김구가 화가 나서 "왜 부르는데 대답을 안하나?"라고 묻자 접대원들은 "저희는 그렇게 습관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몰랐습니다."라고 답했다.[414][416]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서 명령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하는 것이 근본 문제”라는 위계서열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물의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정연하게 배열돼야 했고 이것을 거스른다는 것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순종과 직분을 통해 조화로운 세상의 구현을 추구했으며 그에게 좌파의 평등주의는 이 조화를 해치고자 하는 일시적 풍파일 뿐이었다.[417]

정치적 실패편집

제1대 내무부 장관과 13대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동산 윤치영은 김구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호되게 비판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백범의 명분은 옳았지만 이것은 우리 가슴에 칼을 내지르는 소리요. 결과적으로는 백범 망신에 그치고 만 것이 다행이지, 만약 그때 남북합작(南北合作)을 한다고 덤볐다가는 나라가 망했을 것입니다."[418] 윤치영은 '백범 선생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418]

윤치영은 또 김구 생전에 그가 임정의 이름을 팔아먹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YMCA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윤치영은 연단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평양 일방 남북회담을 적극추진하고 있는 김구를 지적, 중국으로부터 귀국 시에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도장을 찍고 돌아왔으니 그는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다 라며 성토하였다.[419]

동시대 인물들에 의한 평가편집

이범석은 자신의 회고록 《우둥불》에서 우남과 백범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우남 이승만 박사는 반조각 이나마 자유민주국가를 만들어 놓은 공이 있다. 이에 대해 끝까지 대의명분론을 주장하면서 민족통일을 관철하고자 오직 소신대로 나간 분은 백범 김구 선생이다. 그런 까닭에 이 박사는 마침내 현실의 정치가로 일어섰고, 백범 선생은 이상의 정치가로 주저앉게 됐다."[420]

김영삼은 "김구는 이루지 못한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였다"라고 평가했다.[421]

논란과 의혹편집

뉴라이트 교과서 내 김구 "항일 테러활동" 용어 논란편집

2008년 5월 26일 뉴라이트는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출판하였다. 이 책에는 김구에 대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 테러활동을 시작하였다"라고 기술되었는데, 역사학계가 '의열투쟁'으로 부르고 일반인들이 '독립운동'이라고 여기는 김구의 활동을 "테러"라고 표현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논란이 있었다.[422]

치하포 사건 논란편집

1896년 3월 9일 김구는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했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22], 계속 민간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당시 일본의 기록이나 조선의 기록에서도 쓰치다 조스케가 군인이라는 내용은 없다. 199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은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소속 상인 이었다고 주장했다.[423]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부분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424]

2003년 11월김완섭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 공청회에서 “김구 선생은 ‘민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배포 하였다. 또한 그는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내용의 인쇄물도 배부하였다. 문건을 받아 본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즉석에서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는 이를 근거로 검찰에 들고가 그를 고소했다.[425]

2004년 7월 검찰은 공소장에서 “김구 선생이 1896년 10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를 처단한 뒤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고 밝혔다.[425] 이어 그는 서울고검으로부터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다. 서울고검 정현태(鄭現太) 검사는 7월 27일 그를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소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작가 김완섭씨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언론에 밝혔다.[425] 또한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한 바 있다. 서울고검의 검사 정현태는 김완섭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국가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밝혔다.[426]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 당시 김립 암살 논란편집

1922년 2월 11일상하이의 거리에서 김구의 부하인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이 김립을 암살했다.[48]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김립코민테른레닌에게서 지급받은 자금으로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였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국인, 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다. 그러고서 자기는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427]

박노자는 이 사건에 대해 "레닌 정부의 바람대로 김립과 그 동지들이 세 차례에 걸쳐 수만루블의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어렵게 운반해주어 한·중·일 좌파 혁명가들의 사업비로 쓰게 했지만, 그 자금이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우파적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반병률김립의 ‘횡령 행위’가 사실이라기보다는 공산당을 적대시하던 정적들이 유포한 뜬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김립이 축첩을 했다는 김구의 주장에도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48]

레닌 자금이 실질적으로는 이동휘 계열만을 위해 지급된 것이었을지라도, 표면적이자 공식적으로는 분명히 임시정부를 위해 지급된 것이었다. 애초에 이동휘도 레닌 자금이 자신들의 독점임을 주장하지 않았다. 이동휘는 임정의 문책을 받자 임정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여 레닌 자금을 확실히 독점하는 길을 택했다.

민주당 3당수 암살 또는 암살미수 배후 의혹편집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 암살 당시 미군정은 김구를 암살의 배후로 봤다.[196] 그러나 1946년 4월 9일 경기도경찰부는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을 체포하였는데, 이날 경찰은 한현우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송진우를 돕고 있던 자인데 그의 지휘하에 유근배, 김의현이 권총을 발사하여 송진우를 암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197][198]

1947년 12월 2일 장덕수가 암살 당하자 미군정은 김구를 암살의 배후로 봤다. 수도경찰청장 겸 경기도경찰청장 장택상은 김구를 체포하려 했다. 장택상에 의하면 '설산 장덕수 암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암살의 배후에 김구 씨가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범의 지지파 내지는 임정측이 관련된 혐의가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내려고 하였다.'고 했다.[428] 장택상은 여차하면 김구의 소환까지도 검토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하지 중장이 이를 저지시키고 말았다. 장택상에 의하면 '그리고 이 사건을 군정 재판에 넘기고 말아서 우리(군정청 경찰)는 끝내 손을 못 대고 말았다. 평소 모든 사건을 매서웁게 처리하는 나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하지 중장은 혹 김구 씨에게 무슨 화가 가지 않을까 염려가 된 나머지 이와 같은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라고 했다.[428] 허정은 장덕수 암살이 임정의 소행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차마 김구 주석에게는 가서 따지지 못하고 소년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조소앙을 찾아가서 따졌다.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허정은 조소앙을 찾아가서 "왜 설산을 죽였소"라며 따졌다. 구미위원부에 10년간 근무했던 허정은 한인애국단과 이봉창, 윤봉길 거사를 준비하는데 조소앙이 기여한 점을 근거로 조소앙을 찾아갔던 것이다. 허정은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피했다. 허정은 "너털웃음으로 숨길 수 있을 줄 아시오? 끝내 속이지는 못합니다."라고 외치고는 뛰쳐나왔다.[429]

1947년 11월 28일 호남선 열차에서 친일파 출신 국회의원 김성수가 암살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430] 미군정은 김구를 암살미수의 배후로 봤다.[431][432] 그러나 1947년 12월 23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조선해양청년단(朝鮮海洋靑年團) 소속의 백영기(白英基), 문균석(文均錫) 등이 여운형 피살 사건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김성수조병옥을 노렸던 거라고 밝혔다.[430] 김성수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한국민주당은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431][432]

흑함운동 배후 의혹편집

1946년 11월 3일 38선 이북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때 월남했던 반공세력이 일부다시 월북하여 선거방해를 도모하였다. 김일성은 이를 이승만과 김구가 배후에서 조종한 짓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이들의 방해로 선전대원 몇 명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선거가 비민주적이다”, “승려들과 목사들은 선거하지 말라”, “공동후보가 아니라 자유경쟁” 등으로 선거에 비판적이었고, 유권자들에게 선거에서 찬성하면 흑함에 넣으라는 흑함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하여 김일성은 인민의 원수이며 반동파들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간첩배가 된 세력으로 몰았다. 김일성은 선거기간에 생산기관의 방화, 운수부분에서 충돌사건, 주요 인사의 암살미수사건 등이 반동세력의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였고, 나아가서 북한에서 일어난 방화를 이승만과 김구가 파견한 방화단으로 규정하였다.[433]

남북협상 참여 논란편집

1948년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가 민족의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한 행동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남북협상이 북한에게 '합법 정부'를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실제로 북한은 남북협상을 근거로 1948년 5월 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였다.[356]

또한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가 순수하지 않은 정치적 전술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승만과의 경쟁에서 패배해 모든 정치적 전망이 사라진 시점에서 새로운 정국 반전을 노린 것이라는 것이다.[417]

사상과 신념편집

민족주의편집

김구는 민족의 적을 북한인민이 아닌 북한군, 노동당, 북한정권이라고 봤다. 그래서 북한수뇌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백의사 등을 통해 김일성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론 민족의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김일성남북협상을 갖기도 했다.

반공주의편집

그는 공산주의를 일종의 독재체제로 이해하였다. 김구는 《백범일지》 상·하편 뒤에 붙은 〈나의 소원(1947)〉 제2장 '정치 이념' 에서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비판하며 자신의 반공주의 사상을 강조하였다.[434]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수백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 학문, 사회생활, 가정생활, 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중략)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통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로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417]

자유주의편집

《백범일지》 중 〈나의 소원(1947)〉 제2장 '정치 이념' 에서 김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434]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임정법통론편집

김구이승만대한민국 임시 정부 계열 우익인사들은 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 임정법통론을 제기하였다. 현대의 임정법통론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본디 임정법통론일본 제국, 창조파, 개조파, 조선민족혁명당, 내각책임제 등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한 이승만김구의 주된 주장이었다.[435][436][437]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할 때 임정 대통령 이승만김구 등은 임정고수파 입장에 섰다.[438][439]

1927년 신약헌에 의한 국무 위원제의 국무위원회가 채택된 이후 김구는 그간 4년간의 정부 예산 집행의 결산서(決算書)를 무더기로 의정원 의장 앞으로 제출하였다. 자금난과 독립운동가들의 이탈, 변절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간판을 지키고 임정의 법통을 수호해 나갔다.[65]

조선민족혁명당의 결성에 앞서 임시정부 해체론이 제기되자, 1935년 5월 19일 김구는 '임시의정원 제공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임정 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한 경고문을 발표했다.[143][144][145]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패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승만미국스위스 등을 무대로 일본 제국이 망하는 즉시 한국이 일본 제국에게 빼앗긴 주권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미국 등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정식 승인해야 된다는 외교활동을 광복이 올 때까지 계속하였다.

1946년 1월 8일 임정은 1941년에 이미 채택, 공포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440]

1947년 3월 1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국민의회의 임정 법통을 승인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봉대한다고 결의하였다.[441]

1948년 6월 4일 제헌 헌법 초안이 발표되자,[363] 6월 7일 김구내각책임제를 거론하는 현 국회는 임정 법통 계승과 무관함을 시사하였다. "대통령을 군주같이 앉혀놓고 수상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비민주제도일 것이다. 민중이 대통령을 전출한 이상 모든일을 잘하던지 못하던지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일을 하여나가야 할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사리에 맞지않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영국과 일본과 같은 제도는 군주국제도고 미국은 민주제도인 만큼 민주국제도가 우리나라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고로 그것을 깊이 이해하도록 노력하겠다."[364] 같은 날인 6월 7일 이승만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책임제와 임정 계승을 언급하였다. "현재의원 형태(내각책임제)로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고 본다."[365] 1948년 6월 22일 헌법기초위원회는 국무원책임제를 대통령임기제로 하는 번안을 가결하였다.[366]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제1호(제헌 헌법)에는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명시되었고,[442] 제헌 국회 의장 이승만은 국회개원식 축사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계승을 확실히 밝혔다.[443]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함을 천명하고 연호를 '민국 30년'으로 기산하였다.[444]

1948년 12월 16일 김구는 기자의 "금번 유엔에서 대한민국정부가 48 대 6이라는 절대 다수로 승인되었는데 금후에 있어서도 법통을 주장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세계 각국이 모두 현정부를 승인하였다고 하더라도 현재 분열되고 있는 만큼 법통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법통을 강조하였다.[388]

훗날 1962년 12월 26일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제6호에는 제헌 헌법 시기부터 전문에 수록된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부분이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이라고 바뀌었다. 이는 박정희를 위시한 군부 쿠데타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박정희 정부는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크게 선양하였다. 1962년, 1963년, 1968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오늘날 김구 등 우리가 아는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에게 대대적으로 건국훈장을 서훈하였다. 또 한편 박정희 정부가 헌법에서 임정법통론과 관련된 부분을 없애자 장덕수 피살 사건 이후 임정봉대론을 철회했던 민주당계 정당보수정당보다 오히려 더 임정법통론(그들 입장에선 임정봉대론)에 적극적이게 되었다.[445][446][447]

1987년 10월 29일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제10호에는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 부분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이라고 바꾸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직접 명시하였다.

애국가에 대한 관점편집

애국가가 윤치호가 짓고 안창호가 일부 개사했다는 소문은 1920년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이에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448]'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448]'고 반박하였다.

기타 일화편집

1947년 백야 김좌진의 추모회에 참석한 김구는 김좌진의 추도사를 했다.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449]

김구의 '구(九)'와 호 '백범(白凡)'의 유례편집

김구는 자신의 호인 백범의 유래에 대해서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1912년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34]

이승만과 김구편집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승만과 김구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낙방 후 이승만은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던 중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김구는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 28세 때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이승만과 김구 모두 우파였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중화민국(대만) 노선으로 갔다.[450]

이승만과 김구는 1920년 12월경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임시 대통령과 경무국장의 관계로 첫 대면을 하였으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서른여섯 살 때인 1912년부터 투옥 시절 '감옥 선배' 이승만을 흠모했다고 고백하였다. "서대문 감옥에는 역대의 진귀한 보물이 있다. 지난날 이승만 박사가 자기 동지들과 투옥되었을 때에 서양인 친구들과 연락하여 옥중에 도서실을 설치하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진귀한 서적을 구입하여 5~6년 동안 (중략) 강연했다. 그 가운데 이 박사의 수택(手澤·손때)과 누흔(淚痕·눈물 자국)이 얼룩진 책자를 볼 때 배알치 못한 이 박사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無限)의 느낌이 있었다."[451]

이승만과 김구는 서로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공석에서도 김구는 이승만한테 '형님'이라는 소리했을 정도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 한편 김구도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1946년 모친 곽낙원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뒷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하며,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 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452]

1947년 12월 2일 장덕수 피살 사건 이후 이승만과 김구가 결별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오히려 김구가 장덕수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정에 출석하자 1948년 3월 8일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312]

윤경빈에 의하면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냐 '남북 통일 정부 운동'이냐 노선을 두면서 이승만과 김구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453] 이 갈등조차 1949년 5월 19일 이승만과 김구의 회동을 거치며 봉합되고 있었다.[454] 1949년 5월 20일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반국민들이 3영수의 재합작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현 시국에 비추어 있음직한 일이나 본래부터 대통령과 김박사와 나의 사이에는 별반 간격은 없었던 것이므로... (중략) 과거 우리들의 노력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과 공간은 차차로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합일점으로 도달케 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중략) 대통령과 金박사와는 앞으로도 종종 만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455] 그러나 한 달 후인 1946년 6월 26일 김구의 피살로 인해 화해의 결실을 맺진 못하였다.

안공근과의 결별편집

1939년 5월 30일경에 발생한 안공근 피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는 첫번째는 일제 밀정이다. 당시 상해에서 일제의 간첩 공작이 매우 활발했고,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원으로서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여 일제의 주요 목표물이었다. 두번째는 중국계 마적인 나검북(羅劍北)에 의한 암살설이다. 세번째는 오영섭이 제기한 김구계에 의한 암살설이다.[456] 도진순도 김구계에 의한 암살 가능성을 크게 보았다.[457] 단 김구계가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며, 김구가 안공근 암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1934년 1월 2일 김해산은 "나는 몇 년전에 위혜림과 한국인 安恭根이 대공원(The Great World Amusement Resort) 근처에 도박장을 설립하자는 한 광동인의 술수에 수천달러를 사기당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고 진술하였다.[458]

1935년 11월 하순 김구파는 임정의 당권을 장악한 김원봉파에 대항해 한국국민당을 창립했는데, 한국국민당은 김구를 중심으로 결속이 견고한 편이었지만 내분이 있었다. 그 원인은 대체로 김구의 비서격인 안공근의 인색함과 그의 전횡 때문이었다. 한때 김구의 팔다리로서 무장투쟁을 전담했던 김동우(金東宇) 즉 노종균(盧鐘均), 주효춘(朱曉春) 또는 양여주(楊汝舟) 즉 오면식(吳冕植), 한도원(韓道源) 등의 유력분자는 이에 극도의 불만을 품고 1936년 1월 초순 잇달아 난징(남경)을 탈출하여 상해에 잠입하였다.[459]

1937년 10월경 김구는 일본군이 점령한 난징에서 형수(안중근의 처)를 모셔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안공근을 심히 질책하였다. 《백범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안공근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 이로써 안공근은 김구와 결별하고 단독활동을 시작했다.[460]

1938년 2월 임정을 따라 후난성(호남성) 창사(장사)로 이동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안공근·안경근을 홍콩에 파견해 안정근·안우생·김인과 동지 규합과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다.

1939년 5월 안공근중국 국민당을 통해 가족들을 데리고 충칭(중경)에 거처를 잡고 유진동(劉振東) 내외와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며칠 뒤 충칭(중경)에서 실종됐다. 훗날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은 "당시 한인 청년들이 충칭에서 개업중인 한인 의사 유진동(劉振東) 선생의 병원으로 안공근 선생의 시신을 들고 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461]

1939년 10월 3일 임시 의정원 제31회 정기회의에서 안공근은 의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의원 안공근은 그의 종적이 묘연하야 도원(到院)할 가능이 없다고 인정됨으로 그의 의원자격이 상실되는 것으로 인정하기로 결의하다"[462]

1940년 2월 1일 안공근임시 의정원에서 제적되었다.[463]

경교장 생활편집

김구 비서 선우진의 증언으로는 경교장 생활은 전혀 풍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우진은 정기적으로 얼마씩 수입이 들어오는 형편이 아니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돈과 관련된 일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탓에 자연 김구를 모시는 이들의 생활도 여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1946년에 상공회의소 부회장 강익하가 300만 원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그 돈을 받지 않고, 이승만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이승만에게는 이미 500만 원을 보냈고, 상공회의소 공의(公議)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김구는 이승만에게 전달하라고 했다.[414][464][465]

한미호텔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의 형편이 어려워 점심을 굶는 일이 많게 되자, 주위에서 김구에게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승만에게 돈을 부탁해 보라고 했다고 한다. 김구가 마지못해 돈을 부탁하러 돈암장을 찾았는데, 이 박사가 난색을 표해서 그냥 돌아왔다는 의견도 있다. 조완구 선생과 엄항섭이 다시 김구에게 어려운 형편을 말하자 김구는 이 박사를 다시 찾아가 30만원을 얻어 한미호텔에 있던 요인들의 경비로 사용했다. 선우진에 의하면 김구를 수행하여 돈암장을 방문했는데, 이승만은 “남들은 모두 내게 돈을 주는데, 백범은 내게서 돈을 가져가는구먼”하며 입을 실룩거렸다고 하며, 김구는 아무 표정 없이 돈암장을 나섰다고 한다.[414][464]

한편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상해 시절에 대한 증언으로 안공근과 감정이 있었던 백찬기는 “김구파의 간부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나와 같이 병으로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는 의료원으로 가라고 여비 정도만 주어 쫓아버리는 식”이라며 비판하였다.[464][466]

백범일지 윤문편집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의 교열과 윤문은 이광수가 하였다. 《백범일지》 판본은 크게 4가지다. 김구가 1929년과 1942년에 탈고한 친필본과 그것을 옮겨적은 필사본 2종, 1947년에 공식적으로 출간된 국사원본까지다.[467] 여기서 말하는 이광수의 윤문은 해방 이후 나온 1947년 책을 말한다. 《백범일지》는 명문장가인 이광수의 윤문이라는 꽃단장을 통해 재탄생했다. ‘국사원본 백범일지’는 처음부터 유려한 문장, 쉽고 간결한 문체로 출발했다. ‘친필본 백범일지’와는 차이가 너무 많은 작품이다.[468] 1994년 백범의 아들 김신이 친필 원본을 공개함으로써 이광수의 윤문과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45년 11월 김구가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출간할 때 이광수가 윤문을 자청했다 한다.[469] 백범일지의 윤문을 허락한 사람이 백범 자신인지, 아니면 백범 비서 등 주변 사람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470] 문제는 춘원이 윤문 과정에서 친필본에 없는 문장을 임의로 첨삭해 원전의 텍스트적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470] 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이광수가 《백범일지》 편찬에 참여한 것을 김구가 알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따르면 “(친일파 이광수가) 속죄하는 심정으로 맡겠다고 하니 시켜보라고 주위에서 백범께 말했다. 김구는 그의 행실(일제 후반에 변절한 것) 때문에 망설였다”[469] 고 한다. 그러나 곧 이광수에게 《백범일지》 윤문을 맡긴다.

둘째 아들 김신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건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는 의문입니다.”(김신 씨의 대담, <신동아>, 1986년 8월, 347쪽.[469])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저서편집

  • 《백범일지》(1947, 국사원): 춘원 이광수가 윤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나의 소원〉: 《백범일지》의 본문 뒤에 실려있는 글로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민족 국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중략)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強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하략)

  • 《도왜실기》(1932, 엄항섭 정리)
  • 《백범어록》(2008, 도진순 주해)

가계편집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자점의 방계 후손인 아버지 김순영은 중풍으로 몸이 불편했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어머니 곽낙원은 중국 중경 거주시,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때 권총을 구입하여 줄 만큼 열심히 아들을 지원했다. 또한 군인 출신 정치인 이후락과도 사돈관계이기도 하다.

김구의 아들 김신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의 후손들은 자손 대대로 공군 장교로 병역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

계보편집

김방경(金方慶)→김순(金恂)→김영후(金永煦)→김장(金藏)→김사형(士衡)→승(陞)→종준(宗浚)→황(璜)→종지(終智)→식(軾)→영손(永孫)→정(鼎)→연후(璉厚)→대충(大忠)→이형(以亨)→윤창(潤昌)→세보(世寶)→언함(彥諴)→상관(尚寬)→정수(精壽)→복원(福源)→영원(榮元)→만묵(萬默)→재하(在夏)→구(九)[471]

가족 관계편집

김구를 연기한 배우들편집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라디오 드라마편집

연극 영화편집

같이 보기편집

관련 서적편집

  • 김구, 《백범일지》(국사원, 1947)
  • 재상해일본총영사관 경찰부 제2과 편, 《조선민족운동연감》 (東文社書店, 1946)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사》(대한민국공보처, 1949)
  •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백범김구전집 1권~13권》(대한매일신보사, 1999)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비운의 역사 현장 아! 경교장》(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편,2003)
  • 김제방, 《이승만과 김구의 대좌》 (한솜, 2005년)
  • 《백범어록(평화통일의 첫걸음, 백범의 마지막 말과 글)》(도진순 역, 돌베개, 2007)
  • 브루스 커밍스, 《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 김삼웅, 《백범 김구 평전》(시대의창, 2004)
  •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연구》 (혜안, 2001)
  •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일조각, 1970)
  •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고하송진우선생전》(동아일보출판국, 1964)
  • 김구, 《백범 김구선생의 편지- 백범학술원총서》(나남출판 편집부 지음, 나남출판, 2005)
  • 김구, 《도왜실기》(엄항섭 역, 범우사, 2002)
  •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석오 이동녕과 백범 김구》 (동방도서, 2002)
  • 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박갑동, 계명사, 1998)
  • 신복룡, 《한국정치사》 (박영사, 1997)
  • 이현희, 《석오 이동녕과 백범 김구》 (일조각, 1999)
  • 이현희,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성》 (동방도서, 1987)
  •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집문당, 1982)
  • 선우진, 《위대한 한국인 제9권 김구 편》(휘문출판사, 1976)
  • 허정, 《위대한 한국인 제11권 이승만 편》(휘문출판사, 1976)
  • 신용하, 《백범 김구의 사상과 독립운동》(신용하 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 정경환, 《백범김구의정치사상》(정경환 저, 이경, 2008.02.28)
  • 한태수, 《한국정당사》(한태수, 신태양사, 1965)
  • 정경환, 《백범 평전》(정경환 저, 이경, 2007)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5》 (국사편찬위원회, 1965∼1970)
  • 교문사, 《백범 김구:생애와 사상》(편집부 저, 교문사, 1982.08.01)
  • 연시중, 《한국 정당정치 실록 1권》(항일 독립운동부터 김일성의 집권까지)(지와사랑, 2001.01.20)
  • 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지성사, 1996.11.01)
  •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 김학준, 《해방공간의 주역들》(동아일보사, 1996)
  • 김구, 《백범 김구선생 언론집 상, 하》(나남출판, 2004)
  • 문용린 외, 《백범 김구의 지적 계발과정 탐색-한 위인의 다중지능 분석보고서》 (문용린 외, 집문당. 2005)
  • 전정일, 《백범 김구 선생 살해범 안두희 그는 누구인가》(전정일 편저, 삼성서적, 1994)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한국사학회, 한국현대인물론 1,2(을유문화사, 1987)
  • 국가보훈처,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인물록》 (국가보훈처, 1992)
  • 윤명숙, 《대한영웅전 1》 (국가보훈처, 1995)
  • 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1999)
  • 배경식,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 (너머북스, 2008)
  •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중심, 2003)
  • 서중석, 《비극의 현대지도자》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2)
  •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3)
  • 김삼웅, 《김구 평전》 (시대의 창, 2004)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1차 득표율 1차 득표수 2차 득표율 2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대 대선 대통령 1대 한국독립당    6.63% 13표   2위 낙선
제1대 부통령 선거 부통령 1대 한국독립당     32.99% 65표    31.47% 62표 2위 낙선

각주편집

  1.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 비운의 역사 현장 아!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003) p.514
  2. 김구지음, 신경림 풀어씀. 《청소년을 위한 백범일지》. 나남. 245쪽. 
  3.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號外(1940. 3. 1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 “1.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및 위원 명단”.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 “2. 각료 · 국무원 · 국무위원 명단”. 《한국사데이터베이스》. 
  6. “3. 부서별 직원 명단”. 《한국사데이터베이스》. 
  7. “국민의회,임정주석에 이승만,부주석에 김구를 추대하고 국무위원을 보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8. “吳世勳 - 《백범일지》 백범 김구 著”. 월간조선. 
  9. 대한민국의 이북5도 행정구역 기준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10.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37P
  1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에 해당한다.
  12. 조선향토대백과 오담리
  13. 김구,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2006) 22페이지
  14. 백범김구기념사업회 - 연보
  15. 계몽사에서 발간한 어린이위인전기 《김구》편에도 김구선생이 어릴적 개구장이여서,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는데, 장난의 정도가 지나쳐서 친척 할아버지가 집에 데려가 며칠간 돌보아주면서 위로할 만큼 호되게 혼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16.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김구 그는 누구인가”. 주간조선. 
  17. 백범일지 상권 참조
  18.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9쪽 참조.
  19.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20.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50~51쪽쪽. ISBN 89-7199-148-8. 
  21.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38쪽.
  22.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90~101쪽쪽. ISBN 89-7199-148-8. 
  23.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피카츄: 돌베개. 98쪽 각주59쪽. ISBN 89-7199-148-8. 
  24. “치하포사건(鵄河浦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5. “연보”.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2020년 9월 7일에 확인함. 
  26. 김구 - Daum 백과사전
  27. 한화(2)-동생 김호연 빙그레회장家 서울신문 2005-08-29 14면
  28.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9. “김구(金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0. “이달 중에 黃海道 信川人 安明根이 裵敬鎭, 朴萬俊, 韓淳稷과 間島에 武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시키려는 계획 하에 黃海道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비밀히 모금 중 누설되어 平壞에서 載寧憲兵隊員에 체포되어 관계자 전원이 구속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 “安明根事件(安岳事件)을 계기로 黃海道 일대의 애국지사를 체포구금한 朝鮮總督府 警務總監部는 다시 平安道 일대의 抗日指導者와 기독교 세력을 일소시키기 위하여 1910년 11월27일 鴨綠江鐵橋 준공식에 참석하는 寺內總督을 암살모의했다는 허위의 사건을 조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2. “한국사 19 근대 - 대한제국의 종말과 의병항쟁 > Ⅲ. 抗日民族運動 > 4. 新民會의 活動 > (4) 105人事件”.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3. “安岳事件의 주모자 安明根 이하 관련자 전원에 대한 판결에서 재판장은 「강도 및 강도미수」죄로 각각 다음과 같이 언도하였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4.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267쪽. ISBN 89-7199-148-8. 
  35.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440쪽쪽. ISBN 89-7199-148-8. 
  36. “조선총독부 관보 제0926호 - 假出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7. 김구 (초판 1997-7-25, 개정판 2002-8-1). 《백범일지》. 경기도 파주: 돌베개. 440~441쪽쪽. ISBN 89-7199-148-8. 
  38. 1918년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
  39. 《백범일지(쉽게 읽는)》 (김구, 도진순 옮김, 돌베개, 2005.11) 211~212쪽.
  40. 《대한민국의 기원》 (이정식, 일조각, 2006) 407쪽.
  41. “1920년 12월, 상하이로 건너간 이승만… 김구를 처음 만나다”. 조선일보. 2019년 4월 3일. 
  42. “한형권, 치타에 도착하여 러시아에서 받은 자금(40만 루불)을 김립에게 전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3. “국제공산당자금사건(國際共産黨資金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4. “大韓民國臨時政府 國務總理 李東輝는 다음과 같이 辭職에 대한 宣佈文을 發表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5.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3 43권 서한집Ⅱ > 해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6. “143. (번역F) 이희경이 임시정부 재무차장 이유필에게 보낸 서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7. “한국독립운동사, 비극과 갈등의 기록”. 독립기념관. 
  48.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한겨레21. 2007년 4월 12일. 
  49. “9) 국민대표회의 해산령”.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23년 6월 6일. 
  50.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샘터사, 1979) 76
  51. “새해 첫날, 나는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은 분에게 갑니다”. 2020년 9월 7일에 확인함. 
  52.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第40號”.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3. 백범김구기념사업회
  54. 매일신문 2011년2월28일자 애국지사 박희광 항일 암살단 활약상, 독립신문서 보도
  55.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8페이지
  5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권 헌법 · 공보 해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7.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이연복 지음, 국학자료원, 2006) 119페이지
  58.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59. 논픽션 龜尾史 .12 박희광, 온몸을 던져 구국의 꽃이 되다
  60.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399페이지
  61. “189. 金九가 李承晩에게 보낸 서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62. “73) 大韓僑民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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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6. “[광복 75주년] ⑩두 차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분단의 길로”. 뉴시스. 
  247. “하지, 미소공위무기휴회에 관해 특별성명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48.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29페이지
  24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55쪽.
  250. “윤봉길 등 7의사의 유해가 일본에서 돌아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46년 5월 15일. 
  251.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추도회 거행, 유해는 서울 태고사에 안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46년 6월 16일. 
  252.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추도회, 김구 등 담화와 安慰式 거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46년 6월 16일. 
  253. “이봉창·윤봉길·백정기 3의사의 국민장 거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46년 7월 7일. 
  254. “독촉국민회, 전국대회 2일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55.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56. ▒ 경인일보 창간 50주년 '도약! 2010'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57.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 특파된 남조선 요인암살대원 8명 검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58. 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213페이지
  259. “김구와 허헌, 정치적 포부 피력”.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60. 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238페이지
  261. “이승만관계서한자료집 1(1944-1948)(대한민국사자료집) > 국내 정치 상황”.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62. “이승만,반탁데모를 경고하는 전문을 민주의원에 송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63. “재미중인 이승만이 민주의원에 보낸 전문 공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64. “전국학생총연맹,탁치반대투쟁사발표대회에서 회색분자소탕 등 결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65. “전국학생총연맹,탁치절대반대와 자주독립완수 등의 성명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66. 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2006) 213페이지
  267. “반탁독립투쟁위원회(反託獨立鬪爭委員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68.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사, 2006) 171페이지
  269.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주최 반탁독립궐기대회 개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70. “반탁독립투쟁위원회위원장 김구, 3·1절을 맞아 정치적 소견 피력”.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47년 2월 28일. 
  271.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6) 529
  272. “비상국민회의 제2차 전국대의원대회 개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73. “김구 등,브라운소장과 임정승인에 관해 의견 교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74. 정경모, 찢겨진 산하 (기획출판 거름, 1986) 51페이지
  275. “이승만귀국환영대회가 거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76. “국민의회내 임정계와 이승만계,임정봉대론으로 의견 양립”.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77. “이승만,과도정부수립과 임정봉대문제에 관해 성명서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78. “金九가 소장으로 있었던 建國實踐員養成所를 해산하기로 결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79. “백범 김구가 세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아시나요?”. 경향신문. 
  280. “한민당,공위참가에 대해 성명서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81. 정해구, 《분단과 이승만:1945~1948》〈역사비평〉제32호 (1996년봄) 275쪽.
  282. “이승만,공위에 대해 성명서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83. “한독당, 공위 참가여부문제로 3당으로 분립”.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84. “우익진영 공위참·불참을 계기로 3파로 분립”.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85. “각지에서 반탁 데모”.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86. “전국학생총연맹중앙총본부 반탁에 관한 성명서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87. “각지에서 반탁데모”.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88. “25일 현재 보고된 각 관구별 반탁상황”.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89. “경무부장 조병옥,반탁시위로 인한 치안상태에 관해 담화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90.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6) 200페이지
  291. 리처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미군정과 남조선》 (정미옥 역, 과학과 사상, 1986) 201페이지
  292. “국민의회, 부서 결정 사항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93.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1쪽
  294. “순국선열추념대회, 서울운동장에서 거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95.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선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96.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
  297.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발족”.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98. “이승만, 민족통일총본부 설치 발표 민족통일선언과 본부임원 결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99.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개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00.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제1회중앙집행위원회에서 부서결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01. “김구선생의견(金九先生意見)에대(對)한 우리의취(取)할바태도(態度)”. 조선일보. 
  302. '방응모 한독당 재정부장' 보도는<조선>의 전형적인 역사 날조 사례”. 오마이뉴스. 
  303. “백범일지 출간 70주년…관련 도서 380여권 한자리에”. 연합뉴스. 
  304.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 피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05. “장덕수살해범 朴光玉 일당 체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06. “국민의회, 장덕수피살사건과 관련 애국자의 검거에 대해 유감표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07. “장택상, 장덕수살해 관련혐의로 한독당중앙위원 김석황 체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08.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로 개칭”.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09. “딘, 장덕수사건진상 등 제문제 문답”.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0. “장덕수 암살사건 1회 공개재판 개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1. “장덕수 살해사건 제5회 공판 개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2. “이승만, 김구의 장덕수살해사건 관련설 일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3. “김구, 장덕수암살사건 8회 재판의 증인심문에서 관련성 부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4. “장덕수 살해사건 9회 군률재판 개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5. “장덕수살해사건 11회 군률재판 개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6. “장덕수살해사건 피의자 8명에게 사형 언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7. “장덕수살해사건 군률재판에 대한 하지의 특별조치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8. “한독당 김구, 단독선거의 분단성 경고”.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9. “이승만과 김구, 독립정부수립에 의견 일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20. “한독당 김구, 정부수립과 민족단결 문제에 관해 담화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21. “한독당 김구, 국내정세에 대해 담화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22. “국민의회와 한국민족대표자대회 합동회의에 대한 집회금지조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23. “한독당중앙집행위원회, 전국총선거참가 결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24. “우익진영 정당단체,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래조에 대비 한국민족대표단구성”.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25. “한국민족대표단 구성에 대해 물의 분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26. “이승만과 김구간에 우익진영 통일 노력 모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27. “국민의회와 한국민족대표자대회, 명년 1월 8일에 합동대회 결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28. “조소앙, 정계사퇴 성명”.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29. “國議와 民代 합동 일단락으로 의장 조소앙, 부의장 명제세 增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30. “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 조선위원단의 북한 입경 정식 거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31. “김구, 유엔조선임위에 보내는 의견서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32. “김구와 김규식, 메논의장에게 남북지도자회담에 관한 서신 전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33. 도진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시대의 정치사》(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334. 김희선 의원, 의성김씨 본관 찾다 실패 동아일보 2004-08-17일자
  335. “김구,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 성명서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36.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7쪽.
  337. “유엔소총회, 조선에서의 전국선거 추진안 가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38. “김구, 3·1기념식에서 남한선거에 불응할 것 천명”.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39.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용어 바로쓰기》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역사비평사, 2006) 172페이지
  340. 김구 (1948년 3월 21일). “조국 흥망의 관두(關頭)에 임하여 남하한 이북 동포에게 기(奇)함”.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341. “이승만, 남북협상찬성은 소련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담화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42.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376
  343. “김구, 남북협상에 임하는 결의 표명”.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44. “김구,북행에 앞서 남북요인 협상의 목표는 오직 통일임을 천명”.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45. “김구, 청년 학생들의 북행만류에 비장한 결의 표명”.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46. “김구 38선을 넘어 북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47. “김구, 평양신문기자단회견에서 38선 제거에 공동노력 역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48.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김학준 지음| 민음사 펴냄 | 2007-10-08) p288
  349.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김학준 지음| 민음사 펴냄 | 2007-10-08) p289
  350. “21일 정오부터 남북협상참가자 38선 월경금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51. (동아광장/윤평중)민족은 主義를 초월하는가 동아일보 2007년 10월 03일자
  352. “남북연석회의에서 통과된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격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53. “남북협상의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격문에 대한 반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54. “이승만, 남북협상의 전도에 대해 논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55. “남북협상에 대한 민족진영 각계 반향보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56. “북조선인민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채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57.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112페이지
  358.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김학준 지음| 민음사 펴냄 | 2007-10-08) p289
  359. “김구·김규식, 남북회담의 성과에 대해 공동성명서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60. 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369페이지
  36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48페이지
  362. 이철승·박갑동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이철승, 박갑동 공저, 계명사, 1998) 367페이지
  363. “헌법초안 발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48년 6월 4일. 
  364. “김구, 현 국회는 임정 법통계승과 무관 시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65. “이승만,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중심제 및 임정계승 등 언급”.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48년 6월 7일. 
  366. “헌법기초위원회, 국무원책임제를 대통령임기제로 飜案 가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경향신문. 1948년 6월 22일. 
  367. “한독당 김구, 2차남북회담 등에 대해 기자회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48년 7월 10일. 
  368. “제2차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협의회 개최에 대한 평양방송의 보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48년 7월 13일. 
  369. “한독당 김구, 1차 남북협상 문답”.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48년 7월 19일. 
  370. “김구와 김규식, 이북에 협상이행촉구 공동성명”.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48년 7월 19일. 
  371. “통일독립촉진회 발기 겸 결성대회 개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48년 7월 21일. 
  372.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