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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와 만년 ===
[[1618년]](광해군 10) 가을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친지의 주선으로 [[안동향교]](安東鄕校)제독이제독관(提督官)이 되고, 동년 겨울 [[상주향교]] 제독제독관(尙州鄕校 提督官), [[1619년]](광해군 11) [[진주향교]] 제독이제독관(晉州鄕校 提督官)이 되었다.
 
주변에서 그에게 농담 삼아 "그대와 같은 고을 사람으로 출세하여 요직에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대는 왜 침체한가", "그 사람들 하는 데로 적당히 따르면 될 일이지 왜 주변 타령인가" 라고 하면, 그는 대답을 않고 양심장을 펼쳐 보였다보여주었다 한다. 그는 [[인수정]]에서 시문과 문인들 양성 외에 [[봉화군]] 도촌리 사제(沙堤)의 명정암(冥酊巖)을 산책하곤 했다. [[1623년]](광해군 15) [[3월]]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 정귄에서 불렀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감곡을 아호로 했다가 뒤에 [[모래]]로 불을 땐다, 늦은 나이에 고생스럽게 일을 해도 얻는 것이 없다는 뜻의 취사라는 호를 지어 아호로 삼았다.
 
고향의 향토사 정리에 뜻을 두어 여러 분야에 걸쳐 사료를 모으고 다듬어 편찬 준비를 해두었으며 [[1625년]](인조3) [[이산서원]]에서 향내 관계 인사의 모임을 주관하여 그 심의를 하고 서문까지 지었으나 간행을 못 보았다. [[1626년]] [[4월]] 다시 진주향교 제독에 임명되었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이 발생하고 [[영천]]에서 의병이 창의하자 이여빈은 아들 성화(成樺),성간(成榦),성재(成材) 등을 창의소로 보내 의병에 가담하게 하였다. [[1631년]](인조 9년) [[9월 28일]]에 질병으로 영천군 용암면 감곡리(현,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인수정]] 정침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나이는 향년 76세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