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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빈(李汝馪, 1556년 9월 11일 ~ 1631년 9월 28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의병장, 학자이자 문신, 시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1591년(선조 24년) 식년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선조 38) 문과에 급제한 후 벽사도찰방으로 나갔다가 1년만에 사퇴하였으며, 통훈대부 성균관 전적(通訓大夫 成均館典籍)에 이르렀다. 이황, 이언적문묘종향을 반대하는 이이첨, 정인홍 등을 공박하여 규탄하기도 했다. 또한 대북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 사사 여론을 조성할 시, 그는 전은설(全恩說)을 주창, 전은소를 지어 올리고 인목대비 폐모와 영창대군 사사의 부당함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인수정에 우거하며 시문과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후 영주향교, 안동향교, 진주향교의 제독 등으로 활동하다가 만년에 인수정을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625년(인조 3)부터는 영주의 향토지인 영주지를 집필했으나 간행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다. 그의 대표적 아호 취사는 모래로 불을 땐다는 뜻이다. 자(字)는 덕훈(德薰), 호는 취사(炊沙), 감곡(鑑谷), 감계(鑑溪), 도촌(道村), 만취헌(晩翠軒) 등이며,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도촌 이수형의 4대손이며 효신의 둘째 아들이다. 한우(韓佑)와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인이다. 경상북도 영천 출신.

목차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취사 이여빈은 1556년 9월 11일 도촌 이수형의 4대손으로, 영천 도촌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홍천현감 이대근, 할아버지는 정략장군 충좌위부호군 이당이고, 아버지는 장사랑 기자전참봉을 지낸 이효신(李孝信)이고, 어머니는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 보의 4대손이며 황려부정 이종(黃驪副正 李悰)의 아들 어모장군 사직(司直) 이귀윤(李貴胤)의 둘째 딸이다. 형제로는 삼척교수(三陟敎授) 이신도(李信道)에게 출가한 누나와 형 여형(汝馨), 동생으로는 훈도를 지낸 여암(汝馣), 훈도를 지낸 여함, 여필, 여온 등이 태어났다.

부인은 예안김씨로 김담의 5대손이며, 고조부는 성균관생원 증 좌통례 김만칭(金萬秤), 증조부는 증이조판서 김우(金佑)이며, 조부는 생원 김사명(金士明)이고, 아버지는 참봉 김욱(金曰+助)이고[1],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찰방 증 승지 권동필(權東弼)의 딸이다. 예안김씨 부인에게서 아들 5, 딸 5명을 두었으나 딸 3명과 아들 1명은 태어난지 얼마 안돼 요절하고[2], 다음 권람(權欖)에게 출가한 딸이 태어나고, 그 뒤로 아들 성균관생원 성화(成樺), 성림(成林), 선교랑 성재(成材), 성운(成橒), 끝으로 임지경(任之敬)에게 출가한 딸이 태어났다. 예안김씨 부인은 1618년 염질(染疾)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어려서 진사 한우(韓佑)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뒤에 퇴계 이황의 제자인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생이 되었다. 자(字)는 덕훈(德薰), 호는 감곡(鑑谷)이라 하였고, 첫 호는 도촌(道村)이었다가 뒤에 감곡이라 하고, 뒤에 만년에 취사(炊沙)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그밖에 별호로 만취헌(晩翠軒)이라는 별호도 있었다.

그는 순정 독실한 성격에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했다. 처음에는 진사 한우(韓佑)에게서 배우다가 뒤에 소고 박승임의 문하에 들어가 경사에 통달하고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문사에 능하여 붓을 잡으면 문장이 물흐르듯 하였다.

관료 생활편집

1591년(선조 24년) 식년과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바로 임진왜란을 맞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장으로 영천 지역에서 거병하여 왜적에 맞서 싸웠다. 1598년(선조 31년) 전란이 종결되었으나 바로 부친상을 마친 뒤 1605년(선조 38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6년(선조 39) 여름 벽사도찰방(碧沙道察訪)으로 나갔으나 만녕에 어머니 전주이씨가 병환이 잦자, 병중인 어머니를 생각하여 1년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10년(광해군 2) 성균관전적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 김개시 등이 국정 운영에 문란하게 하므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이첨과 상궁 김개시의 목을 벨 것은 상소하고 돌아왔다.

1610년(광해군 2) 가을 통훈대부로 승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으로 사직하고 낙향, 그 뒤 3년간 을 마시며 여묘살이를 하였다. 3년상 중에도 이이첨 등의 주도로 영창대군이 화의 근원이니 영창대군을 죽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타나자, 그는 이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3년상을 마쳤으며, 1614년 옥사가 일어나 이이첨과 정인홍이 폐비를 주장하자 친어머니와 친동생은 아니지만 계통상 어머니와 아우의 관계이니 이를 헤아릴 것을 간하는 전은소를 올려 폐모살제의 불가함을 상소했다. 이후 정인홍, 이이첨 등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양선생변무소(兩先生辨誣疏)를 올려 이황이언적의 공적을 치하하며 이이첨정인홍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8살의 동자로 대궐 안에서 깊이 지내는 영창대군이 생각하는 것이란,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인데 어찌 대궐 밖의 일을 알수가 있으며, 어떻게 간사한 일에 가담할 수 있단 말인가?

영창대군의 옥사 때에는 여덟살 된 어린아이가 무슨 역심을 품겠느냐며 영창대군의 신구를 청하는 상소를 몰렸다. 그 외에도 그의 셋째 아들 이성재(李成材) 또한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617년(광해군 9) 6월인목대비 폐모론이 정청에 올라가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옳지 못함을 상소하고 7일 동안 합문(閤門) 앞에 엎드려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 영주와 안동 향교의 시독으로 활동했다. 그 뒤 영풍군 부석면 감곡(鑑谷)에 은거하여 김개국, 김륵 등 소수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후 그는 어렵게 살았는데,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에 의하면 나물밥이나 끼니를 잊기 어려울만큼 궁색한 살림이었으나 가난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은퇴와 만년편집

1618년(광해군 10) 가을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친지의 주선으로 안동향교의 제독이 되고, 동년 겨울 상주향교 제독, 1619년(광해군 11) 진주향교 제독이 되었다.

주변에서 농담 삼아 "그대와 같은 고을 사람으로 출세하여 요직에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대는 왜 침체한가", "그 사람들 하는 데로 따르면 될 일이지 왜 주변 타령인가" 라고 하면 그는 대답을 않고 양심장을 펼쳐 보였다 한다. 그는 인수정에서 시문과 문인들 양성 외에 봉화군 도촌리 사제(沙堤)의 명정암(冥酊巖)을 산책하곤 했다. 1623년(광해군 15) 3월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 정귄에서 불렀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감곡을 아호로 했다가 뒤에 모래로 불을 땐다, 늦은 나이에 고생스럽게 일을 해도 얻는 것이 없다는 뜻의 취사라는 호를 지어 아호로 삼았다.

고향의 향토사 정리에 뜻을 두어 여러 분야에 걸쳐 사료를 모으고 다듬어 편찬 준비를 해두었으며 1625년(인조3) 이산서원에서 향내 관계 인사의 모임을 주관하여 그 심의를 하고 서문까지 지었으나 간행을 못 보았다. 1631년(인조 9년) 9월 28일에 질병으로 인수정 정침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나이는 향년 76세였다.

사후편집

눌은 이광정이 행장을 짓고, 묘비명은 갈천 김희주가 찬하였다. 그의 문집 취사집은 셋째아들 서암 이성재가 처음 정리하여 처음 간행하였고, 뒤에 증손자 이기정(李基定)이 정리하여 다시 3권으로 간행하였다. 7대손 이시묵(李時默)이 재간행하면서 1824년(순조 24) 이인행(李仁行)의 서문을 받고, 이시검(李時儉), 이시탁(李時鐸) 등이 1831년에 유심춘(柳尋春) 등이 다시 서를 써주고, 그 해에 6권 3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경상도 순흥부 도강면(현, 경북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분토동에 안장되었고, 1696년(숙종 22)부터 도계서원 제향이 논의되어 1715년(숙종 41) 영주군 순흥의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3] 사림에서 1715년(숙종 41) 순흥도계서원에 배향하였는데, 그 상향문에 힘은 무너져가는 기강을 붙들 수 있고 손으로는 달리는 번개를 잡을 수 있다. 사나운 범이 관문을 지키니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의로운 행동은 일성과 같도다. 라고 하였다.

후일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될 때 공극루 등 건물 일부만 남고 훼철되었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 복원되었다. 그뒤 2005년에 후손들이 다시 복원하였다. 저서로 ≪취사문집≫ 6권과 미완성의 유고인 향토사료집 ≪영주지≫가 전한다.

저서편집

 
취사문집, 이여빈 저

취사문집은 셋째 아들 선교랑 이성재(李成材)가 문집을 정리하여 취사문집으로 간행하였다.

  • <<취사문집>>
  • <<영주지>> (유고)

작품편집

  • 명정암 기문(酩酊巖 記文[4])

편집

벽사도 찰방으로 근무하며 읊은 시

나는 왜 매미처럼 높은 나무를 찾아 맑은 이슬을 마시며

한여름 뜨거운 날씨에 나대로 놀지 못할까

나는 왜 지렁이 처럼도 못할까

마른 흙이나 먹고 샘물이나 마셨으면

인간 세상의 내음새 나는 것을 얻으려 않게 부끄러워라 썩고

속된 선비로 옷과 밥에 얽매어

속된 무리를 따라 꿈틀거려야 하니

굽히기 싫은 나의 허리를 남 위해 굽혀야 하고

꿇기 싫은 무릎을 남 위해 꿇으며

낮추기 싫은 얼굴을 남 위해 낮추고

숙이기 싫은 머리를 남 위해 숙여야 하며

쥐꼬리 만한 녹봉에 중정의 덕에 좀슬리며

하찮은 벼슬에 기걸한 성품도 굽혀야 하다니

말솜씨는 본래 벼변찮은데 남이야 말재주 부리라 하고

기색은 본시 천연한데 남에게 아첨하라 하네

가계편집

  • 할아버지 이당(李糖)
    • 백부 이효량(李孝良)
    • 계부 이효충(李孝忠)
  • 아버지 이효신(李孝信, 1529년 9월 9일 - 1602년 1월 16일)
  •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 1529년 12월 7일 - 1611년 8월 4일)
    • 형 : 이여형(李汝馨)
    • 동생 : 이여암(李汝香+庵)
    • 동생 : 이여합(李汝香+合)
    • 동생 : 이여필(李汝馝)
      • 조카 이성건(李成建, 자는 자강(子强), 1585년 - ?, 1624년 생원)
      • 조카며느리 공주이씨, 이질의 딸
    • 동생 : 이여온(李汝香+溫)
    • 매제 : 이신도(李信道)
  • 부인 예안김씨(1558년 5월 29일 - 1618년 윤 4월 4일)
    • 첫째 아들 이성화(李成華, 자는 자회(子晦), 호는 하천(河泉), 1582년 - ?, 생원)
    • 맏며느리 함창 김씨, 부사 김구정(金九鼎)의 딸
    • 둘째 아들 이성림(李成林, 자는 자무(子茂), 1585년 - 1654년, 선무랑)
    • 둘째 며느리 단산 장씨(丹山張氏, 생원 장진(張瑨)의 딸)
    • 셋째 아들 이성재(李成材, 호는 서암(西巖), 문인, 선교랑 역임)
      • 손녀 이씨
      • 손녀 사위 강현선(姜顯先, 본관은 진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역임)
    • 넷째 아들 이성운(李成雲, 자는 자장(子章), 을미(1595년?) - ?, 통덕랑 홍문관 교리)
    • 넷째 며느리 공인 성산김씨, 김성택(金成澤)의 딸, 찬성 김현주(金玄柱)의 후손
    • 딸 이씨
    • 사위 권람(權欖)
    • 딸 이씨
    • 사위 임지경(任之敬)
  • 처부 김욱(金勗, 본관은 예안, 참봉)
    • 처삼촌 김륵(호는 백암, 김륵은 숙부 의 양자로 갔으므로 그에게는 처삼촌이면서 처당숙이 된다.)
  • 외조부 이귀윤(李貴胤, 1493년 ~ 1539년 2월 3일), 서원군 친의 증손
  • 외조모 : 광주김씨(1509년 ~ 1602년 2월 4일), 습독 김균(金筠)의 딸

평가편집

눌은 이광정은 그를 가리켜 순정 독실한 천품이었다고 한다.

기타편집

소고 박승임의 문하생들의 사우록을 짓기도 했다.

그의 저서 취사문집은 아들 이성재가 정리하여 간행하였고, 1831년(순조 31) 이여빈의 증손 이기정(李基定)에 의해 재정리, 재간행되었다.

전은소편집

1617년(광해군 10년) 봄에 광해군7서의 변을 계기로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궁에 유폐하자, 비록 친 모자간은 아닐지라도 계통상 엄연한 모자간 임으로 폐모 살제의 부당성을 주장한 상소이다.

"새재 도적 박응서의 공초에 자전(인목대비)과 영창대군이 관련된 양으로 되었음은 천고의 불행입니다. 예로부터 밝고 어진 임금이 많았으나 특히 요순을 대효로 일컬음은 그분들이 인륜의 변고에 처하였으나 우애의 도리를 극진히 했기 때문입니다. ..... 이제 영창대군은 겨우 여덟 살의 아기로 깊이 대내에 있으면서 어머니 곁에서 어리광이나 부리는 형편으로 바깥 일과 전혀 관련이 있을 수 없으리란 것을 사람들이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영창대군을 죄로 다스리기를 주장하는 것은 한갓 역모를 다스린다는 명분만을 알 뿐 전하를 불의와 패륜에 빠뜨린다는 중대한 허물은 생각지 못하는 처사입니다. ..... 전하의 효성은 선왕(선조)께서 쓰고 부리시던 지팡이나 마필까지도 반드시 공경하여 보호 하셨거든, 하물며 평일 선왕께서 그토록 자애하시던 영창이 아니오이리까. 전하는 이미 영창을 폐하여 서인으로 만드셨으니 힘써 여러 신하의 의논을 쫓아 그 명은 용서하심이 처변의 도리를 온전히 하고 공의와 사정에 함께 마땅함을 얻으심이 될까 하옵니다.

또 드리건대 여덟살 아기(영창)는 함께 뿌리에 붙은 나무로 모후(인목대비)에게서 멀리 떼어 놓음은 어린 풀의 뿌리를 잘라 놓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린이(영창)가 놀라움과 근심으로 목숨을 잃음에서 벗어나게 하셔야 자전(慈殿) 또한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심이 될까 하옵니다. ..... 원하옵건대 전하는 종당 대순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시와 후세의 잘못을 경계하시고 골육이 단란하며 모자분(광해와 인목대비)의 사이가 처음같게 하시면 지극한 화기를 부르심이며 태평을 이루심이 되어 전하의 덕이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며 선왕의 하늘에 계신 넋이 반드시 기뻐 하실 것입니다. ....."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문절공 김담은 이여빈에게 외5대조가 된다. 이여빈의 고조할머니의 친정아버지이다.
  2. 부인의 제문에 "産子女各五。而女三男一在襁褓不育"이라 하였다.
  3. 도계서원은 그의 고조부 이수형 및 순흥부사 이보흠, 금성대군 등이 제향되었던 곳이다.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사제길 12
  4. 순흥읍지인 재향지에 의하면 명정암은 국무당(國武堂) 서쪽 산 기슭에 있다고 한다. 취사 이여빈이 지은 기문이 있는데 '넓은 반석이 있는데, 바둑판같이 평평하여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호사가(好事家)를 만나면 몇 칸 누각을 지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