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티노 공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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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런던 밀약 때도 이탈리아가 연합국이 되는 대가로 이 지역을 할양받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는 각각 병력을 그 지역에 배치시켰다. 그런데 이탈리아군이 이손초 강에서 공세를 취하는 까닭에 전투는 이손초 강 일대에서만 벌어지게 되었다. 동쪽의 러시아군 및 [[발칸 반도]]의 세르비아와도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던 까닭에 상대적으로 병력이 적은 오스트리아군은 이손초 강에서는 수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 참모총장 [[콘라드 폰 회첸도르프]](Konrad von Hoetzendorf)는 이손초 강에는 이탈리아군 주병력이 배치돼 있기 때문에 트렌티노와
콘라드는 3월 이손초 강에서의 [[5차 이손초 전투|이탈리아군 5번째 공세]]가 실패하고 나자 트렌티노에서의 공세를 위해 독일군 참모총장인 [[에리히 폰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 [[1861년]] [[11월 11일]] ~ [[1922년]] [[4월 8일]], [[헬무트 폰 몰트케 (1848년)|소몰트케]]가 [[1차 마른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해임된 후 참모총장이 되었다)에게 9개 사단가량의 지원병력을 요청했지만 팔켄하임도
콘라드는 이 2개 군을 유진(Eugen) 대공의 휘하에 배치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Schlanke Emma를 포함한 2000여 문의 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Schlanke Emma는 305mm에 달하는 거포로 385kg 정도의 대포알도 쏠 수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군 참모총장 카도르나도 이 일대에서 공격을 예상했지만 브뤼싸띠(Brussati)의 1군만을 이 일대에 배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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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군은 이 일대에서 병력 수와 대포 수에서 오스트리아군에 4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5월 14일]] 오스트리아군은 70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을 공격하였다. 이탈리아군은 5월 22일까지 8킬로미터나 후퇴하였고 이틀 후에는 1군 중앙이 아시아고까지 10킬로미터가량 밀려났다. 그렇지만 이탈리아군은 완전히 격파되지는 않았다. 급히 카도르나는 이 일대에 잘 정비된 철도시설을 이용하여 6월초순까지 40만에 가까운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전투는 아시아고의 서남쪽에서
유진은 철수를 명령하여 오스트리아군은 전투를 시작한 곳으로부터 5킬로미터까지 도로 철수를 하고 만다. 이 공세로 오스트리아군은 15만 명가량의 병력을 잃었고 이탈리아군은 14만 7천 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이 트렌티노 공세는 결정적으로는 이탈리아 전선의 구도를 바꾸지 못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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