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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년]] 여름에 [[도선]]의 제자인 [[경보 (승려)|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가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후백제]]의 수도 완산에서 멀지 않은 임피군에 도달했고, 이때 견훤은 경보를 맞아들여 남복선원(南福禪院)으로 올 것을 청했다가 다시 경보가 스승의 옛 거처인 백계산 [[옥룡사지|옥룡사]]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해 말에 [[후백제]]의 궁창과 명권이 [[고려]]로 투항하고 있다.
 
[[924년]] 7월에 견훤은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의성]]) 두 성의 군사로 [[조물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들은 고려에서 구원군으로 보낸 애선과 왕충중, 애선을 전사시키는 성과를 냈지만 조물성 사람들의 거센 저항으로 성을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했다. 견훤은 8월에 절영도(絶影島)의 총마 한 필을 왕건에게 보내고 있다(후술). 한편 신라에서는 [[경명왕]]이 죽고 경애왕이 즉위하였으며, [[925년]] 9월부터 [[발해]]에서 대규모 망명자들이 고려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10월에 견훤은 다시 3천 기(騎)를 이끌고 친히 조물성을 내습하였고 왕건은 반격에 나섰지만, 당초 조물성 전투는 여러 사서들에서도 나오듯이 후백제군이 매우 강해 고려가 불리한 상황이였다나섰다. 하지만 견훤측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승부가 나지 않자 이후 견훤과 왕건은싸움에서 서로 화친을승부를 하기로내기 결정하고(여기서힘들어지자 누가 먼저 화친을 요청했는지는 기록들에 따라 서로 엇갈린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왕건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고 나오지만,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서는 견훤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 국서를 주고 받은 문서에서는 이때 견훤이 먼저 화친을 청한 것으로 나온다. 현재 한국 역사학사들 다수의 의견은 조물성 전투에서 왕건이 먼저 화친을 청했다고 기록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조차 견훤과 왕건이 서로 주고받은 국서에서 견훤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쓰여있는 것으로 봐서 견훤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는 이야기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왕건이 이때 견훤을 '상부'라고 불렀고 이 '조물성 전투'에 시종일관 소극적이였던 기록들로 보아 왕건이 먼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이 더 유력할 것이다.),양측은 서로 왕건의 사촌아우 [[왕신]](王信)과 견훤의 외조카 [[진호 (후백제)|진호]](眞虎)를 인질로 교환함으로써 화친이 성립되었다. 12월에 견훤은 다시 거창 등 신라의 20여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후당으로부터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 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 백제왕 식읍 2천 5백 호의 관작을 제수받았다.<ref name="견훤"/>
 
==== [[고려]]와의 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