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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이준경의 처벌까지 상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또한 그는 향약의 보급에 참여하는 한편,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혼란해진 사회를 개혁할 방법으로 다시 건국 초기와 같은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경장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붕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문묘에 종사되었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