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아누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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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아누스는 황제가 된 뒤 데키우스의 [[기독교]] 박해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카르타고]] 주교 [[치프리아누스]]와 [[교황|로마 주교]] [[교황 식스토 2세|식스토 2세]]를 처형했다. 한편 그는 아들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해 로마 제국의 서반부를 맡기고, 자신은 사산 조 페르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동쪽을 맡았다. 그러나 [[259년]], 군세를 몰아 페르시아로 쳐들어 갔던 발레리아누스는 그만 에데사(지금의 샨리우르파)에서 샤푸르 1세에게 패해 포로가 되고 말았다(에데사 전투).
포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비샤푸르로 압송되어, 죽을 때까지 노예 취급을 받으며 사후에도 박제가 되어 신전에 전시되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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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 {{EB1911|wstitle=Valerianus, Publius Licinius|volume=27|page=859}}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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