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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훔친 일로 도산의 편에 서는 자는 없었고<ref group="주석">도키 가문 자체를 그리워하는 옛 가신들은 많았고 도산은 미노 평정 이후에도 늘 불온분자에 골머리를 앓으며 국내 통제에 고심하고 있었다. 때문에 작은 죄를 지은 자를 거열형이나 도끼로 처형하는 등 강권 정치를 행하고 있었다. 가쓰마타 시즈오(勝俣鎮夫)는 도산에서 요시타쓰로 가독이 양도된 배경에 실은 이러한 잔혹한 도산의 자세에 불만을 품은 중신들에 의해 요시타쓰를 옹립하는 정변이 일어났고 도산은 이에 의해 당주 자리에서 쫓겨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설을 제시하였다.</ref> 이듬해 고지 2년([[1556년]]) 4월에 17,5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요시타쓰에 맞서 2,500명의 병사로 도산은 나가라 강(長良川) 강변에서 벌어진 싸움에서(나가라 강 전투長良川の戦い) 사위 노부나가가 원군을 보낼 사이도 없이 중과부적으로 도산은 전사하였다. 향년 63세였다.
 
== 묘소 ==
사이토 도산의 묘소는 일본 기후 현(岐阜県) 기후 시(岐阜市)의 쇼자이지(常在寺)에 있는 것 외에도 같은 시에 소재한 도산즈카(道三塚)도 도산의 묘소라 전하고 있다. 쇼자이지에는 도산의 초상화나 「사이토 야마시로」(斎藤山城)라는 인(印) 등이 소장되어 있다.
 
== 자손 ==
부친은 나가이 신자에몬노조(長井新左衛門尉), 자식은 [[사이토 요시타쓰]](斎藤義龍), 기초 (帰蝶, [[노히메]]) 등이 있었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