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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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유민의 자손. 담력있고 용맹하여 불우한 하층계급의 동조를 얻어 신라부흥과 노비해방운동을 일으켰다. 이 때에 경주 김순도 이에 호응, 울진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에 대혼란이 일어났고 황주목사 김준거도 반란을 일으키고 진주에서도 노비해방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진주아전 정방의는 반동자 6,400여 명을 살해하는 대참사를 단행하였다.또한 밀양에서도 폭동이 일어나 관노 50여 명이 관용창고에 침입하여 수은기를 훔쳐내는 등 민란이 연발하여 정부에서는 한때 수습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동년 5월에는 고려의 권세가인 최충헌의 사노 만적이 장안 노복들을 전부 송악산에 모아 놓고 “우리도 다같은 사람이다. 왕후장상과 공경대부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대동단결하여 상전놈들을 죽이고, 종문서를 불사르고 남들처럼 살아보자”고 결의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노비해방운동 중 최대의 거사인 소위 ‘만적의 난’이다. 이 모두는 울진의 김초가 발의한 [[노비해방운동]]이 발단이 되었다.
 
=== [[김제 (문신)|김제]] ===
호는 백암. 시호는 충개. 고려 [[공민왕]] 때 사람으로 [[평해군수]]를 지냈는데 [[1391년]] 고려가 망하자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는 충정으로 망국을 통탄하다가 처자와 헤어진 뒤 갈대삿갓을 쓰고 기성면 구산리 북쪽 절벽 밑에 다달아 서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통곡한 후 충절시 2수를 지어 놓고 배를 타고 바다로 갔는데 종적을 알 수 없다.그 뒤 정조가 백암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손수 초유제문을 지어 좌승지 이익운으로 하여금 구산리 앞바다에 제사를 올리게 하고 백암이 남긴 시 2수를 절벽에 새기게 하였다. 이 시가 새겨진 바위를 [[도해암]]이라고 하는데 구산리 방파제 축조공사 때 이 절벽을 폭파하여 흔적이 없다가 1985년에 다른 암벽에 충절시가 새겨졌다. 백암 후손인 선산 김씨들이 선조의 성적을 기리고자 [[이룩함]]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