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도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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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오]](明応) 3년([[1494년]]) [[야마시로 국|야마시로]](山城) 오토쿠니 군(乙訓郡) 니시오카(西岡)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태어난 해에 대해서는 [[에이쇼]](永正) 원년([[1504년]])이라는 설도 있으며, 출신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미노 국 제구기』에 따르면 선조 대대로 북면무사(北面武士)로 근무했고 아버지는 마쓰나미 사콘노죠칸 모토무네(松波左近将監基宗)라고 하며 사정이 있어 관직을 잃고 니시오카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도산은 어렸을 때의 이름을 미네마루(峰丸)라 하였으며 열한 살 되던 봄에 교토 묘가쿠지에서 출가, 호렌보(法蓮房)라는 이름으로 승려로써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 뒤 사제이며 동문인 니치고보(日護房, 난요보南陽房)가 미노 국 아쓰미 군(厚見郡) 이마이즈미(今泉)의 쇼자이지죠자이지(常在寺)의 주지로 부임하고 호렌보도 이를 계기로 환속하여 마쓰나미 쇼고로(松波庄五郎, 쇼쿠로庄九郎라고도 하였다)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기름 장수인 나라야 마타베(奈良屋又兵衛)의 딸을 맞이하고 기름 장수가 되어 야마자키야(山崎屋)를 칭한 쇼고로는 [[다이에이]](大永) 연간에 기름 파는 행상으로써 성공을 거두고 평판도 얻었다. 『미노 국 제구기』에 따르면 그의 장사 방법은 「기름을 부을 때 깔때기를 쓰지 않고 동전의 가운데 구멍을 통해 부어 보인다. 기름이 쏟아지면 대금은 받지 않는다.」라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선보임으로써 미노에서 평판을 얻었다고 한다.
 
어느 날 쇼고로는 자신에게서 기름을 사 가던 도키 가문의 야노(矢野)라는 무사로부터 「자네의 기름 파는 재주는 뛰어나지만 그래봤자 상인의 기술일 뿐이지. 그 힘을 무예에 쏟는다면 훌륭한 무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아깝구만」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이를 계기로 마음을 고쳐 장사를 그만두고 창과 철포(鉄砲)를 익혀 무예의 달인이 되었다고 한다.<ref group="주석">『미노 국 제구기』. 다만 가이온지 주고로의 『무장열전』(武将列伝)에는 「도산은 무예가 아닌 지모(智謀)로 출세한 사람이었으므로 이 이야기는 이상하다」고 해서 의문시하고 있다.</ref> 그 뒤 무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쇼고로는 미노 쇼자이지의죠자이지의 니치고보 즉 니치운(日運)을 의지하여<ref group="주석">『미노 국 제구기』. 『무장감상기』(武将感状記) 쇄옥화(砕玉話)에서는 마을 밖의 암자에 거주하고 있던 쇼고로를 도키(누구인가는 알 수 없다)가 추천해서 천거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가이온지 주고로는 『무장열전』에서 「니치운이라는 유력한 후원자가 있었다는 것은 모순이다」라며 마찬가지로 의문을 제기하였다.</ref> 미노의 슈고 가문인 도키 씨(土岐氏)의 고슈고다이(小守護代) 나가이 나가히로(長井長弘)의 가신이 되는데 성공, 나가이 집안의 가신인 니시무라 씨(西村氏)의 이름을 빌려 니시무라 간쿠로 마사토시(西村勘九郎正利)라 칭하였다.
 
간쿠로는 그 무예와 재주로 차츰 두각을 드러냈고, 미노 슈고의 둘째 아들인 도키 요리아키(土岐頼芸, 도키 요리요시)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요리아키가 형 마사요리(政頼, 마사타케頼武)와의 가독 상속에서 패하자 간쿠로는 몰래 대책을 강구하였고 다이에이 7년([[1527년]]) 8월에 마사요리를 가와테 성(革手城)에서 급습해 에치젠(越前)으로 내쫓고 요리아키가 슈고로 보임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요리아키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 간쿠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요리아키의 신임을 얻고 있던 나가이 나가히로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교로쿠]](享禄) 3년([[1530년]]) 정월 또는 덴분 2년([[1533년]]) 나가이 나가히로의 행실을 트집잡아 그를 죽이고 나가이 신쿠로 노리히데(長井新九郎規秀)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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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년과 최후 ===
덴분 23년([[1554년]]) 도시마사는 가독을 아들 요시타쓰(義龍)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쇼사이지에서죠자이지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도산(道三)이라 칭하고 사기 산성(鷺山城)에 은거하였다.<ref group="주석">다만 도산이 사기 산성을 자신의 은거지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에도 시대의 군키모노(軍記物)에는 나오지 않으며, 신뢰할 수 있는 사료 가운데는 확인되는 것이 없다. 『신장공기』에는 도산의 친아들 네 명이 이나바 산성을 거성으로 하고 있었다는 기술이 있다.</ref> 그러나 도산은 요시타쓰보다도 그 동생인 마고시로(孫四郎)나 기헤이지(喜平次) 등을 편애하였고, 급기야 요시타쓰를 폐적할 생각까지 하기 시작하였다. 도산과 요시타쓰의 불화가 표면에 드러나고<ref group="주석">도산과 요시타쓰의 불화는 요시타쓰가 도산의 친아들이 아니라 도키 요리아키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요시타쓰는 다이에이 7년([[1527년]])에 태어났으며 어머니 미요시노(深芳野)가 도키 요리아키로부터 도산에게 내려지고 1년 이내에 출생했기 때문이었다.</ref>、고지(弘治) 원년([[1555년]]) 요시타쓰는 동생들을 살해하고 도산에 맞서 거병하였다.
 
나라 훔친 일로 도산의 편에 서는 자는 없었고<ref group="주석">도키 가문 자체를 그리워하는 옛 가신들은 많았고 도산은 미노 평정 이후에도 늘 불온분자에 골머리를 앓으며 국내 통제에 고심하고 있었다. 때문에 작은 죄를 지은 자를 거열형이나 도끼로 처형하는 등 강권 정치를 행하고 있었다. 가쓰마타 시즈오(勝俣鎮夫)는 도산에서 요시타쓰로 가독이 양도된 배경에 실은 이러한 잔혹한 도산의 자세에 불만을 품은 중신들에 의해 요시타쓰를 옹립하는 정변이 일어났고 도산은 이에 의해 당주 자리에서 쫓겨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설을 제시하였다.</ref> 이듬해 고지 2년([[1556년]]) 4월에 17,5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요시타쓰에 맞서 2,500명의 병사로 도산은 나가라 강(長良川) 강변에서 벌어진 싸움에서(나가라 강 전투長良川の戦い) 사위 노부나가가 원군을 보낼 사이도 없이 중과부적으로 도산은 전사하였다. 향년 63세였다.
 
== 묘소 ==
사이토 도산의 묘소는 일본 기후 현(岐阜県) 기후 시(岐阜市)의 쇼자이지죠자이지(常在寺)에 있는 것 외에도 같은 시에 소재한 도산즈카(道三塚)도 도산의 묘소라 전하고 있다. 쇼자이지에는죠자이지에는 도산의 초상화나 「사이토 야마시로」(斎藤山城)라는 인(印) 등이 소장되어 있다.
 
== 자손 ==
아버지는 마쓰나미 쇼고로(松波庄五郎) 또는 마쓰나미 모토무네(松波基宗)이고(후술), 아들로 [[사이토 요시타쓰|요시타쓰]](義龍)<ref group="주석">요시타쓰의 친아버지는 도산이 아니라 도키 요리아키(土岐頼芸)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입증할 만한 사료가 없어서 후세의 창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ref>, 마고시로(孫四郎, 다쓰모토龍元, 다쓰시게龍重), 기헤이지(喜平次, 다쓰유키龍之, 다쓰사다龍定), 이요(利堯, 玄蕃助)<ref group="주석">『세이슈 군기』(勢州軍記)에는 이나바 요시미치(稲葉良通)의 조카라고 되어 있다.</ref>, 나가타쓰(長龍, 도시오키利興 또는 도시하루利治라고도 한다)、이치요(日饒, 묘가쿠지妙覚寺 19세 주지), 닛카쿠(日覚, 쇼사이지죠자이지常在寺 6세 주지). 또한 나가이 미치토시(長井道利)<ref group="주석">『기후 군기』(岐阜軍記)에 따르면 「사이토 계도」(斎藤系図)에는 나가히로의 아들이라고도 하였다.</ref>는 나가이 도시타카(長井利隆)<ref>『미노 명세기』(美濃明細記).</ref>의 아들로 도산의 동생<ref>『무가사기』(武家事紀)</ref><ref group="주석">『미노 국 잡사기』(美濃国雑事記)에 실린 「나가이 계도」(長井系図)에는 나가이 도시타카(長井利隆)의 아들로 사이토 도산의 동생으로 되어 있다.</ref>이라고도, 또는 도산이 젊어서 본 아들이었다고도 한다.<ref group="주석">横山住雄의 『사이토 도산』에는 미치토시는 나가이 나가히로가 아니라 도산의 일족으로 서자였기 때문에 적남 요시타쓰에게 사이토 씨를, 미치토시에게 나가이 씨를 잇게 하였던 것은 아닐까 주장하고 있다.</ref> 딸은 마데노코지 요리쓰나(姉小路頼綱)의 정실과 기쵸(帰蝶, [[노히메]]濃姫, 오다 노부나가의 정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