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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위청 (전한)|위청]] 휘하의 [[교위]]로 [[흉노]] 정벌에 참전하였고, 공을 세워 [[남양군 (중국)|평릉]][[열후|후]](平陵侯)에 봉해졌다. 장군이 되어 [[삭방자사부|삭방]]에 성채를 쌓았고, [[위위]] 신분으로 유격장군(游擊將軍)이 되어 위청과 함께 삭방으로 출병하였다.
[[원삭]] 6년(기원전 123년), [[우장군]]이 되어 다시
의랑(議郞) 주패(周霸)는 위청에게 소건을 죽여 위엄을 보이라고 하였으나, 위청의 참모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위청은 결정하지 못하고 조정에 해결을 청원하였고, 결국 소건은 목숨을 부지하는 대신 속죄금을 내고 서인(庶人)이 되었다.
장남 소가(蘇嘉)는 [[봉거도위]]를, 차남 [[소무 (전한)|소무]]는 [[전속국]]을, 삼남 소현(蘇賢)은 [[기도위]]를 지냈는데, 소무가 가장 명성이 있었다.▼
▲훗날 다시 부름을 받아 [[대군태수]]를 지내다가 죽었다. 장남 소가(蘇嘉)는 [[봉거도위]]를, 차남 [[소무 (전한)|소무]]는 [[전속국]]을, 삼남 소현(蘇賢)은 [[기도위]]를 지냈는데, 소무가 가장 명성이 있었다.
소건은 예전에 위청에게 사대부들을 불러모을 것을 권한 적이 있었는데, 위청은 예전에 [[두영]]과 [[전분 (전한)|전분]]이 빈객을 많이 거느려 [[전한 무제|무제]]의 노여움을 산 일을 들며 사양하였다. 소건은 나중에 이 일을 《[[사기 (역사서)|사기]]》의 저자 [[사마천]]에게 이야기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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