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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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위 전 ===
==== 출생과 고아 시절 ====
[[992년]] [[고려 태조|태조 왕건]]의 아들 [[고려 안종|안종 왕욱]]-아버지-(왕욱)
[[고려 대종|대종 왕욱]](역시 [[고려 태조|태조 왕건]]의 아들)의딸이며 딸이자 [[고려 태조|태조 왕건]]의태조의 손녀인 [[헌정왕후]]-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981년]] [[고려 경종|경종]]이 붕어하면서 그의 제4비인 [[헌정왕후|헌정왕후 황보씨]]([[고려 대종|대종]]의 딸)는헌정왕후는 궁에서 나와 살았다. 이때 그 이웃에 [[고려 안종|왕욱]](王郁, [[고려 태조안종|태조안종]]의 아들, [[헌정왕후]]의 숙부)이 살았는데, 두 사람은 자주 왕래하다보니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결국 정을 통해 [[헌정왕후]]는헌정왕후는 왕욱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헌정왕후]]와헌정왕후와 현종은 모자간이면서도 사촌 남매간이 된다. [[992년]] [[헌정왕후]]는헌정왕후는 아이를 낳고는 곧바로 죽었다. 이 아이가 왕순(현종)이다.
 
후일 [[왕순]]은왕순은 [[고려 성종|성종]]의 명에 의해 보모(혹은 유모)에게 맡겨졌다. 어느날 [[고려 성종]]의성종의 명으로 [[왕순]]이왕순이 궁에 들어와 [[고려 성종]]과성종과 대면하게 되는데, 이때 [[왕순]]이왕순이 [[고려 성종]]의성종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오며 '아비, 아비'라고 불렀다. 이때 [[고려 성종]]은성종은 눈물을 흘리며 [[왕순]]을왕순을 아버지 [[고려 안종|왕욱]]에게왕욱에게 보냈다. [[왕순]]은왕순은 아버지 [[고려 안종|왕욱]]이왕욱이 사망하는 [[996년]]까지 귀양지 사수현(泗水縣, 현 [[사천시]])에서 함께 살았고, [[고려 안종|왕욱]]이왕욱이 사망한 이듬해인 [[997년]]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 출가와 탄압 ====
[[왕순|현종]]은현종은 12세 때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헌애왕후|천추태후]](千秋太后)가 [[김치양]](金致陽)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그를 숭교사(崇敎寺)에 보내 승려로 만들었다. 이모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승려가 되었지만 이후 숭교사에 자객들이 자주 들이닥치자 [[고려 목종]]과 숭교사 내 승려들의 도움으로 [[1006년]]에 신혈사(神穴寺, 현재 서울 [[진관사]])로 거처를 옮겨갔다.
 
여러 차례 [[김치양]]과김치양과 [[헌애왕후|천추태후]]가헌애왕후가 자객을 보내 자신의 목숨을 노리자 신혈사의 주지승인 진관대사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땅굴을 파 그를 그 곳에 대피시킨 뒤 그 위에 침대를 배치하는 기지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1009년]]([[고려 목종]] 12년) 서북면순검사 [[강조]](康兆)목종을 폐하고 옹립하여([[고려강조의 목종|목종정변]]을 폐하고 옹립하여) 왕위에 올랐다. 재위 초기에는 [[1009년]] [[2월]]부터 이듬해 [[1010년]] [[11월]]까지 [[강조]](康兆)가강조가 실권을 잡았다.
 
=== 즉위 ===
==== 거란의 재침입 ====
다음해 [[거란]]이 [[강조강조의 정변]]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하자 [[강조]]에게 30만 군대로 방어하게 했으나 [[강조]]가강조가 패하고 [[개경]]이 점령당하는 바람에 [[나주]]로 [[지채문]]의 호종을 받아 피난갔다가 환도했다. 이 때의 피난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몽진으로 기록된다. 현종은 창화현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고 적성현에서는 무뢰배들이 그에게 활을 쏘았으며 나중에 공주를 나오면서 임신한 왕후마저 떼어놓고 피난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때에 공주에서 머물다 [[김은부]]의 딸과 관계를 맺어 나중에 그의 딸들이 왕후가 된다. 전주에서는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납치하려다 위기를 겨우 모면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에는 [[고려]]의 중앙정부는 실질적으로 와해된 상태였으며 각처의 장수들에 의해서 거란을 물리치게 된다.
 
==== 무인세력과의 갈등 ====
[[1014년]] 11월 거란의 침입으로 파괴된 궁궐을 수축하고 거란과의 전쟁으로 크게 불어난 재정 적자를 보전하기 위하여 무신과 군인들의 영업전을 빼앗았다. 이에 거란과의 싸움에서 공이 높았던 상장군 최질, [[김훈 (고려)|김훈]]등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 정책을 실행한 문신들을 잡아 대궐로 난입하여 [[왕순|현종]] 앞에서 이들에게 매질을 하고는 거란과의 전공이 높은데도 상을 받기는커녕 영업전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신도 공이 높으면 문신처럼 높은 품계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현종은 일단 수락하였다.
 
[[1015년]] 현종은 이자림과 모의하여, 공이 높은 무신들을 위로한다면서 잔치를 열어 고위 무신들을 불렀다. 잔치가 무르익어 무신들이 술에 취하게 되자 이들을 주살했다. 19명의 장군들이 살해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문치가 확고해졌다. 요사에 따르면 거란은 이 사실을 탐지했고 3차 침공에 대한 주장이 거란 조정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 거란의 제3차 침입 ====
[[1018년]] 거란이 현종의 입조(入朝)를 요구하며 다시 쳐들어왔으나 [[강감찬]](姜邯贊)귀주(龜州)에서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함으로써([[귀주대첩]]) 위기를 모면했다. [[1022년]] 향리의 장의 명칭을 군현에서는 호장(戶長), 향·부곡 등에서는 장(長)으로 간소화시키고, [[1024년]]에는 [[개경]]을 확장하여 5부(部) 35방(坊) 314리(里)로 정했다. 또한 그동안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으며, 최초로 문묘종사(文廟從祀)의 선례를 만들었다.
 
=== 생애 후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