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산 감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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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회산 감씨의 시조는 '''감규'''(甘揆 = 甘王+癸)로 자는 양원(養元), 호는 연강(延岡)이다. 감규는 [[수나라]] 출신의 조상을 둔 [[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1351년]]([[공민왕]] 1년)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행하여 [[고려]]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후에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지면서 고려에 정착하였다. 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 회산 감씨의 시조는 감둥리로 공민왕에게서 규(揆) 이름을 하사받아 이후에야 이름을 감규로 사용했으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으나 각종 부정부패로, 후에는 천민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공민왕이 하사한 규(揆) 이름을 풀어보면 임금 왕(王)+ 북방 계(癸)가 합쳐진 것으로 북쪽의 왕으로 해석되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일개 학사에게 왕을 칭하는 규(揆)라는 이름을 하사하는 등 호의를 베풀어 그의 환심을 산 후 반원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드러나자 재산몰수 후 천민으로 강등되었다. 이를 보면 일개 한림학사 감둥리에게 규(揆) 라는 왕을 뜻하는 이름을 하사한 것은 공민왕의 계책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천민으로 강등되면서 하사받은 이름인 규(揆)도 몰수당하고 감둥리라는 본명으로 돌아가 천민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손자인 평장사(平章事) 감흥협(甘興鋏)을 비롯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 감소연(甘紹延), 중추부사(中樞府使) 감진요(甘震曜), 이부시랑(吏部侍郞) 감침(甘鍼) 등이 관직에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조부인 감둥리가 천민으로 강등되면서 이들도 함께 천민으로 강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족보에 따르면 15세손 감수화(甘受和) 때까지 본관을 연릉(延陵)으로 삼아오다가,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간(諫)하여 중지하게 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본관을 회산으로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