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산 감씨

회산 감씨(檜山 甘氏)는 경상남도 창원시를 관향으로 하는 국의 이다.

창원 감씨 (昌原 甘氏)
회산 감씨 (檜山 甘氏)
합포 감씨 (合浦 甘氏)
관향경상남도 창원시
시조감규 (甘 王+癸)
중시조감철 (甘喆)
주요 인물감상중, 감경인, 감기현, 감사용, 감우성
인구(2000년)4,892명
(창원 감씨 2,685명)
(회산 감씨 2,113명)
(합포 감씨 94명)

창원 감씨(昌原 甘氏) 또는 합포 감씨(合浦 甘氏)라고도 한다. 시조 감규(甘揆)는 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1349년(고려 충정왕 1) 공민왕 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행하여 고려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기원편집

감(甘)씨는 중국 주나라 무왕의 셋째 아들 숙대(叔帶)가 감후(甘侯)에 봉해지고 그 곳을 식읍으로 하사받은 후, 그 땅 이름을 성으로 삼은 데서 유래되었다.

역사편집

회산 감씨의 시조는 감규(甘揆 = 甘王+癸)로 자는 양원(養元), 호는 연강(延岡)이다. 감규는 수나라 출신의 조상을 둔 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1351년(공민왕 1년)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행하여 고려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후에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지면서 고려에 정착하였다. 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 회산 감씨의 시조는 감둥리로 공민왕에게서 규(揆) 이름을 하사받아 이후에야 이름을 감규로 사용했으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으나 각종 부정부패로, 후에는 천민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공민왕이 하사한 규(揆) 이름을 풀어보면 임금 왕(王)+ 북방 계(癸)가 합쳐진 것으로 북쪽의 왕으로 해석되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일개 학사에게 왕을 칭하는 규(揆)라는 이름을 하사하는 등 호의를 베풀어 그의 환심을 산 후 반원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드러나자 재산몰수 후 천민으로 강등되었다. 이를 보면 일개 한림학사 감둥리에게 규(揆) 라는 왕을 뜻하는 이름을 하사한 것은 공민왕의 계책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천민으로 강등되면서 하사받은 이름인 규(揆)도 몰수당하고 감둥리라는 본명으로 돌아가 천민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손자인 평장사(平章事) 감흥협(甘興鋏)을 비롯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 감소연(甘紹延), 중추부사(中樞府使) 감진요(甘震曜), 이부시랑(吏部侍郞) 감침(甘鍼) 등이 관직에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조부인 감둥리가 천민으로 강등되면서 이들도 함께 천민으로 강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족보에 따르면 15세손 감수화(甘受和) 때까지 본관을 연릉(延陵)으로 삼아오다가,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간(諫)하여 중지하게 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본관을 회산으로 하고있다. 묘소는 충청도 공모산에 있었고 어제(御題)한 신도비가 무덕곡에 있었다고 하나 없어져 후손들이 세거지인 창원시 내리동에 제단과 신도비를 설치하고 매년 음력 4월15일 향사한다.고 되어있다.

본관편집

감(甘)씨의 본관인 창원(昌原), 회산(檜山), 합포(合浦) 등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일원이다. 신라 때에는 삽량주(歃良州) 굴자군(屈自郡)이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굴자군을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바꾸고, 합포현(合浦縣 : 馬山) · 웅신현(熊神縣 : 熊川) · 칠제현(漆隄縣 : 漆原)을 관할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금주(金州 : 金海)로 병합되었다가 뒤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독립하였다. 1282년에 의안군이 의창현(義昌縣)으로, 합포현이 회원현(會原縣)으로 개칭되었다. 1408년(태종 8)에 회원현을 병합하여 창원부(昌原府)로 승격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 설치되었으며, 1413년에는 창원도호부가 되었다. 1601년(선조 34)에 창원대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03년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이 진주로 옮겨갔으며 현종 무렵에는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창원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남도 창원군이 되었다.

분파된 성씨 본관편집

회산 감씨에서 직계 분적된 성씨 관향에는 창원 감씨, 합포 감씨, 거창 감씨, 부령 감씨, 충주 감씨, 창녕 감씨 등이 있다.

인물편집

  • 감상중(甘尙中) : 조선 전기의 문신. 성종(成宗) 5년(1474년)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문과에 급제하여, 군위현감, 시강원전적(侍講院典籍) 등을 역임하였다.
  • 감경인(甘景仁, 1569년 ∼ 1648년)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회산(檜山). 자는 여일(汝一), 호는 관술정(觀術亭). 아버지는 감예종(甘禮從)이며, 어머니는 반남 박씨(潘南朴氏)로 박종(朴宗)의 딸이다. 창원에서 태어났다.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경륜(景倫)과 함께 이순신의 진영에 달려가 공을 세워 여도만호(呂島萬戶)가 되었다. 이어 내금위(內禁衛)·정략장군(定略將軍)이 되고, 원종공신의 적에 올랐다. 1606년 전계신(全繼信) 등과 함께 대마도에 파견되어 1년간 머물면서 도주(島主) 무네(宗義智)와 교섭하여 그들의 국서를 고치게 하고, 두명의 왕릉범(王陵犯)과 귤지정(橘智正)을 잡아오는 한편, 잡혀간 포로 150여 명을 데리고 오는 등 전후 수습에 힘썼다. 죽은 뒤 충훈부로부터 삼렬(三烈)이라는 사호(祠號)를 받고, 삼렬사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삼렬당문집(三烈堂文集)』이 있다.[1]
  • 감기현(甘麒鉉, 1880년 ∼ 1964년) : 본관은 회산(檜山). 자는 영팔(英八), 호는 동미(東湄). 어렸을 때 이름은 태현(泰鉉)이다. 증조부는 감수운(甘守雲)이고, 조부는 농와(農窩) 감회정(甘檜廷)이다. 부친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 겸 의관(僉知中樞府事兼議官)을 지낸 우우재(友于齋) 감재원(甘在元)이고, 모친은 순흥(順興) 안중금(安中嶔)의 딸이다. 1880년(고종 17)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내동리(內洞里)에서 태어났다. 1899년(광무 3) 20세에 참정(參政)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궁내부주사(宮內府主事)로 추천되었다. 1902년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승진되었으며, 1904년 혜민원참서(惠民院參書)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민영환이 죽자 그를 제사지내기도 하였다. 1907년 초계현감(草溪縣監)이 되었으며, 이후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자, 이에 분개하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942년 호서의 삼산(三山)으로 이거하여, 구조하(具祖夏), 김기성(金璂成) 등 명사와 교류하였다. 1950년 전쟁을 피해 김해 청천으로 내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1964년에 죽었다.
  • 감사용 : 야구 선수, 감독
  • 감우성 : 배우
  • 감녕 : 중국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의 해적 출신의 무장. 자는 흥패(興覇). 파군 임강현 사람.
  • 감한솔 : 축구선수
  • 감강찬 : 피겨스케이팅(페어) 선수

과거 급제자편집

문과
  • 감상중(甘尙中) : 성종(成宗) 5년(1474년)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3위. 본관은 합포(合浦)
생원시
  • 감덕후(甘德厚, 1519년생) : 명종(明宗) 10년(1555년)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3등. 자는 후지(厚之), 본관은 창원(昌原).
진사시
  • 감경무(甘景茂, 1556년생) : 선조(宣祖) 22년(1589년)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3등. 자는 희수(希秀), 본관은 창원(昌原). 아버지는 안일호장(安逸戶長) 감흔(甘昕).

인구편집

감(甘)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에서 5,998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창원 감씨 2,685명, 회산 감씨 2,113명, 합포 감씨 94명으로 현재의 창원에 해당하는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인구는 4,892명이었다. 한편, 창원 이외의 지역인 거창 감씨(居昌甘氏) 522명, 창녕 감씨(昌寧 甘氏) 372명, 충주 감씨(忠州 甘氏) 112명, 부녕 감씨(扶寧甘氏) 65명 등이나 창원 감씨의 분파 세거지명인 것으로 추측된다.

항렬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