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도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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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 등이 황도파를 만든 계기는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대신에 의한 소위 [[우가키 군축]]이라고 할 수 있다.
 
우가키는 [[나가타 테츠잔]]을 육군성 동원과장으로 보임하고 지상군 4개 사단 약 9만 명을 군축했다. 그리고 그 예산으로 [[항공기]], [[전차]] 부대를 신설하고 보병 부대에도 [[경기관총]], [[곡사포]]를 장비하는 등 군 현대화를 추진했다. 나가타는 [[제1차 세계대전]] [[관전무관]] 출신으로, 유럽 국가들의 [[총력전]] 체제를 목격하고 일본의 군비, 정치, 경제가 그에 비해 뒤떨어졌음을 통감했다. 우가키 군축은 군사 예산의 축소를 요구하는 여론의 요구를 들어주는 시늉을 하면서 동시에 유럽 열강에게 뒤진 격차를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우가키-나가타 흐름이 황도파와 대립하는 [[통제파]]가 되어 나중에 황도파와 대립하게 된다.
 
우가키가 군의 실권을 쥐고 있는 동안 아라키와 마사키 등은 우가키 인맥이 아니라서 소외되었다. 아라키는 1918년 [[시베리아 출병]] 당시 시베리아 파견군 참모였는데, 이 때 혁명 직후의 혼란하고 후진적인 러시아의 [[노농적군]]이 “철의 규율”과 용감한 감투정신을 가지고 있음에 크게 놀랐다. 그래서 아라키는 반소 사상을 굳히면서, 동시에 소련이 군사경제건설을 진행하기 전에 미리 시베리아 지역에서 소련을 격퇴하고 이 지역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는 대소주전론자가 되었다.
 
또한 1920년대에 영관급 장교들이 군 현대화와 국민총동원 체제를 추구하며 [[일석회]]라는 스터디그룹 사조직을 만든 적이 있었다. 이 때 주요 인물이 나가타 테츠잔과 [[오바타 토시로]]였는데, 1932년 나가타와 오바타가 분열하면서 나가타 세력은 통제파가 되고통제파로, 오바타 세력은 황도파가황도파로 들어가게 되었다.
 
위관급 청년장교 사이에는 [[국가개조]]운동이 퍼지고 있었다. 그 동기는 다음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