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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역사}}
'''흉노'''({{zh|c=匈奴|p=Xiōngnú|h=슝누}}는 [[기원전 4세기]]부터 [[5세기]]까지 북아시아 스텝지역에 존재한 [[유목제국]]이다.<ref>{{서적 인용|last=Ebrey|first=Patricia Buckley|title=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China|year=2010|edition=2nd|publisher=Cambridge University Press|isbn=978-0-521-12433-1|url=http://books.google.com/?id=vr81YoYK0c4C&pg=PA69&dq=%22Xiongnu+Confederation%22#v=onepage&q=%22Xiongnu%20Confederation%22&f=false|page=69|이탤릭체=예}}</ref> [[기원전 3세기]] 무렵 알타이-샤안 산맥 지역에서부터 동부로 진출하여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만주]] 서부, [[중화인민공화국]]의 [[내몽골 자치구]](內蒙古自治區), [[간쑤 성]](甘肅省), [[신장 위구르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까지 지배하였다. [[한나라]]와 군사적 충돌을 겪기도 하였고, 때로는 조공무역이나 결혼동맹을 하는 등 복잡한 관계를 맺었으며 전한의 공격으로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고고학계와 사학계에선 흉노족은 몽골계가 아닌 튀르크계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몽골의 노인울라(Noin-Ula) 고분군 제25호 분묘에서 인물자수화(人物刺繡畵)와 산시성(陝西省) 창안현(長安縣) 리시향(禮西鄕) 커성좡(客省庄) 량저우 고분군(兩周古墳群)의 흉노 고분에서 발견된 정방형 동제부조(銅製浮彫)에서 흉노는 심목고비(深目高鼻)의 코카서스 아리아계라는튀르크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 제한된 자료에서도 체계적인 연구의 결과, 흉노는 알타이계 언어를 사용하는 투르크족이라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으며 흉노족의 구성이 흉노의 동진으로 인해 몽골, 퉁구스 등 기타 북방민족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어도 지배계층과 민족 구성원 본체가 투르크족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ref>흉노 [匈奴] (실크로드 사전, 2013. 10. 31., 정수일)</ref><ref>종족적 기원 (터키사, 2007. 9. 12., 이희수, 위키미디어 커먼즈)</ref> 흉노와 [[훈족]]을 같은 민족<ref>권오진 [http://www.ytn.co.kr/_ln/0106_200701130943321949 사라진 고대 유목국가 흉노!], 《YTN》, 2007년 1월 13일 작성, 2011년 3월 14일 확인.</ref> 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 역사 ==
=== 초기 ===
흉노가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기원전 4세기 말 중국의 전국시대의 기록이다. [[기원전 318년]], 흉노는 [[한나라 (전국시대)|한]](韓), [[조나라|조]](趙), [[위나라 (전국 시대)|위]](魏), [[연나라|연]](燕), [[제나라|제]](齊)의 다섯 나라와 함께 [[진나라|진]](秦)을 공격했지만, 결과는 6국의 참패로 끝났다. 이후 조의 [[조 효성왕|효성왕]](孝成王, 재위: 기원전 265년 - 기원전 245년)의 시대에 장군(將軍) 이목(李牧)이 대(代)의 안문(雁門)에서 흉노를 막아 싸워서 흉노 선우(單于)의 군을 격파하였다. (선우는 흉노를 이끄는 황제의대장의 호칭으로,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효성왕과 싸운 선우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蒙恬)을 보내 [[서융|융적]](戎狄) 즉 흉노를 토벌하여 하남의 땅([[오르도스 지방]])을 점령하고 흉노를 축출한 뒤, 감숙(甘肅)에서 요동(遼東)까지 [[만리장성|장성]]을 쌓아 북방 기마민족들의 침공을 막았다. 당시 흉노의 [[두만 선우|두만]](頭曼, {{llang|tr|Tumen, Teoman}})은 여러 차례 중국을 공격하다 화평을 맺었는데, 두만은 기원전 210년에 사망하기 직전에 [[황하]](黄河)를 넘어서 화평의 걸림돌이 되는 자신의 태자인 묵돌(冒頓)을 인질로서 서쪽의 [[월지국]](月氏國)에 보냈다. 보낸 직후 월지를 공격하여 아들을 죽이려 했고, 가까스로 월지를 빠져나온 묵돌은 귀국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모아 자신을 죽이려는 아버지 두만 선우를 시해하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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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0년]]경 흉노에서는 선우 자리를 놓고 수십개의 부족으로 분열되어 내전이 일어났으며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는 [[기원전 51년]] 한나라의 지원을 얻었다. 한나라의 지원을 받은 호한야에 의해 흉노는 재통일되었으며 전한과 화친을 맺었고, 이는 [[전한]]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때 질지(郅支) 선우는 [[서흉노]]를 이끌었는데, 후에 동흉노에 패하여 다시 흡수되었지만, 일부 집단은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시기 흉노의 내분과 약화의 원인으로는 당시 몽골 고원이 한랭화되었던 것을 지목하기도 한다.
 
[[왕망]](王莽)이 [[신나라|신]](新)을 건국한 직후 흉노와 중국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어 이 시기에 흉노가 신나라를 침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한]]이 건국된 시점에서는 흉노는 수십개 부족으로 다시 분열된 상태였으며 그 수도 많지 않았는데 이중 남흉노는 후한에 복속되어 오르도스 및 [[산시 성 (산서성)|산시 성]](山西省) 일대에 거주했으며, 북흉노는 몽골 고원에 남았다. [[89년]]에 후한과 남흉노의 연합군은 북흉노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북흉노의 일파는 서방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이때 서방으로 향한 북흉노를 훈족으로 보기도 한다. 북흉노의 멸망 직후 몽골 고원에는 선비(鮮卑)·오환(烏桓) 등의 다른 유목 부족들이 성립되었다.
 
남흉노는 중국의 번병(番兵) 역할을 하며 오르도스 및 산서 일대에서 북방을 방어하였다. 후한은 남흉노의 군대를 용병으로 활용하였고 선비, 오환, 강(羌) 등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선우에 대해서 흉노의 여러 유력자들은 많은 불만을 가졌으며 이로 인해 선우와 흉노의 유력자들 간에는 끊임없는 알력이 존재하였다. 또한 후한 말기에 오면 남흉노에게도 간섭하여 선우의 직위는 크게 실추되고 위태로워졌다. [[삼국 시대 (중국)|삼국 시대]]에는 [[조조]](曹操)에 의해 흉노의 선우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흉노는 5부로 재편되어 중국의 실질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