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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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광산 김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63명(문과 갑과 장원급제자 12명), 정승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을 배출했다.<ref>무과 276명, 생원 350명, 진사 402명 등을 모두 합치면 1,028명이다.</ref> 양간공파 대사간 김극뉴의 후손인 [[김장생]]이 문묘에 종사되었고, 그의 아들 [[김집 (1574년)|김집]]은 [[문묘]]와 [[종묘]]에 배향되었다. [[김장생]] 후손 중에 대제학이 7명이나 배출되었다.(문형으로 불리는 양관대제학은 7명이나, 예문관 대제학(홍문관 설치 이전)을 지낸 김한로를 포함하면 8명이 된다.) 서석 김만기와 서포 김만중 형제는 나란히 대제학에 올랐다. 김만기의 아들 김진규가 예조판서에 대제학, 그의 아들 김양택 또한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다. 한 가문에서 3대가 대제학, 형제가 대제학을 배출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도 광산 김씨는 명문가로 명신과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최고의 영예인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인 [[김집 (1574년)|김집]]을 배출해 [[반남 박씨]], [[은진 송씨]], [[덕수 이씨]], [[여주 이씨]], [[진보 이씨]]와 함께 6대 국반(國班)의 대열에 올랐다. 특히나 [[문묘]] 종사 현인을 한 가문에서 2명을 배출한 것은 은진 송씨(恩津 宋氏) 송시열, 송준길과 광산 김씨(光山 金氏) 김장생, 김집 뿐인데 송시열, 송준길이 사계 김장생의 제자들이고 보면 광산 김씨의 업적은 실로 조선시대 유일무이한 업적이다. 그들이 양간공파 대사간 김극뉴 후손들인 [[김장생]]·[[김집]] 부자이다.
 
이밖에 정승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을 배출하고, 문과 갑과 장원급제자 12명, 문과 급제자 263명을 배출했다.<ref>무과 276명, 생원 350명, 진사 402명 등을 모두 합치면 1,028명이다.</ref> [[김장생]] 후손 중에 대제학이 7명이나 배출되었다.(문형으로 불리는 양관대제학은 7명이나, 예문관 대제학(홍문관 설치 이전)을 지낸 김한로를 포함하면 8명이 된다.)
 
서석 김만기와 서포 김만중 형제는 나란히 대제학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김만기의 아들 김진규가 예조판서에 대제학, 그의 아들 김양택 또한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다. 한 가문에서 3대가 대제학, 형제가 대제학을 배출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 분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