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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
[[파일:Baekje Ambassador.jpg|섬네일|왼쪽|<양직공도>에 나오는 백제 사신의 모습<ref><양직공도>는 양나라의 원제(元帝)인 소역(蕭繹, 505∼554)이 제위(帝位)에 오르기 전인 형주자사(荊州刺史) 재임시(526∼539)에 편찬한 도서(圖書) 이다</ref>]]
백제의 언어, 풍속, 의복은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상무적인공격적인 기풍을 간직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에서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반역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범은 목을 베었고참수했고, 도둑은 귀양을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형에 처하였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선진문화를중국 문화를 수용하였다.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관청의 세무에도 밝았다. 투호와 음주, 바둑, 장기는 백제 지배층이 즐기던 오락이었다.<ref>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127쪽</ref>
 
==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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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와 사상 ===
《[[주서]]》(周書)는 백제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고 기록하고 있다.<ref>{{서적 인용 |제목= [[주서]] | 저자= 영호덕 등 |연도= 636 |장= [[:zh:s:周書/卷49#百濟|주서 권49 백제]] |인용문= 僧尼寺塔甚多,而無道士。}}</ref> 백제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ref>{{서적 인용 |제목=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 저자= 조법종 |연도= 2007 |출판사=청아출판사 |쪽= 200 |id={{ISBN|978-89-368-0359-9}} |인용문= 중국사서 《주서》는 백제의 역사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ref> 불교는 384년([[침류왕]] 1) 서역의 승려인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ref name="ReferenceA">{{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4/침류왕|본기 권24 침류왕]] |인용문= 秋七月 遣使入晉朝貢 九月 胡僧摩羅難陁自晉至 王迎之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 (가을 7월에 사신을 진(晉)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陁)가 진나라에서 왔다.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모셔 예우하고 공경하니, 불교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ref> 이듬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4/침류왕|본기 권24 침류왕]] |인용문= 二年 春二月 創佛寺於漢山 度僧十人 冬十一月 王薨 (2년(385) 봄 2월에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열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ref> 백제의 [[불교]]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577년(위덕왕)에 착공해<ref>《[[삼국사기]]》에는 [[600년]](법왕 2년) 봄 정월에 법왕이 왕흥사를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7/법왕|본기 권27 법왕]] |인용문=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 그러나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 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백제 위덕왕|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실제 창건 연도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ref> 634년(무왕 35)에 완성된 [[왕흥사]](王興寺)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599년(법왕 1)에는 불교적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국왕의 명이 있었으며,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불태운 적도 있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7/법왕|본기 권27 법왕]] |인용문= 法王 ... 冬十二月 下令禁殺生 收民家所養鷹鷂放之 漁獵之具焚之 (법왕(法王)은 ... 겨울 12월에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거두어 놓아주게 하였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하였다. )}}</ref> 백제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으며 [[겸익]]이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한편 [[백제금동대향로]]로 미루어 보아 도가사상과도가와 신선사상이신선 사상이 발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경문전이나 [[사택지적비]]에도 도교사상의 영향이 발견된다. 또 백제는 낙랑·대방의 한인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역사서인 〈[[서기 (역사서)|서기]]〉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를 둘 정도로 유교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했다.
 
=== 건축 ===
백제는 삼국 가운데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다. 7세기, 신라가[[신라]]가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을건설할 때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가 초빙된 사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유사]] | 저자= [[일연]] |연도= 1281 |장= [[:s:삼국유사/탑상/황룡사9층탑|탑상 - 황룡사9층탑]] |인용문=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將 唐 帝所賜經像袈裟幤帛而還國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德王 議於群臣群臣曰請工匠於百濟然後方可乃以寳帛請於百濟匠名 阿非知 受命而來經營木石伊于 龍春 一云 龍樹 幹蠱率小匠二百人(정관 17년 계묘 16일에 당 황제가 하사한 경전·불상·가사·폐백을 가지고 귀국하여 탑을 건립하는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선덕왕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 (阿非知)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 용춘 (龍春) - 혹은 용수(龍樹)라고 쓰기도 한다- 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ref> 이나 일본 초기 사원을 창립하기 위하여 사공(寺工)과 기와 만드는 기술자 등이 건너간 사실에서 백제 건축술의 발전상을 짐작할 수 있다.<ref>{{서적 인용 |제목=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 저자= 조법종 |연도= 2007 |출판사=청아출판사 |쪽= 200 |id={{ISBN|978-89-368-0359-9}} |인용문= 백제는 삼국 가운데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을 때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가 초빙된 사실이나 일본 초기 사원을 창립하기 위하여 사공(寺工)과 기와 만드는 기술자 등이 건너간 사실에서 백제 건축술의 발전상을 짐작할 수 있다.}}</ref> [[동성왕]] 때의 임류각, [[의자왕]] 때의 태자궁·망해정 등을 비롯해 많은비롯한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기록은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으며, 익산의 [[미륵사지]]를 비롯한 절터와 석탑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부여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정림사지 오층석탑]],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등이 유명하다. 불교와 관련된 조각품으로는 석불과 금동불, 불상 등이 있다. 고분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와 [[공주시]]·[[부여군]] 일대에 많이 있는데,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후기에는 중국 [[남조 (왕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축분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양과의 활발한 교류를 반영하는 국제적으로 세련된양나라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의 건축은 절터 ·탑 ·고분에서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절터로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소재의 백제전라도 최대의 미륵사지가 있고 이 곳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동양 최대의 것으로 목조탑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우아하고우아한 세련되어곡선으로 안정감을 주며 삼국시대백제의 석탑 중에 가장 우수하다.
 
백제의 분묘는 시체를 가매장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발굴해 내어 그 뼈를 깨끗이 씻고 장례 의식을 행한 후 다시 매장하는 복장이 가능한 석실묘의 전통과 현실 벽화의 내용면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동시에 중국 남조의 전실 고분의 형태까지 받아들인 것으로, 당시 그들과 활발한그들로부터 문화교류가문화를 있었음을전수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백제 [[한성]]시대의초창기의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것이 대표적인데, 이는 [[졸본]] 지방의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적석총]]이며, [[웅진]]시대의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송산리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굴식 돌방]] 고분이다.
 
또한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무령왕릉은 연화문의 벽돌로 된 [[아치|아치형]]의 벽돌무덤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 ·석수 ·동자상 ·청동경 ·자기 ·지석 ·금은 장신구 등이 있는데, 이 고분을 통해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를 지내는 예법은 물론, 특히 삼국간의 문화교류,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고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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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그림은 능산리 고분의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와 송산리 고분의 [[신수도]]가 우아하고 섬세한 면을 표현해 주고 있으며, 화가로는 [[백제 위덕왕|위덕왕]]의 왕자로 일본에 건너가서 [[쇼토쿠 태자]]를 그린 [[아좌태자]]와 백제 말기에 일본에 건너가 [[산수화]]를 전하고 사천왕상을 남긴 하성이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사택지적비|사택지적비문]](사륙변려체), [[무령왕릉]]의 지석([[해서체]]) 등이 있다.
 
백제의 음악은 5∼6세기에 중국 남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음악이 소개된 것이 있고,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의 음악가가 일본에왜에 건너가 음악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에는 고 ·각 ·[[공후]] ·[[쟁]]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7세기 초 백제의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 (삼국)|오나라]]에서 배운 음악을 일본에왜에 전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 국제적인 문화교류 ===
백제는 [[양나라|양]]을 비롯한 중국 [[남조 (왕국)|남조]]의 각국과 활발하게각국으로부터 문화를 교류했다전수받았다. 양나라에는 사신을 보내어 불교 등의 경서와 모시박사·공장·화사를 청하는 등 문화수용에중국의 적극적인문화를 노력을수용하기도 기울였다하였다. 한편 백제의 종교와 문화는 [[왜]]에 전파되어 아스카 문화를 발흥시키는데 영향을 주었다. 한성시대에는백제 초기에 아직기·왕인 등이 왜에[[왜]]에 한학과 유교를 전했는데, 특히 왕인은 〈[[천자문]]〉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오경박사가 교대로 [[왜]]국에 파견되었으며 기술자인 봉녀·야공·양주인을 비롯해 와박사·조사공 등의 건축기술자도건축 기술자도 파견되었다.
 
=== 백제시대 주요 문화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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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와의 관계 ===
{{본문|고구려 백제 전쟁}}
초기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그 근원이 [[부여]]에서 나온 것으로 인식하여 우호적이었지만, [[고국원왕]] 39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한 이래로 사이가 나빠졌다나빠졌고, [[고국원왕]] 41년 백제가 평양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하자, 백제와 고구려는 원수지간이 되었다.<ref>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18년</ref> 이 상황은 [[나제동맹]] 결렬 직전까지 계속된다. 당시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감정을 보여주는 일화로 [[광개토왕릉비]]에는 백제를 백잔(百殘)으로 낮춰 부르기도 하였다불렀다. 잔(殘)은 잔인하다, 흉악하다는 뜻이다.
=== 신라와의 관계 ===
[[240년]] 백제는 신라를 침공하였다.
{{본문|나제동맹}}
=== 중국 왕조와의 관계 ===
[[근초고왕]]은 백제 역사상 최초로 중국 사서에 처음으로 이름이 기록된 왕으로백제왕으로 알려져 있다. 《[[진서|진서(晉書)]]》에 따르면, 백제는 372년(근초고왕 27년) 음력 1월과 음력 6월에 [[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ref>[[:s:zh:晉書/卷009|晉書/卷009]], 簡文皇帝...咸安...二年春正月辛醜,百濟、林邑王各遣使貢方物。... 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領樂浪太守。</ref> [[동진]]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려고 하는 백제의 기본 외교 자세는 침류왕 대에도 계속되었다. 침류왕 즉위년(384년) [[7월]]에도 백제는 동진에 조공을 하였다. 또, 동년 음력 9월에 [[동진]](東晉)에서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오자, 궁중에 머물게 하고 예로써 대접하였다. 백제의 [[불교]]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ref name="ReferenceA"/> 470년, [[송 (남조)|송 왕조]] 시기에도 사신을 보냈으며, 472년에는 [[북위 (북조)|북위]]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다. [[개로왕]]은 북위에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백제의 [[무령왕]]과 [[성왕 (백제)|성왕]]은 [[양 (남조)|양]]에 여러 차례 사신들을 보냈고 귀족 칭호들을 받았다. 무령왕릉은 중국의 특징적인 무덤 양식인 벽돌 무덤이기도 하다.
 
==== 요서 경략설 ====
백제가 중국의 [[랴오시|랴오시 지방]]을 점령하고 진평군과 진평현에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4세기부터 6세기 초 혹은 중엽까지 대략 200년간 지배했다는 설이다가설이다.<ref>출처: 한국사강좌 - 1. 고대편, 이기백. 이기동</ref> 이러한 학설은《[[송서]]》, 《[[양서]]》 등의 남조계 사서에 기록된 백제의 요서 지방 점령 기록에서 비롯한 것이다. 다만 지리적으로 랴오시 지방과 인접한 북조계 사서에서는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학계에서 지속적인 논란이 되어왔다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계의 시각이 대세이지만<ref>유원재, 〈"백제 략유(略有)요서" 기사의 분석〉,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ref>, 최근에는 다시 백제의 요서 진출을 신중하게 실재한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ref name=autogenerated1>강종훈,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30, 한국고대사학회, 2003</ref>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는 《국사》교과서에는 1990년 이전까지 백제가 요서를 공격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1990년 이후부터 진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편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진출을 부정하는 것이 주류이지만<ref>유원재, 〈"백제 략유(略有)요서" 기사의 분석〉,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ref>, 최근에는 다시 [[환단고기]] 등을 지지하는 일부 민족주의 사학자에 의해 백제의 요서 진출을 실재한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제기되었다. 전통적으로 [[재야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 경략을 인정하는 편이다. [[대륙사관]]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백제의 위치를 한반도 서남부가 아닌 [[황하]]와 [[장강]] 사이에 비정하면서, 백제의 요서 경략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백제의 요서 경략 시기에 대한 문제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송서》, 《양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요서 경략 시기는 [[진 (위진남북조)|진]](晉) 말기로,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이후라고 한다. 고구려가 요동을 명백하게 점령한 시기는 [[광개토왕]] 때(391년~413년)의 일로 이 시기의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요서에 진출할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385년 일시적으로 요동을 점유하였을 때 백제의 요서 진출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ref name=autogenerated1 /> 한편 요서 경략 시기에 대해 [[신채호]]는 [[근구수왕]] 때, [[정인보]]는 [[책계왕]]·[[분서왕]] 때, 김상기·김철준은 근초고왕 때로 보는 등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또한 [[삼국사기]], [[남제서]] 등에는 490년에 위나라(북위)의 기병이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가 이를 물리친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이 시기까지도 백제가 요서지방이나 기타 해외에 영토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위나라를 고구려의 오기로 보아 인정하지 않는 견해도 있으며편이며, 또는 같은 기록에 백제 측의 전공으로 '선박을 쳐부순 것[拔臺舫]'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나라가 실제로 함대를 보내 침공해 왔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등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ref>이문영,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2010, 237쪽</ref>
 
=== 일본과의왜과의 관계 ===
 
==== 3세기 이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