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7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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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 Gregorius VII.: (1015-1073-1085) kidnapped by Cencio I. Frangipane on 25 Dec. 1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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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때부터 2년여 동안 하인리히 4세는 [[작센 전쟁]] 때문에 그와 사이좋게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1074년 5월 하인리히 4세는 과거 그레고리오 교황이 파문한 교회회의 위원들과 친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한 죄를 뉘우치기 위해 [[뉘른베르크]]에서 교황 특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해성사를 본 다음 교황에게 순명을 맹세하고,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처음에는 교황으로부터 신임을 얻은 그였지만, 1075년 6월 9일 [[랑엔살자 전투 (1075년)|랑엔살자 전투]]에서 작센 공국을 굴복시키자마자 곧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주저없이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다시 주장하였다. 그는 파타리아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에버하르트 백작과 테달도 신부를 각각 롬바르디아와 밀라노 대교구에 보냈다. 그리고 오랫동안 질질 끌었던 문제였던 노르만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와의 동맹 관계를 다시 맺으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하인리히 4세의 행동에 대해 그레고리오 7세는 1075년 12월 8일 다소 거친 언사가 담긴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응수했다. 서신에서 그는 교황에게 순명하지 않아 끝내 파문당한 성직자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 하인리히 4세의 행동을 비판했다. 동시에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암시하는 구두 메시지도 적어 보냈다. 즉, 그의 책임으로 보일 수 있는 대죄들 때문에 그가 교회에서 추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위도 박탈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1075년 그레고리오 7세는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를 집전하던 중에 반대자 [[첸시오 1세 프라지파네프란지파네]]라는([[:en:Cencio 과격한I 반대자의Frangipane|en]])의 기습을 받아 인질로 끌려 갔으나납치됐으나, 그를 매우 존경하던 로마 시민들이 힘을 합쳐 첸시오 1세의 저택을 찾아가 공격함으로써 위협을 느낀 첸시오 1세에 의해 다음날 풀려났다.
 
=== 교황과 황제의 격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