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보니파시오 9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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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9년 후반기에는 특히 과거 [[카타리파]]가 준동하였던 프로방스 지역에서 비안키 혹은 알바티(하얀 속죄자)라고 불리는 채찍으로 스스로 자기 몸을 편태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이러한 운동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북부에 퍼져나갔다. 이들은 과거 1348년에서 1349년까지 [[흑사병]]이 창궐한 시기에 채찍질 고행단이 대규모로 전국을 돌아다니던 불편한 기억을 되살렸다. 이들은 등 부분에 붉은색 십자가를 그린 긴 흰색 옷을 입고 얼굴에는 두건을 뒤집어 썼으며, 커다란 십자가를 든 지도자를 따라 행진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여기에 곧 종말이 올 것이라거나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는 등의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들은 성가 [[스타바트 마테르]]를 부르며 행진했다. 하얀 속죄자들이 신봉자들을 끌어 모으면서 로마로 오자 보니파시오 9세와 교황청은 잠시나마 그들의 종교적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로마에 이르렀을 때, 보니파시오 9세는 그들의 지도자를 화형에 처했고 그들은 곧 뿔뿔이 흩어졌다. 《가톨릭 백과 대사전》의 설명에 의하면, 보니파시오 9세는 선동가들과 음모꾼들의 쉬운 먹잇감이었던 이 정처 없이 떠도는 무리를 점점 경계하다가 결국엔 해산하였다.<ref name="Catholic"/>
 
잉글랜드에서는 [[존 위클리프]]가 교황이 주교직이나 아빠스직수도원장직([[아빠스]])<ref>아빠스(라틴어: Abbas)는 라틴어로 아버지를 뜻하며,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베네딕도 규칙서를 따르는 수도회들과 일부 특정 기독교 수도회들에서 속한 자립 수도원(교구급 자치수도원장과는 별개임)의 원장을 일컫는 명칭이다.</ref> 등 높은 지위나 좋은 성직록이 공석이 될 때 교황이 자신의 이익이나 호감을 고려하여 마음에 둔 후임자들을 미리 정하는 관례에 대해 반대사면서 교황에 적대적인 설교를 하였다. 보니파시오 9세는 annates perpetuæ라는 수익을 도입해서 로마 교황청으로 하여금 모든 성직록의 첫 해 수입 절반을 저축하게 하였다. 교황의 대리인들은 또한 단순히 공석인 자리의 성직록만 판매한 것이 아니라 공석이 예정된 자리의 성직록까지 판매하였다. 그리고 성직록을 판매한다 해도 다른 사람이 그 성직록에 대해 더 많은 액수를 제시한다면 교황은 먼저 판매한 것을 무효화하였다. 당시 니하임의 디트리히는 같은 성직록이 일주일에 여러 번 팔리는 것을 목도하였고, 심지어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던 와중에 자기 비서들과 사업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냉혹하게 기록하였다. 서구 대이교 기간 동안 교황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잉글랜드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잉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성직 후임자법과 교황 존신죄법을 승인하고 확장했으며,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잉글랜드 영토 안에서의 교황 임명권에 대한 비토권을 부여했다. 보니파시오 9세는 잉글랜드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여 뒤로 물러났으며, 오랜 논쟁 끝에 마침내 잉글랜드 왕이 흡족할 만한 소득을 얻었다. 그렇지만 1396년 런던 시노드에서 잉글랜드의 주교들은 위클리프를 단죄했다.<ref name="Catholic"/>
 
독일에서는 1400년 8월 20일 선제후들이 렌스에서 회합을 가져 쓸모 없는 [[바츨라프 4세]]를 독일 국왕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바이에른 공작 [[루프레히트]]와 [[궁정백]] 라인을 새 독일 국왕 후보자로 골랐다. 1403년 보니파시오 9세는 바츨라프 4세와 퇴위와 새 국왕으로 루프레히트를 인정함으로써 상황을 최대한 활용했다.<ref name="Cathol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