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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2년에 [[고려]] 시대에 우정언(右正言)을 역임한 [[이존오]](李存吾)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1371년에 이존오가 사망하면서 전객녹사(典客錄事)에 특임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우현보]](禹玄寶)의 문인으로 활동했고 1383년에는 문과에 급제했다. [[공양왕]] 시절에는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올랐지만 1392년에 [[정몽주]]가 피살되면서 계림에 유배되었다.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충청도 공주에 은거했고 1399년에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등용되었다. 1400년에는 이방간의[[회안대군]](이방간)이 난을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추충좌명공신[[조선 태종|태종]](이방원)으로부터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2등에 올랐고 나중에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계림군(鷄林君) 칭호를 받게 된다.
 
1402년에는 첨서승추부사(僉書承樞府事),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공조 (육조)|공조]](工曹) 판서로 임명되었다. 1404년에는 정조사(正朝使) 자격으로 [[명나라]]를 방문했고 나중에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명되었다. 1405년에는 [[예문관]] 대제학, 1407년에는 경연관(經筵官), 좌빈객(左賓客)으로 임명되었으며 1408년에는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겸 판경승부사(判敬承府事)로 임명되었다. 1416년에 사망한 이후에 [[종묘]]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