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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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평양직할시|평양]] 진향리 출신으로 1928년 결림보통학교 입학, 1939년 3월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평양직할시|평양]] 출신으로 1941년 일본 요코하마 고공(橫浜高工) 건축과를 졸업했고, 1945년 조선주택영단 기수(技手)로 재직했으며, 194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1952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국제예술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도불(渡佛)하여 1956년까지 르코르뷔지에 연구소에서 건축학·도시계획 등을 연구했다. 귀국과 함께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설립,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개인전을 가졌고 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1956년 이래 국전 심사위원, 1961년 문화재 보존위원, 1961년-1963년 문화자유회의전 준비위원, 1965년 현대작가초대전 운영위원을 역임했다.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1963년 도미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의 한국관 설계를 담당했다. 대표 작품으로 부산대학교 본관, 건국대학교 도서관, 서강대학교 본관, 프랑스 대사관, 뉴욕 세계박물관회 한국관, [[31빌딩]] 등이 있다. 김중업이 설계한 유유산업 안양공장 건물이 리모델링되어 김중업박물관이 설치되었다.
도일 1939년 일본 요코하마 고공(橫浜高工) 건축과에 입학 나카무라 준페이中村順平를 사사, 1941년 12월 졸업했고, 1942년 1월부터 1944년까지 마츠다히라타설계松田平田設計에서 근무(태평양전쟁 대체복무)해다. 1942년 5월12일 김병례와 결혼. 1944년 4월 귀국한다.
1945년 조선주택영단 기수(技手)로 재직했으며, 194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국제예술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가 프랑스로 건너가 르코르뷔지에 아틀리에에 견습생으로 시작해서 정직원이 되어 1956년까지 일한다.
귀국과 함께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설립,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개인전을 가졌고 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1956년 이래 국전 심사위원, 1961년 문화재 보존위원, 1961년-1963년 문화자유회의전 준비위원, 1965년 현대작가초대전 운영위원을 역임했다.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1963년 도미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의 한국관 설계를 담당했다.
대표 작품으로 부산대학교 본관, 건국대학교 도서관, 서강대학교 본관, 프랑스 대사관, 뉴욕 세계박물관회 한국관, [[31빌딩]] 등이 있다. 김중업이 설계한 유유산업 안양공장 건물이 리모델링되어 김중업박물관이 설치되었다.
 
== 안양김중업박물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