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5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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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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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5세''' (Henry V, [[1086년]] [[8월 11일]] – [[1125년]] [[5월 23일]])은 [[잘리어 왕가]]의 네 번째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로서, [[1099년]]부터 [[독일의 군주|독일 왕]]이었고 [[1111년]]부터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아버지 [[하인리히 4세]] 때부터 격렬히 진행된 [[서임권 투쟁]]은 하인리히 5세의 재위 기간에 [[보름스 협약]](1122년)을 낳았고, 이는 곧 황제권의 쇠퇴를 뜻했다. 잉글랜드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1114년에 결혼하였으나 아들을 얻지 못해 잘리어 왕조가 단절되었다.
 
== 생애 ==
=== 왕위 계승과 대관식계승 ===
[[108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사보이의 베르타]]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에 황제인 아버지와 교황 사이에서 교회의 서임권을 둘러싸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의 형인 [[이탈리아의 콘라트|콘라트]]는 십자군 운동을 제창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를 따르기로 하면서 아버지와는 반대편에 섰다. 이때문에 하인리히 4세는 [[1098년]]의 [[마인츠]]의 왕국 회의에서, 장남 대신에 차남 하인리히를 독일 왕위 계승자로 정했고 [[1099년]] [[1월 6일]]에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교회와 화해하지 않는 상황에서 완전한 권위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파문 해제를 전제로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한 하인리히 4세는, 이를 위해 영주들에게 분쟁의 제한을 가했다. 이러한 제한에 영주들은 불만을 가졌고, 그들과의 다툼을 두려워한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를 희생하여 자신의 왕위 계승을 확실히 하려고 바이에른의 영주들과 협약을 맺은 후 [[1104년]] 반기를 들었다. 유력 영주들과 로마 교황마저 하인리히 5세를 지지하게 된 상황에서 하인리히 4세는 쾰른으로 도망쳤다가 마인츠에서 감금되고, [[1105년]]에 퇴위당했다. 비록 왕위를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던 하인리히 4세는 리에주로 달아났다가 [[로렌]] 지방 사람들과 연합해 [[1106년]]에 하인리히 5세의 군대를 무찔렀다. 그러나 몇 개월 뒤 하인리히 4세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유력 영주들과 로마 교황마저 하인리히 5세를 지지하게 된 상황에서 하인리히 4세는 쾰른으로 도망쳤다가 마인츠에서 감금되고, [[1105년]]에 퇴위당했다. 비록 왕위를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던 하인리히 4세는 리에주로 달아났다가 [[로렌]] 지방 사람들과 연합해 [[1106년]]에 하인리히 5세의 군대를 무찔렀다. 그러나 몇 개월 뒤 하인리히 4세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1110년]]에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딸인 [[잉글랜드의 마틸다|마틸다]]와 약혼한 뒤 [[1114년]]에 결혼했으나 둘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
 
=== 로마원정과 황제 대관식 ===
하인리히 5세는 [[서임권 투쟁]]을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110년]]부터 대규모의 [[로마]] 원정을 감행했다. 대규모 군사 앞에 놓여진 [[교황 파스칼 2세]]는 하인리히에게 서임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독일 교회에 지시를 내려 황제에게 하사받은 토지와 권리를 반환도록 하겠다는 제안을 건넸고, 하인리히는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대관식까지 진행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