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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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경순왕]] 8자(子)들의 이름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묘지명 형태도 배위(配位) 관계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1814년]] 김계락(金啓洛)이 찬하고,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에 [[경순왕]]은 전비 박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태자(太子), 차자(次子), 영분공(永芬公)이며, 딸은 고려 경종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후비 왕씨와는 5남 2녀를 두었는데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이며, 장녀(長女)는 이금서(李金書), 차녀(次女)는 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1자 일(鎰), 2자 황(湟), 3자 명종(鳴鍾)을 배척하고, 5자 ‘중석’'''중석'''(重錫)을 ‘석’'''석'''(錫)으로, 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였다.
 
[[1887년]] 숭혜전(崇惠殿) 건립 때 대제학 김창희(金昌熙)가 [[경주 김씨]] 분파(分派) 시말을 편찬한 《김씨 분관록》에 [[경주 김씨]]는 [[경순왕]]의 후예라 하고, [[경순왕]] 왕자들인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덕지(德摯), 의성군(義城君) 석(錫), 언양군(彦陽君) 선(鐥) 삼척군(三陟君) 추(錘)는 분적하여 울산, 의성, 언양, 삼척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김창희(金昌熙)는 그의 증조부 [[김사목]]이 추기한 《김은열 묘지명》의 경순왕 8자(子)들을 모두 배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