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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셰크 푸쉬카리니 근처에는 1호탑과 또는 렐릭 스투파(Relic Stupa)가 있다. 이곳에 리차비인들은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 이후에 받은 유품 여덟 부분 중 한 부분을 경건하게 모셨다. 석가모니 부처는 입멸 석 달 전에 바이샬리에서 마지막 하안거를 보내고, 어느 날 탁발을 하고 돌아오는 언덕에서 그를 모시던 제자 아난다(아난존자)에게 "아름다운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가 바이샬리를 떠나 쿠시나가르로 향했을 때, 리차비인들은 그를 따라 쿠시나가르로 가려 했다. 석가모니 부처는 그들에게 자신이 가진 발우를 주며 돌려보냈지만 그들은 거절했고, 이에 석가모니 부처는 신통력으로 강의 환상을 만들어내서 자신을 따라 오려는 리차비인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장소는 아소카 대왕이 나중에 탑을 세운 오늘날 케살리야 마을의 데오라와 동일시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아난다(아난존자)는 바이샬리 외곽의 갠지스강 한가운데서 열반에 들었다.
 
== 바이샬리의 석가모니 부처 ==
Vaishali is well known for its close association with the Buddha. After leaving Kapilavastu for renunciation, he came to Vaishali first and had his spiritual training from Ramaputra Udraka and Alara Kalama (Alark Ram). After the Enlightenment the Buddha frequently visited Vaishali. He organized his Bhikshu Sangha on the pattern of Vaishalian democracy. It was here that he established the Bhikshuni Sangha, initiating his maternal aunt Maha Prajavati Gautami into the order. His last Varshavasa (rainy season resort) was here and he announced his approaching Mahaparinirvana (the final departure from the world) just three months in advance. Before leaving for Kusinagara, where he died, he left his alms-bowl (Bhiksha-Patra) here with the people of Vaishali.
바이샬리는 석가모니 부처와 인연이 깊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출가한 뒤 가장 먼저 바이샬리에 와서 라마푸트라 우드라카와 알라라 칼라마로부터 영적 훈련을 받았으며,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바이샬리를 자주 방문했다. 그는 바이샬리에서 이루어지던 민주주의의 패턴을 따서 자신의 교단(상가)를 조직했다. 그가 ==
[[File:Mahajanapadas (c. 500 BCE).png|left|thumb|200px|16대국 시절의 밧지(혹은 브릿지). 기원전 600년.]]
[[File:Ablution bath, Vaishali.jpg|left|thumb|200px|''아비셰크 푸쉬카리니(즉위의 연못)'', 바이샬리에 위치한 석가모니 부처 렐릭 스투파 옆에 있다.]]
[[불교]]와 [[자이나교]]의 출현 이전에도 바이샬리는 [[리차비족|리차비 국]]의 수도였다. 그 시기에 바이샬리는 고대 대도시였으며 바이샬리 공화국의 수도였으며, 현재의 인도 비하르 주의 [[히말라야]] - [[갠지스강]]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ref>{{Cite web|url=http://bstdc.bih.nic.in/Vaishali.htm|title=BSTDC|website=BSTDC|accessdate=26 December 2019}}</ref><ref>[https://www.britannica.com/place/Vaishali Vaishali] – [[Encyclopædia Britannica]]</ref> 그러나, 바이샬리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비슈누 푸라나]]는 바이샬리를 다스렸다는 34명의 왕을 기록하였는데, 바이샬리의 초대 국왕 ''나바가(Nabhaga)''는 인권의 문제로 자신의 왕위를 내놓고 "나는 이제 땅을 자유롭게 경작하는 사람이 되었소. 내 땅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 되었소."라고 선언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34명 중 마지막은 [[힌두교]]의 신 라마 왕자의 아버지인 다사라타(Dasaratha)의 동기로 여겨지는 ''스마티(Sumati)''였다.
 
바이샬리는 불전문학 뿐 아니라 많은 민담에 등장하는 유명한 유녀 암바팔리가 활약했던 땅으로도 유명하다. 암바팔리는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 마누데프는 바이샬리의 연맹을 이루고 있는 저명한 리차비 가문의 유명한 왕이었는데, 그는 바이샬리에서 그녀의 춤 공연을 본 후 암바팔리를 소유하기를 원했다.<ref>{{Cite web|url=https://timesofindia.indiatimes.com/life-style/books/features/Amrapali-was-more-than-a-luscious-courtesan/articleshow/12517919.cms|title=Amrapali was more than a luscious courtesan - Times of India|website=The Times of India|accessdate=26 December 2019}}</ref>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아비셰크 푸쉬카리니(Abishek Pushkarini, 즉위의 연못)라는 인공 호수가 있는데 바이샬리의 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하던 곳으로, 호수의 물을 바이샬리의 지도자로 새로 선출된 자의 머리에 부었다고 한다. 호수 인근에는 일본의 법화종 계열의 불교 종파인 닛폰잔 묘호지 대승가(日本山妙法寺大僧伽)가 지은 일본식 불교 사찰과 비슈와 샨티 스투파(세계평화탑)가 서 있다. 바이샬리에서 발견된 석가모니 부처의 유물의 작은 부분이 스투파의 기단과 차트라에 안치되어 있다.
 
아비셰크 푸쉬카리니 근처에는 1호탑과 또는 렐릭 스투파(Relic Stupa)가 있다. 이 렐릭 스투파에 리차비인들은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 이후에 받은 유품 여덟 부분 중 한 부분을 경건하게 모셨다. 그가 바이샬리를 떠나 쿠시나가르로 향했을 때, 리차비인들은 그를 따라 쿠시나가르로 가려 했다. 석가모니 부처는 그들에게 자신이 가진 발우를 주며 돌려보냈지만 그들은 거절했고, 이에 석가모니 부처는 신통력으로 강의 환상을 만들어내서 자신을 따라 오려는 리차비인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장소는 아소카 대왕이 나중에 탑을 세운 오늘날 케살리야 마을의 데오라와 동일시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아난다(아난존자)는 바이샬리 외곽의 갠지스강 한가운데서 열반에 들었다.
 
== 바이샬리의 석가모니 부처 ==
바이샬리는 석가모니 부처와 인연이 깊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출가한 뒤 가장 먼저 바이샬리에 와서 라마푸트라 우드라카와 알라라 칼라마로부터 영적 훈련을 받았으며,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바이샬리를 자주 방문했다. 그는 바이샬리에서 이루어지던 민주주의의 패턴을 따서 자신의 교단(상가)를 조직했다. 그가 비구승가를 세우고 외숙모 마하 프라자바티 고타미의 출가를 받아들인 곳도 이곳 바이샬리에서였으며, 석가모니 부처는 입멸 석 달 전에 바이샬리에서 마지막 [[하안거]]를 보내고, 어느 날 탁발을 하고 돌아오는 언덕에서 그를 모시던 제자 아난다(아난존자)에게 "아름다운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열반을 예고하였다. 쿠시나가라로 떠나기 전, 석가모니 부처는 바이샬리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 자신의 발우를 남겼다고 한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