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클레멘스 7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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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스 7세가 재위하던 당시 유럽 대륙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신성로마제국]] 및 스페인과 [[발루아 왕가]] 통치하의 [[프랑스 왕국]] 두 강대국 간의 대립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왕국은 유럽 패권 다툼에서 특히 [[이탈리아 반도]]를 서로 먼저 손에 넣으려고 대립하고 있었다.
카를 5세의 지지속에 교황에
클레멘스 7세의 오락가락하는 정책은 교황청 안에 친독일파의 출현을 낳았다. 1526년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의 사병들은 [[바티칸 언덕]]을 약탈하였으며, 로마 시 전체가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의 손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굴욕을 당한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 편으로 다시 돌아서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콜론나 추기경이 [[나폴리 왕국|나폴리]]로 떠나자 약속을 저버리고 도리어 콜론나 추기경을 파면하였다. 카를 5세는 교황은 목자가 아니라 늑대라고 비난하며, [[루터파]]의 요구에 응답하여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위협하며 압박하였다.<ref>1378년부터 1418년까지 있었던 '서방교회 대분열' 사건으로 유럽이 혼란에 빠졌는데 이 문제가 1417년에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를 통해 해결되면서 공의회 수위설이 대두되었다. 공의회 수위설이란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주장으로 공의회의 결의를 교황도 준수해야 했다. 공의회에서는 교황의 성직매매 행위등 부정과 비리 그리고 그 처벌에 대해서도 논의가 진행될 수도 있었고 공의회가 교황을 폐위 시킬수도 있었다. 그래서 교황들은 공의회의 개최를 꺼렸다. 당시에는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분열되며 반교황주의가 팽배했는데 이 문제를 공의회를 통해 해결하자는 황제의 발언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는 매우 큰 압박이나 협박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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