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클레멘스 7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38번째 줄:
클레멘스 7세가 재위하던 당시 유럽 대륙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신성로마제국]] 및 스페인과 [[발루아 왕가]] 통치하의 [[프랑스 왕국]] 두 강대국 간의 대립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왕국은 유럽 패권 다툼에서 특히 [[이탈리아 반도]]를 서로 먼저 손에 넣으려고 대립하고 있었다.
 
카를 5세의 지지속에 교황에 즉위하였으나즉위하였기 때문에 카를 5세가 전임교황 하드리아노 6세때 체결한 반-프랑스 방위동맹<ref>전임교황 하드리아노 6세(재위1522~1523)때 소데리니 추기경이 프랑스 왕과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서 그를 체포한후 프랑수아 1세와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이로인해 프랑수아 1세는 롬바르디아 침공준비를 진행하였고 그전까지 정치적인 중립을 고수하던 교황 하드리아노 6세는 1523년 8월에 신성 로마제국, 잉글랜드, 오스트리아, 밀라노등과 반-프랑스 군사동맹을 체결한바 있었다.</ref>의 갱신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면서 황제 카를 5세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1524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밀라노 공국|밀라노]]를 침공해 점령하자 클레멘스 7세는 즉시 카를 5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1525년 1월 프랑스,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을 포함한 다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동맹관계를 맺었다.<ref>동맹을 체결함으로써 파르마와 피아첸차는 교황령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으며, 피렌체 공화국에 대한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을 보장받았다. 그 대가로 프랑스 군대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나폴리까지 무사히 이동할  있는 보장을 받았다.</ref>  1525년 2월, 프랑수아 1세가 파비아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로 사로잡히자 교황은 다시 카를 5세와 이전 관계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1526년 [[마드리드 조약 (1526년)|마드리드 조약]] 후 프랑수아 1세가 자유의 몸이 되자 다시 황제 카를 5세를 멀리하며 프랑스,밀라노등과 반-합스부르크 동맹을 추진하였다.(일명 코냑동맹)
 
클레멘스 7세의 오락가락하는 정책은 교황청 안에 친독일파의 출현을 낳았다. 1526년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의 사병들은 [[바티칸 언덕]]을 약탈하였으며, 로마 시 전체가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의 손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굴욕을 당한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 편으로 다시 돌아서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콜론나 추기경이 [[나폴리 왕국|나폴리]]로 떠나자 약속을 저버리고 도리어 콜론나 추기경을 파면하였다. 카를 5세는 교황은 목자가 아니라 늑대라고 비난하며, [[루터파]]의 요구에 응답하여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위협하며 압박하였다.<ref>1378년부터 1418년까지 있었던 '서방교회 대분열' 사건으로 유럽이 혼란에 빠졌는데 이 문제가 1417년에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를 통해 해결되면서 공의회 수위설이 대두되었다. 공의회 수위설이란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주장으로 공의회의 결의를 교황도 준수해야 했다. 공의회에서는 교황의 성직매매 행위등 부정과 비리 그리고 그 처벌에 대해서도 논의가 진행될 수도 있었고 공의회가 교황을 폐위 시킬수도 있었다. 그래서 교황들은 공의회의 개최를 꺼렸다. 당시에는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분열되며 반교황주의가 팽배했는데 이 문제를 공의회를 통해 해결하자는 황제의 발언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는 매우 큰 압박이나 협박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