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율리오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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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기독교 세계의 수도로서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르네상스 계획의 일환으로 율리오 2세는 스스로 라틴-기독교 제국을 이끌어가는 교황으로서 자신의 위엄을 마치 황제와 같이 드높여 만인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 예로, 1507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때 율리오 2세의 행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져오고 있다. “율리오 2세가 로마에 입성하였다. … 그에게서 로마 제국의 영광과 위엄을 계승한 제2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모습과 더불어 로마의 보편 교회를 다스리는 교황으로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ref>Stinger, Charles M. ''The Renaissance in Rome'' (Indiana University Press, 1985).</ref> 자신과 동명이인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모범으로 삼았던 율리오 2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야만인들을 몰아내자는 기치 아래 몸소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였으나,<ref>Adams, Robert M., "Introduction," ''The Prince'' Niccolo Machiavelli (Norton, 1992), 72, n3.</ref> 그의 웅대했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 신성캉브레 동맹동맹전쟁 (1508~1516) ===
1508년 율리오 2세는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아라곤 왕국|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아라곤)|페르난도 2세]]와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였다. [[캉브레 동맹 전쟁]] 또는 신성 동맹 전쟁 기간 동안 이 동맹은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당시 이들이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동맹을 결성하게 된 배경에는 율리오 2세가 베네치아가 점유하고 있는 로마냐 지역을, 막시밀리안 1세 황제가 [[프리울리]]와 [[베네토]]를, 루이 12세가 크레모나를, 페르난도 2세가 [[풀리아주]]를 손에 넣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1509년 봄에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 전역에 [[성무 정지]] 조치를 내렸다.<ref>{{저널 인용|first=Richard |last=Cavendish |title=Venice Excommunicated |publisher=History Today Ltd. |journal=History Today |volume=59 |issue=4 |year=2009}}</ref> 캉브레 전쟁 기간내내 동맹은 수시로 바뀌었다. 가령 1510년 베네치아와 프랑스는 서로 적대 관계였다가 1513년에는 동맹을 맺었다. 캉브레 동맹의 효과로 율리오 2세는 당초 계획했던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얻었다. 1509년 5월 14일 [[아냐델로 전투]]에서의 패배로 베네치아는 사실상 이탈리아 내에서의 주권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캉브레 동맹의 효과로 율리오 2세는 당초 계획했던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얻었다. 1509년 5월 14일 [[아냐델로 전투]]에서의 패배로 베네치아는 사실상 이탈리아 내에서의 주권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프랑스 국왕은 물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당초 교황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원하였다. 이에 율리오 2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동맹자였던 프랑스 국왕이 이탈리아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경계하여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을 잡고 협정을 맺어 프랑스에 적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510년 초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손하게 율리오 2세에게 용서를 구해 사죄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는 율리오 2세로부터 성무 정지 조치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을 서로 이간질 시키려고 한 율리오 2세의 책략은 실패로 끝났다. 한편 루이 13세는 1510년 9월 프랑스 [[투르]]에서 [[시노드]] 소집을 요청하여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주교단은 교황에게의 순명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막시밀리안 1세의 협조를 얻어 율리오 2세를 조속히 폐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1511년 11월 [[피사]]에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한편 루이 12세는 1510년 9월 프랑스 [[투르]]에서 [[시노드]] 소집을 요청하여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주교단은 교황에게의 순명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막시밀리안 1세의 협조를 얻어 율리오 2세를 조속히 폐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1511년 11월 [[피사]]에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러자 율리오 2세는 페르난도 2세 및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1511년 신성 동맹]]을 창설하여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얼마 후, 헨리 8세와 막시밀리안 1세도 대(對)프랑스 동맹인 신성 동맹에 가담하였다.
 
그러자 율리오 2세는 페르난도 2세 및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1511년 신성 동맹]]을 창설하여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얼마 후, 헨리 8세와 막시밀리안 1세도 대(對)프랑스 동맹인 신성 동맹에 가담하였다. 여기에 더해, 율리오 2세는 피사 공의회에 맞서 1512년 로마에서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공의회에서 그는 본래 교황 선출 당시 즉시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적군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부득이하게 소집이 지연되다가 뒤늦게 소집했다고 밝혔다.
 
== 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