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율리오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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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오 2세는 페르난도 2세 및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1511년 신성 동맹]]을 창설하여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얼마 후, 헨리 8세와 막시밀리안 1세도 대(對)프랑스 동맹인 신성 동맹에 가담하였다. 여기에 더해, 율리오 2세는 피사 공의회에 맞서 1512년 로마에서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공의회에서 그는 본래 교황 선출 당시 즉시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적군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부득이하게 소집이 지연되다가 뒤늦게 소집했다고 밝혔다.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통치권 회복'''
 
1512년 8월, 교황군은 신성동맹군과 합세하여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동맹국들이 만토바에 모여서 향후 이탈리아에서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때 피사 공의회를 개최하였던 피렌체에 대해 응징을 결의하였다. 결의에 따라 라몬 데 가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1512년 8월에 피렌체를 정벌하였고 교황 율리오 2세는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을 교황군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피렌체로 파송하였다. 곧 조반니 추기경의 동생 줄리아노가 피렌체 공화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이로써 지난 1494년에 프랑스 샤를 8세가 피렌체를 침공하며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당한뒤 18년만에 다시 통치권을 회복하게 된것이다.
 
== 죽음 ==
그러다 마침내 1512년에 율리오 2세는 프랑스군을 [[알프스 산맥]] 북부로 완전히 쫓아버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역시 프랑스 이외의 강대국이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결과로 연결되었다. 율리오 2세는 로마를 포함한 교황령의 정치적 안정과 독립을 획득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이탈리아 반도의 독립과 통일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1513년 2월에 병에 걸려 몸져누운 뒤 선종하였다.
 
많은 사람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가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안에 있는 이른바 [[미켈란젤로]]가 만든 [[교황 율리오 2세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조물에 실제로 율리오 2세의 시신이 안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 이 무덤을 만들었을 당시 초창기에는 새로 신축될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 놓기 위해 계획되었지만, 1545년까지 완성하지 못한 데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크게 규모도 축소되었다. 결국 율리오 2세의 시신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무덤 안에 매장되지 못하고,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 그대로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