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율리오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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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년 봄에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 전역에 [[성무 정지]] 조치를 내렸다.<ref>{{저널 인용|first=Richard |last=Cavendish |title=Venice Excommunicated |publisher=History Today Ltd. |journal=History Today |volume=59 |issue=4 |year=2009}}</ref> 캉브레 전쟁 기간내내 동맹은 수시로 바뀌었다. 가령 1510년 베네치아와 프랑스는 서로 적대 관계였다가 1513년에는 동맹을 맺었다. 캉브레 동맹의 효과로 율리오 2세는 당초 계획했던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얻었다. 1509년 5월 14일 [[아냐델로 전투]]에서의 패배로 베네치아는 사실상 이탈리아 내에서의 주권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프랑스 국왕은 물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당초 교황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원하였다. 이에 율리오 2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동맹자였던 프랑스 국왕이 이탈리아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경계하여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을 잡고 협정을 맺어 프랑스에 적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510년 초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손하게 율리오 2세에게 용서를 구해 사죄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는 율리오 2세로부터 성무 정지 조치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을 서로 이간질 시키려고 한 율리오 2세의 책략은 실패로 끝났다.
 
한편 루이 12세는 1510년 9월 프랑스 [[투르]]에서 [[시노드]] 소집을 요청하여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주교단은 교황에게의 순명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막시밀리안 1세의 협조를 얻어 율리오 2세를 조속히 폐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1511년 11월 [[피사]]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에 대해 교황은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