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노키 마사시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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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usunoki Masashige statue.jpg|섬네일|[[황거외원]]에 있는 구스노키 마사시게상]]
[[파일:Minatogawa Jinja(the front of the main shrine).jpg|200px|왼쪽|섬네일|미나토가와 신사]]
남조의 시각에서 [[난보쿠초 시대|남북조 시대]]를 그린 고전 《태평기(太平記)에는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공적을 유난히 강조해 서술하였고, 아시카가 집안의 사서인 《[[매송론]]》(梅松論)에서까지 구스노키는 동정적인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사한 마사시게의 목을 본 다카우지가 "죽고 없다 한들, 가족은 필시 만나고 싶을 게지"라며 그의 목을 정중하게 유족에게 돌려보내는 등, 청렴했던 그에게 보인 다카우지의 경의 때문이기도 했다는 분석이 있다. 또 미나토 강에서 자결할 때까지 아시카가 군과 16번의 전투를 치렀고, 전황이 구스노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후반에 다카우지는 구스노키가 그냥 자신에게 투항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잠시 동안 공격을 멈추고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설이 있다.(이 이야기는 NHK 역사 다큐멘터리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에서도 인용되었다.)
 
남북조 싸움이 결국 북조측의 승리로 끝나면서 남조측에 가담해 싸우다 죽은 마사시게는 조적(朝敵, 역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에이로쿠(永綠) 2년([[1559년]])에 마사시게의 자손이라 칭한 구스노키 마사토라(楠木正虎)가 조정에 헌금하면서 조상에게 씌워진 조적의 이름을 사면해달라는 탄원을 올렸고, 마침내 [[오기마치 천황]]의 명으로 마사시게는 조적의 이름을 벗을 수 있었다. 또 에도 시대에는 [[미토 번|미토(水戶) 번]]에서 융성했던 미토학의 존왕주의 사가들에 의해 마사시게는 충신으로 추대되어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존왕가에 의해서 빈번히 그의 제사가 올려졌고, 그 움직임은 후에 미나토가와(湊川) 신사 창건으로 결실을 맺었다. 한편으로 [[야스쿠니 신사|야스쿠니(靖國) 신사]] 등의 초혼사 창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의 게릴라전과도 유사한 전술을 장기로 구사했던 마사시게의 전법은 에도 시대에는 구스노키류(楠木流) 군학(軍學)으로 널리 알려져, 마사시게의 후예를 칭한 구스노키 마사타쓰(楠木正辰)의 제자였던 유이 쇼세쓰(由井正雪, 由比正雪라고도)가 구스노키류 군학을 강연하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남북조정윤론|남북조정윤론]](南北朝正閏論)]]이 제기되어 남조가 정통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면서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대(大) 남공(楠公)'''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강담(講談) 등에서는 《[[삼국지연의|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속의 천재 지략가 [[제갈량|제갈량]](諸葛亮)]]과 견주어 참모적인 이미지가 거듭 붙여졌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황국사관|황국사관]](皇國史觀)]]의 영향으로 대의를 위해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하는 「충신의 표상」, 「일본인의 귀감」으로서 상찬되어 수신 교육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의 패도(佩刀)인 고류카게미쓰(小竜景光)는 야마다 아사우에몬(山田淺右衛門)의 손을 거쳐 [[메이지(明治) 천황의천황]]의 패도가 되었는데, 메이지 천황은 청ㆍ일[[청일 전쟁]] 중 대본영이 [[히로시마|히로시마]](廣島)]]로 옮겨질 때도 이 칼을 차고 갔다고 한다. 현재 이 패도는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는 남조 공신의 자손에게도 작위를 하사하고자 그 자손을 탐문했지만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자손을 자칭하는 전국 각지의 많은 씨족 가운데 그의 직계임을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가진 집안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닛타ㆍ키쿠치ㆍ나와 집안의 자손은 남작의 작위를 받은 것과 달리 구스노키 집안에는 작위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 뒤 1940년(쇼와 10년)에 있었던 '대남공 600년제'를 전후해 구스노키 집안의 자손이 확인되었고 그를 모신 미나토가와 신사 안에 '구스노키 동족회'가 조직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 [[니가타현]]에 그의 직계 자손이라고 하는 가계가 존재하고 있는데, 성은 구스노키(楠木)가 아닌 미나미(南)라고 한다.
 
전후는 가치관의 전환과 역사학에서의 중세사 연구가 진행되면서 '악당'으로서의 성격이 강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소설 「사본태평기(私本太平記)로, 여기서는 전쟁 전의 이미지와는 다른 마사시게의 인물상을 그려냈다. 다만 이 '악당'이라는 평가는 어디까지나 역사학에서의 이야기이고 일반적인 것은 아니며(악당이라는 말에는 일반적으로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 내지 악행을 이루는 집단'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아직까지도 마사시게는 일본인들에게는 영웅으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일본 NHK 방송의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당당 일본사(堂々日本史)에서 「겐무신정의 파괴, 악당 구스노키 마사시게 할복(建武新政破れ、悪党楠木正成自刃す)이라는 타이틀로 방송한 것에 미나토가와 신사가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 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