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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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는 먼 조상인 사공(司空) 김길(金吉)이 [[고려 태조|태조]](太祖)를 도와서 공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ref name="고려사열전">《고려사》권제110 열전제23 제신(諸臣) 김태현</ref> 김수는 [[고려 고종|고종]](高宗) 42년([[1255년]]) 진사과에에 급제한 후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고려 원종|원종]] 10년([[1269년]])<ref name="김태현묘지명">《김문정공묘지》(金文正公墓誌)</ref> 지영광군주사(知靈光郡州事)가 되었다.<ref name="고려사열전"></ref>
 
원종 11년([[1270년]]) 6월 앞서 대몽항쟁을 주장하며주도하며 몽골에 대한 강경책으로 일관해 오던 무신정권이[[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원과의[[원나라|원]](元)과의 화의 체결로 고려 조정은 [[강화]](江華)를 나와 개경으로의[[개경]](開京)으로의 환도를 천명하고, 아울러 과거 무신정권과 밀착되어 있던 군사 조직조직인 [[삼별초]](三別抄)에 대한 명단 압수를 명하였다. 삼별초는 개경 환도와 몽골과의 화의를 반대하며 강화에서 금강고를 열어 무장을 갖추었고, 강화를 떠나 진도로 내려가 개경 조정 및 몽골에 대한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개경 정부는 삼별초에 대비해 [[고여림]](高汝霖)을 보내 [[제주도]](濟州島)를 지키게 하고, 아울러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 권단(權㫜)에게 사람을 뽑아 고여림과 함께 제주도 방비를 맡기도록 명하였다. 이때 김수가 영암부사(靈巖副使)로써 선발되어 2백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여림과 함께 제주도에서 삼별초를 막는 임무를 맡았다.<ref name="고려사열전"></ref><ref>《고려사》권제103 열전제16 제신 김응덕</ref> 이때 김수는 선발에 뽑히자마자 즉시 집에 들르지 않고 2백 명의 별초군과 함께 제주로 가서 고여림과 합류, 삼별초에 대비해 성벽을 쌓고 병장기를 수리하였다고 한다.<ref name="김태현묘지명"></ref>
 
그러나 삼별초의 장군 [[이문경]](李文京)이 이끄는 군세는 11월에 제주를 공격했다.<ref>《고려사》권26 세가26 원종 11년 11월 3일 기해</ref> 이문경의 군세는 제주 [[명월성지|명월포]]에 상륙한 다음 동제원(東濟院)에 진을 치고, 송담천(松淡川)에서 고려 조정군과 교전하여 군사를 놓아 불을 지르며 공격하여 고려 조정군을 패배시켰다.<ref>《신증동국여지승람》권제38 전라도 제주목 고적조.</ref> 《김문정공묘지》(金文正公墓誌)에 따르면 제주를 지키고 있던 김수, 고여림 등 개경 조정의 군사들이 적(삼별초)의 공격에 맞서 그 선봉을 거의 다 죽이기도 하였으나, "지키는 사람들이 겁을 내어 움츠리고 힘을 다하지 아니하니 적이 다른 길을 거쳐 이르렀는데도 깨닫지 못하였다.", "토인(土人)들이 적을 도와주게 되니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고 장군과 함께 진중에서 전사하고 돌아오지 못하게 되어서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하게 여기고 있다."<ref name="김태현묘지명"></ref>고 하여, 삼별초의 제주 장악에 제주도민들이 어느 정도 협조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