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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토는 함락되었고 광분한 스페인 용병들은 도시를 약탈하며 파괴,방화,강간에 몰두하였다. 지휘부가 통제할수 없는 수준으로 용병들이 포악해지자 조반니 추기경은 교회건물에 프라토 부녀자들을 도피시킨후 바리케이트를 치고 교황군을 동원하여 경비를 서며 부녀자들이 강간당하는것을 막아야했다. 학살수준에 사망자도 발생했는데 역사가들은 이때 프라토의 총 인구는 약 6천여명으로 이중에 약 3,000명 이상이 살해당했을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반나절 거리에 있는 프라토가 허망하게 함락당한후 잔인하게 약탈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피렌체는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 또한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메디치 가(家) 지지자들이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였다. 시위가 거칠어지던중 교황군 지휘관인사령관인 조반니 추기경으로추기경훗날 교황 레오 10세)으로 부터 항복을 종용하는 서신이 도착하자 피렌체의 수상인 소데리니는 망명에 대한 신변안전을 요구하였고 이것이 수용되자 사임을 한후 피렌체를 떠나 망명길레 올랐다. 9월 1일, 조반니 추기경(훗날 교황 레오 10세)은 교황 율리오 2세로 부터 임영받은 교황특사의 자격으로 1,500명의 군인을 이끌고 피렌체에 입성하였다. 이로써 1494년에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이후 18년만에 다시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하였다.
 
==== 가톨릭 교회에서의 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