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브레 동맹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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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알폰소 데스테(페라라 공작)는 [[포 강]]에서 베네치아군과 정면으로 맞딱드려 괴멸시키며, 다시 한번 볼로냐를 고립시켰다. 프랑스군에 의해 볼로냐가 포위될것을 우려한 율리오 2세는 5월에 라벤나로 거처를 옮겼다. 볼로냐의 수비는 [[프란체스코 알리도시|추기경 프란체스코 알리도시]]에게 맡겼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알리도시|알리도시 추기경]]은 율리오 2세보다도 볼로냐인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공금횡령과 반역죄로 2차례에 걸쳐 고소당한적이 있으나 교황이 개입하여 무죄선고를 내리자 볼로냐 시민들은 이에대해 불만이 가득했다. 또한 1506년에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벤티볼리오 가문의 조반니 2세]]가 파문당한후 파견된 교황 대표단은 악정을 일삼았다.<ref>존 줄리어스 로리치<교황연대기> 534 페이지 바다출판</ref>
 
교황이 볼로냐를 떠나자 교회세력을 반대하고 볼로냐의 통치가문인 벤티볼리오 가문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성난 시민들은 산 페트로니아 성당 정문 위에 위치한 거대한 교황 동상(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쓰러뜨려 산산조각으로 때려 부수기도 했다.<ref>대포 제작의 일인자이기도 했던 알폰소 1세 데스테는 깨진 동상 조각들을 녹여서 튼튼한 박격포를 만들었다. 알폰소 1세 데스테는 이 대포에 La Giulia라는 여자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라벤나 전투 (1512년 4월)에 프랑스군과 함께 싸워 교황군을 물리쳤는데 이때 이 대포를 사용했다. 페라라 공작 알폰소는 파문당한것에 대해 이런식으로 소심한 복수를 했다. <위키백과> '알폰소 1세 테스테' 中에서</ref> 볼로냐의 책임자였던 알리도시 추기경은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고 야반도주를 했고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 디 우르비노 공작|우르비노 공작]]<ref>이 당시 우르비노 공작은 프렌체스코 마리아 1세 였다. </ref>도 볼로냐를 탈출하였다. 1511년 5월 23일에 프랑스군이 볼로냐에 다다르자 볼로냐인들은 항복했다.<ref>프랑스 군을 이끈 지휘관은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1440-1518)였다. 이때 볼로냐의 통치가문인 벤티볼리오 가문이 프랑스와 내통한것으로 알려져 있다.</ref>
 
이 사건에 대해 교황은 책임을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 디 우르비노 공작|우르비노 공작]]에게 돌리며 심하게 책망하였다. 이에 격분한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 디 우르비노 공작|우르비노 공작]]은 알리도시 추기경을 백주대낮에 대로변에서 죽여버렸다.<ref>교황은 과거 1494년 프랑스로 도피당시에 알리도시 추기경이 자신과 동행했고 이후 비서로 활동하며 핵심 협력자가 되자 알리도시 추기경을 지속적으로 편애해왔다. 알리도시 추기경은 두차례나 반역혐의로 볼로냐 시민들에 의해 체포된후 고소당한적이 있는데 그때 마다 교황은 합리적 이유없이 그를 사면복권시켜준일이 있다. 이사건이 볼로냐 시민들에게 교회에 대해 크게 반감을 품게 만들었다. 우르비노 공작은 교황 율리오 2세의 조카였기 때문에 알리도시 추기경 살해사건은 심한 책망만을 다시 받은후 유야무야 넘어갈수 있었다.</ref> 한편 캉브레 동맹 전쟁 내내 정치적인 중립을 고수하던 피렌체는 프랑스군이 볼로냐를 정복하면서 유리한 고지에 오르자 루이 12세가 요청한 피사 공의회 개최를 수용하였다.<ref>로저 마스터스<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마키아 벨리> 236 페이지, 세종서적</ref> 이 소식을 접한 교황 율리오 2세는 분노하며 피렌체에 대해 성무정지를 명하고 추후 응징할 것을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