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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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생 ==
* ==='''출생'''===
[[출애굽기]]에 따르면 애굽(이집트)의 총리 였던 [[요셉]]을 모르는 [[파라오|바로]]([[파라오]])가 즉위하자 [[파라오|바로]]는 당시 고센 땅에서만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엄청난 인구가 왕권을 위태하게 할까 두려워 이스라엘 백생들을 혹독하게 부렸다. 그들은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과 밭일 등 온갖 고된 일을 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다. 한편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가 줄지 않자 히브리 산파(한 사람은 시브라였고 또 한 사람은 부아였다)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히브리 여인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에, 사타구니를 보고 아들이거든 죽여버리고 딸이거든 살려두어라." 그러나 산파들은 파라오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사내아이들을 살려주었고, 파라오가 그들을 꾸짖으면 '히브리 여인은 기운이 좋아 산파가 가기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린다.'며 둘러댔다. 그러자 파라오는 이집트의 군대에게"히브리인들이 계집아이를 낳으면 살려두되 사내아이를 낳으면 모두 강물에 집어넣어라."라고 명령했다.(출애굽기 1:6-22) 이때 태어난 사람이 모세이다. 모세는 어머니와 누나 미리암(후에 여자 [[예언자]] 즉, 여자 설교자가 된다.)의 기지로 겨우 살아남았다. 아기를 더 숨겨둘 수 없게 되자 갈대상자를 얻어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바르고 그 속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숲 속에 놓아두었는데, 마침 파라오의 딸이 강에 목욕하러 왔다. 공주는 아기를 보자 측은지심이 들어 키우고자 했다. 숨어서 이 광경을 보던 누나 미리암의 제안으로 히브리인인 모세의 어미가 유모 일을 하게 되었다. 공주는 모세를 양자로 삼았고, [[강]]에서 건진 아이라는 뜻으로 모세라고 이름도 지어주었다.
 
*=== '''모세의 미디안 생활''' ===
40세가 된 모세는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심한 노역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감독을 죽였다. 이 후 이집트와 가나안의 중간 지대인 [[미디안]]으로 피신한다. [[망명]]자가 된 그는 [[미디안]] 종교의 [[사제]]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살면서 이드로의 영향으로 [[종교]] 지도자로서의 소양을 익혔다. 그 실례로 소위 모세 5경이라고 불리는 [[레위기]]를 보면 제사법 및 종교건축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저절로 [[불]]이 타오르는 초자연현상([[엘모의 불]])을 계기로 [[야훼]]를 만난 그는 민족을 [[구원]]하라는 명령에 따른다. 파라오가 노동력 손실을 우려하여 해방요구를 거부하자 모세는 신의 계시를 받고 초자연적인 10가지 재앙을 일으켜 굴복시킨다. [[야훼]]의 도움으로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들은 갈대 바다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하며, 그들의 신과 모세를 믿게 되었다.
 
*=== '''광야 생활''' ===
이집트에서 탈출한 모세는 불평불만이 심한 백성들과 논쟁을 벌이며, 광야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의 불평은 그치지 않았고, 그때마다 야훼는 만나 등을 내려주며 [[야훼]] 공동체가 실천해야 할 [율례]]를율례를 익히게 하였다.<REFref>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하고 일러주어라." 저녁때가 되자 난데없이 메추라기가 날아와 그들이 진을 친 곳을 뒤덮었다. 아침에는 진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안개가 걷힌 뒤에 보니 광야 지면에 마치 흰 서리가 땅을 덮듯이,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야훼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시는 양식이다. 야훼의 명령이니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여라. 한 사람에 한 오멜씩 식구 수대로 거두어들이면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많이 거두어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덜 거두어들이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출애굽기 16:11-18)</REFref>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는데, 모세가 해야 할 일은 민족을 구원하는 일이었지 가나안 입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나안의 입성은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루어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는데, 모세가 해야 할 일은 민족을 구원하는 일이었지 가나안 입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나안의 입성은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루어냈다.
 
== 성서고고학에서 보는 출애굽 (이집트 탈출)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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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의 저작 ==
 
모세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기술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신명기 34장에 그의 죽음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REFref>야훼의 종 모세는 그 곳 모압 땅에서 야훼의 말씀대로 죽어 모압 땅에 있는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오늘까지 아무도 모른다. 모세는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직 정기를 잃지 않았고 그의 정력은 떨어지지 않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광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의 죽음을 슬퍼하며 곡했다. 이렇게 그들은 모세의 상을 입고 곡하는 기간을 채웠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 지혜가 넘쳤다. 모세가 그에게 손을 얹어주었던 것이다. 그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이미 모세에게 분부하신 일을 다 이루었다. 그 후로 이스라엘에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야훼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사귀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 모세가 야훼의 사명을 띠고 이집트 땅으로 가서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온 땅에 행한 것과 같은 온갖 기적과 표적을 행한 사람은 다시 없었다. 모세처럼 강한 손으로 그토록 크고 두려운 일을 온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서 이루어 보인 사람은 다시 없었다.(신명기 34:5-12)</REFref>것 등을 이유로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설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신명기 1장 1절<ref>이것은 모세가 요르단 강 건너편 바란, 도벨, 라반, 하세롯, 디자합 사이의 숩이 마주보이는 아라바라는 광야에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공동번역)</ref>은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밝혀 주는 암시가 있다. [[문서설]]에 따르면 [[신명기]]의 원저자는 모세이나, 모세가 죽은 후에 모세의 죽음에 대한 [[신명기]]의 기사를 모세의 후손들이 첨가했다고 본다.
모세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기술했다고 알려졌다.
 
'''반론'''
신명기 34장에 그의 죽음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REF>야훼의 종 모세는 그 곳 모압 땅에서 야훼의 말씀대로 죽어 모압 땅에 있는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오늘까지 아무도 모른다. 모세는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직 정기를 잃지 않았고 그의 정력은 떨어지지 않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광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의 죽음을 슬퍼하며 곡했다. 이렇게 그들은 모세의 상을 입고 곡하는 기간을 채웠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 지혜가 넘쳤다. 모세가 그에게 손을 얹어주었던 것이다. 그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이미 모세에게 분부하신 일을 다 이루었다. 그 후로 이스라엘에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야훼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사귀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 모세가 야훼의 사명을 띠고 이집트 땅으로 가서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온 땅에 행한 것과 같은 온갖 기적과 표적을 행한 사람은 다시 없었다. 모세처럼 강한 손으로 그토록 크고 두려운 일을 온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서 이루어 보인 사람은 다시 없었다.(신명기 34:5-12)</REF>것 등을 이유로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설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신명기 1장 1절<ref>이것은 모세가 요르단 강 건너편 바란, 도벨, 라반, 하세롯, 디자합 사이의 숩이 마주보이는 아라바라는 광야에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공동번역)</ref>은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밝혀 주는 암시가 있다. [[문서설]]에 따르면 [[신명기]]의 원저자는 모세이나, 모세가 죽은 후에 모세의 죽음에 대한 [[신명기]]의 기사를 모세의 후손들이 첨가했다고 본다.
 
== 관련 문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