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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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삼국지 가공인물#ㄷ||《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의 부장으로 등장하는 '''두예'''}}
{{출처 필요|날짜=2012-11-21}}
{{다른 뜻|삼국지 가공인물#ㄷ||《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의 부장으로 등장하는 '''두예'''}}
'''두예'''(杜預, [[222년]] ~ [[284년285년]])는 [[중국]] [[삼국 시대 (중국)|삼국시대]] [[위 (삼국)|위나라]]의 정치가로, 자는 '''원개'''(元凱)이며 [[경조윤]] 두릉현(杜陵縣) 사람이다. [[전한]]의 [[사공 (관직)|어사대부]] [[두연년]]의 11세손<ref>왕은(王隱), 《진서》(晉書) <nowiki>[</nowiki>[[유의경]](劉義慶), 《[[세설신어]]》 방정(方正)에 주석으로 인용]</ref> 이며, [[어사중승]] [[두서]]의 아들이다. [[사마의]]의 딸이자 [[사마소]]의 여동생인 고륙공주(高陸公主)와 결혼해 [[부마도위|부마]]가 되었다. 이후 [[서진]]의 장군이 되어 [[오 (삼국)|동오]]를 정벌하고 중국 재통일에 기여했다. 《춘추》의 문장을 《좌전》과 묶고 주석을 단 《춘추좌전집해》를 저술했고, 이에서 오늘날의 《춘추좌씨전》 형식이 만들어졌다.
 
== 생애 전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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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벌군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진나라 조정에서는 [[가충]](賈充) 등이 오나라 정벌이 성공하기 어려우니 군사를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안 두예 역시 정벌을 계속해야 한다는 글을 올리면서 뜻을 꺾지 않았다. 마침내 [[왕준 (서진)|왕준]]이 건업을 점령하고 [[손호]](孫皓)를 붙잡아 [[뤄양|낙양]]으로 보내니 오나라는 멸망하고 진나라가 전 중국을 차지하게 되었다.
 
[[사마염]]은 오나라 정벌 논공행상 때 두예를 당양현후(當陽縣侯)로 책봉하였다. 두예는 천하가 통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휘하 군사들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형주에서 운하를 파고 관개를 통해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들였다. [[284년285년]] 12월에 사망했다.
 
== 두예와 춘추좌씨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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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인물 ===
* [[두기 (백후)|두기]] 
* [[두서]]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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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주요 등장인물}}
 
{{전거 통제}}
 
[[분류:222년 태어남]]
[[분류:284년285년 죽음]]
[[분류:삼국지 위나라의 장군]]
[[분류:서진의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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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중국의 유학자]]
[[분류:하남윤]]
[[분류:285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