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 박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
||
25번째 줄:
=== 후궁 간택 ===
1786년(정조 10) 5월에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가 훙서하고 9월에 정조의 세 번째 후궁 [[의빈 성씨]]가 임신 만삭에 졸하였다. 정조는 35세로 나이가 많았는데,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와 정조의 후궁 [[화빈 윤씨]]에게 모두 소생이 없었다. 그래서 왕실의 후사를 매우 걱정하여 [[1787년]](정조 11년) 다시 명문가 규수를 간택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책봉된 간택후궁이
=== 후궁 시절 ===
[[1787년]](정조 11년) [[음력 2월 11일|2월 11일]], 18세의 나이에 후궁 책봉되어 빈호를
=== 순조 즉위 ===
37번째 줄:
=== 사망 ===
사망하기 전년도 늦가을에 갑자기 풍담(風痰) 증세가 생겼는데 얼마 후에 조금 차도가 있었다 그러나 병환이 차츰차츰 더 심해져 일어나지 못했다. [[1822년]](순조 22년) [[음력 12월 26일]],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53세에 졸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JO&jwId=kwa_122&moId=120&daId=260&gaLid=kwa_12212026_005&gaId=&yoId=&ilId=&leId=|제목=순조실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JO&jwId=kwa_122&moId=120&daId=260&gaLid=kwa_12212026_005&gaId=&yoId=&ilId=&leId= }}</ref> 1822년(순조 22년) [[음력 12월 29일]], 빈청에서 원호는 원호는 휘경(徽慶) 시호는 현목(顯穆)으로 의논해 정하였다. 시호 현목의 뜻은 '행실이 중외에 드러남'을 현이라 하고 '덕을 베풀고 의로움을 간직함'을 목이라 한다.<ref>{{웹 인용|url=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JO&jwId=kwa_122&moId=120&daId=290&gaLid=kwa_12212029_003&gaId=&yoId=&ilId=&leId=|제목=순조실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JO&jwId=kwa_122&moId=120&daId=290&gaLid=kwa_12212029_003&gaId=&yoId=&ilId=&leId= }}</ref> 시호와 빈호가 더해져 '''
"자궁(慈宮)께서 평소 사후(死後)의 일을 생각하여 별도로 두신 은자(銀子) 1만 6천 냥이 있기에 지금 호조에 내어주니, 잘 헤아려서 원소(園所)의 역사와 후일 별묘(別廟)를 지을 때에 보태서 쓰도록 하라."
43번째 줄:
하였다.|《[[순조실록]]》 1823년(순조 23년) 1월 27일}}
[[대한제국]]이 개창된 후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가 정조를 선황제로 추존함에 따라 [[1901년]](고종 38년·광무 5년) [[음력 10월 11일|10월 11일]]에
== 관련 작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