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정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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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참고|위화도 회군}}
농사철을 앞둔 군사 징발에 [[왜구]]의 침탈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백성들의 원성(怨聲)은 [[이인임]]·임견미·염흥방 일파의 전횡 시대보다 더 컸다라는 이야기가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조선왕조태조실록등의 조선왕조에 의해서 쓰여진 고려시대 역사서들에서 나오나, 이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으로조작,폄하로 보인다. 시중(侍中) [[최영]](崔瑩)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음력 4월에 주전론(主戰論)을 지지하는 우왕과 더불어 평양으로 떠났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하여 좌우군 3만8,830명 등 5만여 병력(10만명이라는 설도 있음.)을 요동으로 떠나게 하였다.
 
우왕이 [[봉산군|봉산]]에 가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처음 요동 정벌 계획을 알렸을 때(음력 4월 1일), 이미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했으나 우왕은 묵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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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염병 발생의 우려가 있는 것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그러나 이 '사불가론'은 이성계 당시의 기록인 이성계의 묘지문과묘지문(무덤안에 넣는 비석.)과 비석에는 없는 내용으로 후대의 조선왕조가 편찬한 고려시대 역사서들인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 등의 후대 조선 측의 기록들에서만 나와서 정말로 이 시점에서 사불가론을 주장했는지 의문이 있다. 나중에 후대의 조선왕조측에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정당화를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겠다.
 
[[우왕]]과 [[최영]]은 반대 여론을 무릎쓰고 출병을 강행하였다.<ref> 그러나 우왕과 최영의 정적인 조선왕조측에서 쓰여진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의 조선왕조의 고려시대 관찬사서들을 보면 '요동정벌'이 논의될때 이색,정몽주,이숭인,권근 등의 고려말의 고려측 인물들은 물론이고,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이지란 등의 친 이성계 세력도 반대하지 않은 것과 또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 측이 회군을 정당화하기 위한 상소를 우왕에게 올렸을때 우왕이 이를 반박하는 교지를 내리면서 애초에 정벌이 논의되었을때는 모두가 다 찬성해놓고 왜 이제 와서 감히 명을 어기냐는 질책을 했을때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의 사서들에서 당시 이성계 측과 후대의 조선왕조에서 전혀 반박하지 못한 점들을 들어 위의 이야기는 잘못된 이야기라는 말도 있다.</ref>[[1388년]] 음력 4월 18일, [[고려]]는 전국에서 좌우군 3만8,830명, 수송대 1만1,634명, 말 2만1,682필을 동원해 요동 정벌에 나섰고, 우왕이 직접 [[평양]]까지 나가 격려하였다. 그러나,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 [[최영]]은 국내에서의 역모를 걱정한 우왕의 고집으로 전선에 나서지 않고 평양에 남게 되었다.
 
[[1388년]] [[음력 5월 22일]],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가 좌군도통사인 [[조민수]]를 회유하여 전군(全軍)을 회군시켰다.(→[[위화도 회군]]) 돌연한 회군에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개성|개경]]으로 급히 귀경하여 반란군에 대항하였고, 이윽고 이성계와 조민수의 선발대들을 모두 격파하고 이어 조민수의 본대까지 격파하는 큰 활약을 보였으나<ref>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 태조실록에는 이 때 최영이 조민수의 본대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성계의 본대를 격파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최영이 조민수보다 더 나은 이성계의 본대를 상대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또 설령 조민수에게 압도적인 병력으로 최영을 붙잡아둔 후 자신은 최영의 부하인 안소가 지키는 성문 쪽으로 공격하는 작전을 쓸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이 경우 왜 '개성 전투' 이후 조민수의 영향력이 커져 그가 이성계의 뜻을 거스르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옹립시켰는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는 이성계의 본대를 최영이 격파하고 있는 사이에 조민수의 본대가 안소의 방어선을 뚫고 최영의 배후를 쳐 이성계와 조민수의 앞뒤의 협공으로 이성계가 승리할 수 있었던 정황이 추측된다.</ref> 결국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넘어서지 못해 이성계와 조민수의 반란군은 결국 [[최영]]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최영]]은 고봉현(高峰縣: 현재의 [[고양시]])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12월 [[개성|개경]]에서 참형되었으며, [[우왕]] 역시 폐위된지 1년만에 역시 아들 창왕과 함께 참형되는 비극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