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정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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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참고|위화도 회군}}
농사철을 앞둔 군사 징발에 [[왜구]]의 침탈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백성들의 원성(怨聲)은 [[이인임]]·임견미·염흥방 일파의 전횡 시대보다 더 컸다라는 이야기가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조선왕조태조실록등의 조선왕조에 의해서 쓰여진 고려시대 역사서들에서 나오나, 이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정당화하기 위한
우왕이 [[봉산군|봉산]]에 가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처음 요동 정벌 계획을 알렸을 때(음력 4월 1일), 이미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했으나 우왕은 묵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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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염병 발생의 우려가 있는 것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그러나 이 '사불가론'은 이성계 당시의 기록인 이성계의
[[우왕]]과 [[최영]]은 반대 여론을 무릎쓰고 출병을 강행하였다.
[[1388년]] [[음력 5월 22일]],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가 좌군도통사인 [[조민수]]를 회유하여 전군(全軍)을 회군시켰다.(→[[위화도 회군]]) 돌연한 회군에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개성|개경]]으로 급히 귀경하여 반란군에 대항하였고, 이윽고 이성계와 조민수의 선발대들을 모두 격파하고 이어 조민수의 본대까지 격파하는 큰 활약을 보였으나<ref>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 태조실록에는 이 때 최영이 조민수의 본대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성계의 본대를 격파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최영이 조민수보다 더 나은 이성계의 본대를 상대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또 설령 조민수에게 압도적인 병력으로 최영을 붙잡아둔 후 자신은 최영의 부하인 안소가 지키는 성문 쪽으로 공격하는 작전을 쓸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이 경우 왜 '개성 전투' 이후 조민수의 영향력이 커져 그가 이성계의 뜻을 거스르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옹립시켰는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는 이성계의 본대를 최영이 격파하고 있는 사이에 조민수의 본대가 안소의 방어선을 뚫고 최영의 배후를 쳐 이성계와 조민수의 앞뒤의 협공으로 이성계가 승리할 수 있었던 정황이 추측된다.</ref> 결국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넘어서지 못해 이성계와 조민수의 반란군은 결국 [[최영]]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최영]]은 고봉현(高峰縣: 현재의 [[고양시]])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12월 [[개성|개경]]에서 참형되었으며, [[우왕]] 역시 폐위된지 1년만에 역시 아들 창왕과 함께 참형되는 비극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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