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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 승상 주박이 죄를 얻어 자결하고 다음 승상이 된 [[평당]]은 곧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다음 [[왕가 (전한)|왕가]]는 애제와 대립하였다. 어느 쪽도 공광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들었고, 애제 역시 그렇게 생각하였다.
 
[[원수 (전한 애제)|원수]] 원년([[기원전 2년]])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는데, 열흘 정도 지나서 부태후가 사망하였다. 이에 공광이 소환되어 일식에 대해 묻는 애제에게 공광은 이러한 재이를 교훈삼아 더욱 정무에 힘써야 한다고 진언하였고, 애제는 기뻐하며 공광을 광록대부·급사중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되어 승상 왕가가 옥사하고 어사대부 [[가연 (전한)|가연]]도 파면되어, 공광이 다시금 어사대부가 되었고 이어 승상으로 복귀, 박산후에 봉해졌다.
 
이듬해인 원수 2년([[기원전 1년]])에 [[삼공 (관직)|삼공]]의 관직을 정하고, 승상에서 대사도(大司徒)로 개칭되었다. 그 직후에 애제가 서거하고 태황태후(太皇太后) [[왕정군]]과 [[왕망]]에 의해 중산왕이 황제로 추대되어([[전한 평제|평제]]) 정치는 왕망에게 넘겨졌다. 왕망은 태후 왕씨가 공광을 존경하고 있음을 알고 자신이 공격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공광에게 이러한 상주를 할 것을 시사하곤 하였다. 왕망의 권력이 나날이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공광은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망은 태후 왕씨에게 황제의 나이가 어려 스승이 필요하다고 아뢰었고, 공광은 [[태부]]로 취임되고 급사중이 되어 금중의 숙위나 문호(門戸)를 관할하였다. [[원시 (전한)|원시]] 원년([[1년]])에는 [[태사]]로 승진되고 왕망은 태부가 되었다. 공광은 평소에 병이라 칭하였고 왕망과 한 자리에 나란히 있지 않았다. 왕망은 공광에게 자신의 덕을 기리고 재형(宰衡)으로 삼아줄 것을 상주하도록 시사하였고 공광은 두려워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왕태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잡아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