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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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ight2000 (토론 | 기여) →임진왜란과 의병 조직: 실록에 나타난 공적이 거의 없다. 공적 삭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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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선조 26년) 어머니의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 아울러 장성현감 이귀(李貴),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의 추천으로 [[선조]]로부터 표창을 받아서, 이듬해 1월 5일 [[선전관]]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이때 아직 군공이 없다는 이유로 고관에 제수하지는 못하였다.<ref> [http://sillok.history.go.kr/id/wna_12701005_001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5일 甲申 1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김덕령을 선전관에 제수하다] </ref>
[[1594년]](선조 27년) 1월 김덕령은 의병을 이끌고 전남 담양에서 출발하여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서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받았다. 이어서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의병장 [[곽재우]]와는 막역한 사이로, 작전을 함께하기도
[[1595년]](선조 28년) 고성 지방에 상륙하려는 왜군을 격퇴하여 선조로부터 충용군이란 군호를 받았다. 이후 장문포에서 충무공 이순신과 수륙 연합전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진해 고성 지방을 방어하였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여러 차례 걸쳐 왜군을
[[1596년]](선조 29년) 1월, 지난해 김덕령이 함부로 사람을 죽인 일로 국문을 당했다. 그는 지난해에 첩보(牒報)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다.<ref name='ss290201'>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902001_004 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2월 1일 무술 4번째기사 잡아다가 국문하던 의병장 김덕령을 특명으로 석방시키다] </ref> 또한 도제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는데,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덕령은 윤근수의 앞에서는 수락하였다가 그가 떠나자 그 종의 아비를 결국 매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ref name='ss290201' /> 게다가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ref name='ss290201' /> 이로 말미암아 [[윤근수]]에게 체포되었으나, 김덕령이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였음에도, 사헌부에서 처벌을 간하였으나,<ref name='ss290201' /><ref>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1013_001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13일 경진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김덕령의 처벌과 그를 처벌하지 않은 형조 당상·색낭청의 추고를 청하다] </ref> 선조는 2월
이후 담양에서 출발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전공을 올리지 못하고 있던 중 그의 엄격한 군율에 불만을 품은 의병들의 원성이 조정에 전해지자 김덕령은 부하장졸에게 가혹한 군률을 시행했다는 이유로 체포, 구금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우의정]] [[정탁]](鄭琢)이
=== 이몽학의 난과 압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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