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김덕령(金德齡, 1567년~1596년 8월)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景樹),[1]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별칭은 신장(神將), 충용장(忠勇將), 익호장군(翼虎將軍)이다.

김덕령
출생 1567년
조선 전라도 광주군 광주읍(현 광주광역시)
사망 1596년 8월
조선 한성부
사인 모함으로 인한 옥사(고문 후유증)
거주지 조선 전라도 광주
성별 남성
국적 조선
별칭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 별칭은 신장(神將), 충용장(忠勇將), 익호장군(翼虎將軍).
학력 한학 수학
직업 군인, 의병장
종교 유교(성리학)
부모 부 김붕섭, 모 남평반씨(반계종의 딸)
배우자 이씨
자녀 김광옥(金光沃)
친척 형 김덕홍(金德弘), 동생 김덕보(金德普), 처남 이인경(李寅卿)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지방에서 의병 5,000명을 모집하여 출정하였다. 이에 당시 전주에 내려와 있던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의 군호를 받았다. 1596년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였으나 그와 내통한 충청도 순찰사의 무고로 투옥되어 옥사하였다.

1661년 현종 2년 김덕령 장군의 억울함이 신원되어 관직이 복구되었다. 1788년(정조 12년) 장군의 충효를 기리고자 사당을 건립하여 배향하는 한편 충장공의 시호를 내렸다.

목차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김덕령은 1567년 광주(光州) 충효동 성안 마을에서 아버지 김붕섭(金鵬燮)과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인 어머니 남평반씨(南平潘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에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별칭은 신장(神將)으로 이는 임진왜란 때 얻은 별명이었다.

자는 경수였고,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등 무예를 익혔다.

임진왜란과 의병 조직편집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란 발생초에 의병을 일으키코자 하였으나 노모의 봉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었다. 그는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을 찾아가, 고경명의 막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며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그러나 형 김덕홍이 금산싸움에서 전사하고 노모마저 1593년 8월에 세상을 떠나자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1593년 어머니의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 아울러 장성현감 이귀(李貴),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의 추천으로 선조로부터 표창을 받고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년) 1월 김덕령은 의병군이끌고 전남 담양에서 출발하여 해안가로 올라오는 왜군을 쳐부순뒤 진주에 주둔하였다. 군율은 엄하였고 그는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여러 도의 의병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의병을 관군에 흡수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의병들을 모두 김덕령 군에 소속시키었다. 그의 의병부대의 수는 증가했으나 명나라 군과 관군에게 전쟁의 주도권이 넘어갔고, 왜군들도 경남의 연안에 은거하면서 접전을 피하고 있었으므로 김덕령의병군은 별다른 접전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서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받았다. 이어서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의병장 곽재우와는 막역한 사이로, 작전을 함께하기도 했으며 군공을 세웠다.

1595년 고성 지방에 상륙하려는 왜군을 격퇴하여 선조로부터 충용군이란 군호를 받았다. 이후 장문포에서 충무공 이순신과 수륙 연합전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진해 고성 지방을 방어하였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여러 차례 걸쳐 왜군을 무찌름으로 위명이 높아갔다.

1596년 도제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다.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덕령은 거절하였고, 결국 매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윤근수에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풀려났다. 이후 담양에서 출발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전공을 올리지 못하고 있던 중 그의 엄격한 군율에 불만을 품은 의병들의 원성이 조정에 전해지자 김덕령은 부하장졸에게 가혹한 군률을 시행했다는 이유로 체포, 구금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우의정 정탁(鄭琢)이 그의 공적을 칭송하며 석방을 탄원하는 등 정탁의 적극적인 사면 요청에 의해 석방된다.

이몽학의 난과 압송편집

후에 1596년(선조 29) 7월 충청도 홍산 지역 근처에서 왕족 이몽학(李夢鶴)이 일으킨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뒤, 의병을 모집하여 진압하기 위해 충청도로 상경하다 반란이 진압되어 돌아갔다. 그러나 반군을 문초하던 중 최, 홍, 김이 적힌 패가 나와 문초하니 고문에 견디다 못한 졸개가 최담령, 홍계남, 김덕령 등 명망 있는 장수들의 이름을 무고했다. 이에 무과에 급제한 정식 장수이면서도 후방에 배치되거나 김덕령의 막하에서 종군했던 것을 불만으로 여기던 신경행이 무고로 난에 연루되어 김덕령을 체포하였고, 마침내 8월 4일 반란수괴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죄명으로 압송당하여 선조가 친히 국문을 열었다. 우의정 정탁 등의 구명, 탄원노력에도 불구하고 형문은 계속되었다.

1596년 8월 선조는 21일까지 그에게 6회 연속으로 직접 형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혐의를 승복하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옥사편집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류성룡은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윤근수의 형제이기도 했던 서인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엄벌을 주장했다. 수백 번의 형장 심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덕령은 결국 장독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춘산에 불이 나니’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별장 최담령(崔聃齡)·최강(崔堈)을 사면하여 덕령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양남(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시켰다. 최담령은 덕령과 함께 용력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는 어리석은 겁보인 체하여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 후에 신원되고 난 뒤에도 역적죄가 있던 터라 문중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혀 있었는데,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가 옮겨지게 되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 장군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치 않던 터라, 사진기를 무덤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2]하지만 김덕령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현재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에 전시되고 있다.

20여일에 걸친 혹독한 심문에 팔다리가 모두 부러진 채 끝내 옥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사망당시 향년 30세였다.

죽은 이후 관직편집

그의 작품 중 죽기 전에 지었다는 시조(詩調)인 〈춘산곡〉(春山曲)이 전한다. 부인 홍양 이씨는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에서 일본군에게 쫓기다 절벽으로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아들 '김광옥'은 전라북도 익산군 용안면에 숨어살며 본관(本貫)을 용안(龍安)으로 바꾸고 신분을 감추며 살았다. 그 뒤 '김광옥'은 외삼촌인 이인경(李寅卿)의 부임지인 평안북도 안주군 운곡면 쇠꼴이로 이주하여 후손을 이어간다.

1661년(현종 2)에 억울함이 밝혀져서 신원(伸寃)되고 관작을 복관해 주었다. 1668년(현종 9)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되고, 1680년(숙종 6) 장군의 충효를 기리는 사당을 의열사(義烈祠)로 사액하였다.

1785년(정조 9)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장공(忠壯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1788년(정조 12)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마을에 ‘증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1789년(정조 13) 자급(資級)을 의정부 좌찬성 종1품에 추증하고, 부조(不逝)를 명(命)하였다. 장군이 태어난 마을 이름도 생계(牲繫)에서 오두(烏頭)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춘산곡〉편집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설화편집

조선 중기의 명장 김덕령에 관한 설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김덕령을 주인공으로 하는 인물전설이다. 문헌설화는 《연려실기술》·《동야휘집》·《풍암집화》·《대동기문》 등에 전하며, 구전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스승인 성혼 문하에서 김덕령과 함께 배운, 묵재 이귀(李貴[3])는 김덕령의 양편 겨드랑이에 호랑이 2마리가 출입한다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다.[4]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김붕섭(金鵬燮)
  • 어머니 : 남평반씨(南平潘氏), 직장 반계종(潘繼宗)의 딸
    • 형 : 김덕홍(金德弘)
    • 동생 : 김덕보(金德普)
    • 부인 : 흥양이씨(興陽李氏)
      • 아들 : 김광옥(金光沃)
    • 처남 : 이인경(李寅卿)
  • 외조부 : 반계종(潘繼宗)

연관 인물편집

성혼, 김덕홍, 고경명, 윤근수, 윤두수, 이귀, 곽재우, 최경회, 최담령, 이몽학

김덕령과 관련된 것편집

  • 그의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 미상의 전기 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읽어보기편집

각주편집

  1.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김덕령
  2. 김영헌, 김덕령 평전 - 임진왜란 최후의 의병장, 광주 (북구 일곡동) : 향지사, 2006년.
  3. 후일 인조반정에 참여한다.
  4. 선조실록 148권, 선조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3월 6일(무진) 3번째기사 "대사헌 정인홍이 차자를 올리다"

관련 항목편집

참고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