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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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년]](선조 28년) 지난해 고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일로 선조로부터 충용군이란 군호를 받았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여러 차례 걸쳐 왜군을 싸웠으므로 위명이 높아갔다.
[[1596년]](선조 29년) 1월, 지난해 김덕령이 함부로 사람을 죽인 일로 국문을 당했다. 그는 지난해에 첩보(牒報)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다.<ref name='ss290201'>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902001_004 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2월 1일 무술 4번째기사 잡아다가 국문하던 의병장 김덕령을 특명으로 석방시키다] </ref> 또한 도제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는데,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덕령은 윤근수의 앞에서는 수락하였다가 그가 떠나자 그 종의 아비를 결국 매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ref name='ss290201' /> 게다가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ref name='ss290201' /> 이로 말미암아 [[윤근수]]에게 체포되어 김덕령이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였음에도, 사헌부에서 처벌을 간하였다.<ref name='ss290201' /><ref>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1013_001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13일 경진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김덕령의 처벌과 그를 처벌하지 않은 형조 당상·색낭청의 추고를 청하다] </ref>
이후 담양에서 출발한 지 3년이 지나도록
=== 이몽학의 난과 압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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