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LKMAION1000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28번째 줄:
{{전역상자 러시아 혁명}}
{{전역상자 러시아 내전}}
'''10월 혁명''', 혹은 '''볼셰비키 혁명''' (十月革命, {{llang|ru|Великая Октябрь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cкая революция}})은 [[1917년]] 2월 혁명에 이은 [[러시아 혁명]]의 두 번째 단계이다. 10월 혁명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도하에 [[볼셰비키]]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반한 [[20세기]]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혁명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10월 혁명의 진짜 주체는 레닌 등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아닌, [[민중]]들이었다. 그래서, [[모스크바]]에 특파원으로 와 있던 [[일본]] 언론인은 민중혁명의 기운이 달아오른 모습에 대해 "노동자와
10월 혁명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분열하여 형성된 좌파 세력인 [[볼세비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일련의 [[러시아 혁명]] 속에서 [[로마노프 왕조]]의 제정을 붕괴시키고 공화국을 탄생시킨 [[러시아 2월 혁명|2월 혁명]]에 이은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10월 혁명에서는 2월 혁명으로 출범한 [[입헌민주당 (러시아)|입헌민주당]](카데트) 주도의 임시정부가 쓰러지고 임시정부와 병존하고 있던 볼세비키 중심의 [[소비에트]](노동자, 농민,
당시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채택하고 있었으며, 현재의 [[태양력]]에 비해 13일이 늦었다. 따라서 양력으로 계산하면 11월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고유명사로 고착되어 계속 10월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48번째 줄:
[[러시아 2월 혁명|2월 혁명]]으로 성립된 임시 정부의 실권은 [[사회혁명당]]의 두마 의원으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이었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쥐고 있었다. 전쟁에 지쳐 평화를 바라는 병사에 반해 육군 장관을 겸임하였던 케렌스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지속을 주장했다. [[6월 16일]] (율리우스력), 그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에 갈리시아 공격을 시작한다. (케렌스키 공세) 서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사기 하락으로 전선은 붕괴되고 [[7월 2일]]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7월 6일]]에는 반대로 독일군 -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러시아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급기야 8월에는 독일군의 리가 공세로 리가를 빼앗겼다.
이 공격 실패를 계기로
이 봉기 이후 임시 정부는 볼세비키가 반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메지라이온트의 지도자들 중 특히 트로츠키는 노동자와 군인들을 격려하고 요페 이후에 "봉기를 위한 조직이 수행하는 모든 실질적인 활동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트로츠키의 지휘를 따르도록 했다"고 쓰고 있다. 이것을 병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트로츠키와 그것을 위협으로 느낀 [[스탈린]] 사이에 권력 투쟁의 시작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요페와 유레네프는 이후 혁명노선을 지지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실행하며 볼세비키의 페트로그라드 제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9번째 줄:
코르닐로프가 실제로 독재의 음모를 진행해하고 있던 내용도 현재도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가 볼세비키의 협박이나 강요 아래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러시아 국민에게 "죽어 가고 있는 러시아의 대지를 지켜라"라며 당부, 궐기하였다.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에 직면한 케렌스키는 임시정부 군인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볼세비키의 적위대 등 무장 세력에 구원을 요청하며, 무기까지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볼세비키의 설득을 받은 군인과 러시아군 병사들이 코르닐로프를 배신함으로써 유혈사태에까지 이르지 못한 채 실패하고 코르닐로프과 그 지지자 7,000여명이 체포됐다.
===
[[1917년]] [[10월 10일]]([[율리우스력]]), 볼세비키 중앙위원회는 투표를 실시하여 10대 2로 무장봉기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으며, 시기가 무르익었다"라는 선언을 채택했다.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는 [[10월 12일]](율리우스력)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이것은 원래 페트로그라드의 방위를 목적으로 [[멘세비키]]가 제안한 것이었지만, 무장봉기를 위한 기관을 필요로 하고 있던 볼세비키는 찬성했다. 트로츠키는 "우리는 권력 탈취를 위한 사령부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고 연설하고 노골적으로 무장봉기의 방침을 인정했다. 그는 권력 장악을 승인하기 위해 [[10월 25일]](율리우스력) 개회 예정인 제2회 전국 소비에트 대회에 맞춰 봉기하자고 주장했다. [[멘세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 참여를 거부했고, 위원회의 구성 멤버는 볼세비키 48명, 에스에르 좌파 (사회혁명당 좌파) 14명, 무정부주의자 4명이 되었다.
그 이후 군부의 각 부대가 차례로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에 대한지지를 표명했고, 임시정부가 아닌 소비에트의 지시에 따를 것을 결정했다.
69번째 줄:
[[10월 23일]] ([[그레고리력]] 11월 5일), 볼세비키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에스토니아 인의 [[얀 안벨트]](Jaan Anvelt)는 혁명 이후 설립된 [[에스토니아]] 자치 정부의 수도 [[탈린]]에서 좌익 혁명 세력을 이끌고 무장 봉기를 시작했다. [[10월 24일]], 마지막 반격을 시도했던 임시정부는 부대를 동원하여 볼세비키의 신문 《라보치 프치》, 《소르다트》의 인쇄소를 점거했지만, 군사혁명위원회는 이것을 계기로 무력 행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적위대는 별 저항없이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페트로그라드의 인쇄소, 우체국, 발전소, 은행 등 요충지를 제압했고, [[10월 25일]](양력 11월 7일)에 '임시 정부'는 타도되었다. 국가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임시정부의 각료가 남아 있는 [[겨울 궁전]]에 대한 점령은 25일 오후 9시 45분 방호 순양함 〈아브로라〉 공포사격을 신호로 블라디미르 안토노프 오후세엔코 이끄는 부대가 진입하기 시작했다. 겨울 궁전은 러시아군과 사관학교 생도, 여군이 방어를 맡고 있었지만, 거의 저항없이, 26일 새벽 오전 2시경에 점령되었다. 속수무책으로 회의를 계속했던 각료들은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마지막으로 겨울 궁전을 탈출하여 외국으로 망명했다.
76번째 줄:
== 결과 ==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1927년]] 혁명의 10주년을 기념하며 소련에서는 이 혁명의 공식 명칭을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으로 결정했으며, 이 이름은 현재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