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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金德齡, [[1567년]]~[[1596년]] [[8월]])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김씨|광산]], 자는 경수(景樹),<ref>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b_A1567_1_0001427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김덕령] </ref>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별칭은 신장(神將), 충용장(忠勇將), 익호장군(翼虎將軍)이다.
 
[[임진왜란|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지방에서 의병 5,000명을 모집하여 출정하였다. 이에 당시 전주에 내려와 있던 [[조선 광해군|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의익호장의 군호를 받았다. 1596년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였으나, 그와 내통한 충청도 순찰사의 무고로 투옥되어 옥사하였다.
 
1661년 (현종 2년) 김덕령 장군의 억울함이 신원되어 관직이 복구되었다. 1788년([[조선 정조|정조]] 12년) 장군의 충효를 기리고자 사당을 건립하여 배향하는 한편 충장공의'''충장공'''의 시호를 내렸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