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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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8월]] 선조는 21일까지 그에게 6회 연속으로 친국하였으나, 그는 혐의를 승복하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 옥사죽음 ===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류성룡]]은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윤근수의 형제이기도 했던 서인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엄벌을 주장했다. 수백 번의 형장 심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덕령은 결국 장독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s:춘산에 불이 나니|춘산에 불이 나니]]’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별장 최담령(崔聃齡)·최강(崔堈)을 사면하여 덕령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양남(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시켰다. 최담령은 덕령과 함께 용력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는 어리석은 겁보인 체하여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
후에 신원되고 난 뒤에도 역적죄가 있던 터라 문중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혀 있었는데,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가 옮겨지게 되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 장군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치 않던 터라, 사진기를 무덤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ref>김영헌, 김덕령 평전 - 임진왜란 최후의 의병장, 광주 (북구 일곡동) : 향지사, 2006년.</ref>하지만 김덕령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현재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에 전시되고 있다.
 
20여일에20여 일에 걸친 혹독한 심문에 팔다리가 모두 부러진 채 끝내 옥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사망당시 향년 30세였다.
 
=== 죽은 이후 관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