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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유럽까지 진출입니까 출처가 전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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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초'''(班超, [[32년]] - [[102년]])는 [[중국]] [[후한]]의 무장이다. 문사가문 출신으로, 서안 근처의 샨시성 함양(咸陽)에서 태어났다. 역사가 [[반표]]의 아들이자, 《[[한서]]의 저자인 [[반고 (후한)|반고]]의 아우로 이 세 사람을 삼반(三班)이라 칭한다. 자는 중승(仲升).
 
그의 선임자였던, [[곽거병]]이나 [[위청 (장군)|위청]]처럼 [[타림 분지]]에서 [[흉노족]]을 효율적으로 방어했으며, [[광무제]]의 통치 기간 기마부대를 이끌고 흉노를 격퇴하고격퇴하기도 [[서역]]([[중앙아시아]])의하고 지배권을패배하기도 확보하였다하였다.
 
[[전한]]의 [[장건]]의 활약 이후 끊겼던 [[실크로드]]에서 다시 개척하여사절단으로 후한과파견되어 서역의서역과 교역길을무역을 열었다. 그의 원정대는 [[파르티아]]와 [[카스피 해]]까지 이르렀다고 한다있었다.
 
== 서역사절단으로 원정파견 ==
[[파일:Kashugar pantuo 7159.JPG|섬네일|250px|[[카슈가르]] 반초성의 반초의 동상]]
반초는 91년 둔황지역에서 [[서역도호부]]의 도호가 되었다. 97년에는 [[톈산 산맥]]과 [[파미르고원]]을 7만명의 경기갑 군사로 횡단하여 실크로드를 어지럽히던 흉노와 전쟁하였다.
반초는 91년 [[서역도호부]]의 도호가 되었고, [[쿠차]]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했다. 97년에는 [[톈산 산맥]]과 [[파미르고원]]을 7만명의 경기갑 군사로 횡단하여 실크로드를 어지럽히던 흉노나 [[훈족]]을 토벌했다. 파르티아의 [[파코루스 2세]]와 동맹을 맺어 동쪽으로는 [[파르티아]],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의 해변과 [[투르크메니스탄]]의 [[메르브]]까지 그의 기지를 확장했다. 여기서 [[감영 (한나라)|감영]]이라고 부르는 그의 수하 장수를 특사로 [[로마]]에까지 파견했다고 전해진다. [[감영 (한나라)|감영]]은 유럽에 중국의 흔적을 남긴 최초의 중국인이었고, 실제로는 [[흑해]]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감영]]은 한나라와 유럽의 직교역에 위기를 느낀 [[파르티아]] 상인들의 방해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파르티아]]와의 동맹으로 설치된 [[한나라]] 군대의 기지는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이란)과 며칠 거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바그다드]]와 52 km 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한나라 군대는 이 지역을 몇 년간 다스렸다. 116년 로마의 황제 [[트라이아누스]]는 [[파르티아]]로 진격하여 [[크테시폰]]으로 진격을 했는데, 한나라의 요새와는 하루 거리였지만, 직접적인 접촉은 일어나지 않았다.
 
100년 (영원 12년) 반초는 서역에둔황에서 31년 동안 머물다가 고향이한나라 그립다고수도 조정에낙양으로 귀국돌아가겠다는 탄원서를 냈다. 102년에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지고, [[낙양]](洛陽)에 돌아온 반초는 고향에서 사망하게 된다. 반초가 없어지자, 흉노는 활발하게 정복 활동을 벌이고 서역은 곧둔황이 흉노의 세력에지배하에 떨어졌다들어가 서역으로 무역은 끊기게 된다. 그 후 한은한나라는 몇 번이나 서역에서역(둔황) 군대를 보내지만, 반초가서역 지역에 강력한 있던국가들이 시절의생겨나 영토는다신 되찾을 수 없었다.
 
==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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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나라의 장군]]
[[분류:한나라의 외교관]]
[[분류:중국의 탐험가]]
[[분류:중앙아시아 탐험가]]
[[분류:육군 군인]]
[[분류:산시성 (섬서성) 출신]]
[[분류:1세기 중국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