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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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져진 안정을 기반으로 등극한 [[세종대왕]]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이 시기에는 [[성리학|주자학]]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정착하였으며, 고려 말에 들여온 면화가 보급되어갔다. 또 국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북방 지역인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국경선을 확정시켰으며,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 발전 등을 통해 [[왜구]]의 약탈을 방지하였다. 또한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했다. 또한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금속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였다. 개량된 금속활자로 여러 가지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의서 편찬(《향약집성방》)을 통해서 의료 관계 개선이 집약적으로 이루어졌다.
 
세종의 맏아들 [[조선 문종|문종]]이 짧은 치세 뒤에 서거하고 문종의 아들 [[조선 단종|단종]]이 뒤를 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단종은 곧 병권을 장악한 세종의 차남이자 숙부되는숙부 되는 [[조선 세조|수양대군]]에게 빼앗겼다. 세조는 아버지 세종이 채택한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조부 태종이 주창한 육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신하가 숙청당하고 많은 학자를 양성하였던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세조는 [[조선 태종|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세조의 손자인 [[조선 성종|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 제도를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학을 장려하여 사라진 집현전의 기능을 담당한 [[홍문관]]을 설치하고, 수많은 역사책을 편찬했으며, 세종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이였던 《[[경국대전]]》 의 편찬을 완성하였다. 성종은 《경국대전》의 편찬을 반포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였다. 또한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거듭된 실정에 견디지 못해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 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는 [[조선 명종|명종]] 때 비로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 때부터이때부터 사림은 [[동인 (정치)|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 중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