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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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
=== 고대 ===
원래는 무자시노 구니노미야쓰코(无邪志国造, 牟邪志、无謝志라고도 한다)와 무사시노 구니노미야쓰코(胸刺国造), 지치부노 구니노미야쓰코(知々夫国造) 이렇게 세 개의 구니노미야쓰코(国造)가 존재하였으나, 6세기 오늘날의 사이타마 현 [[교다시]](行田市)를 본거지로 하는 무사시노 구니노미야쓰코의 난(武蔵国造の乱)이 발발한 뒤, 이들 구니노미야쓰코의 영역을 합쳐서 7세기에 무사시 국이 성립되었다. 다이카(大化) 원년([[645년]])에 나니와 궁(難波宮)에서 [[다이카 개신]](大化の改新)이 행해지고 호즈미노 구이(穂積咋) 등이 도고쿠(東国)의 구니노쓰카사(国司)로 임명되었고, 또한 [[지토 천황]](持統天皇) 4년([[690년]])에 일본 조정은 신라에서 망명한 [[대나마|한나마]](韓奈末) 허만(許満) 등 12명을 무사시로 이주시켰다. 이후 [[716년]]에 다시 스루가 등 7개 구니에 이주되어 있던 옛 고구려인 1,799명을 무사시 국 일부로 옮기고 고마 군(高麗郡)을 설치하였는데<ref>[https://dl.ndl.go.jp/info:ndljp/pid/991092/55 経済雑誌社編『国史大系 第2巻 続日本紀』経済雑誌社、1897年、pp.98-99]、[https://dl.ndl.go.jp/info:ndljp/pid/2563116/8 『続日本紀 巻7』1657年刊行]</ref> 고마 군의 초대 군수(郡司)는 666년에 고구려에서 사신으로 일본에 왔다가 고구려가 멸망하고 일본으로 귀화한 고려약광(高麗若光)이었고, 이후 그의 후손들은 그곳에 머물러 살면서 고마 씨를 칭하였다.
 
다이호(大宝) 3년([[703년]])에는 히키타 지(引田祖父)가 무사시 국의 카미(守)로 임명되었다. [[게이운]](慶雲) 5년([[708년]])에는 지치부 군(秩父郡)에서 화동(和銅) 즉 따로 정련시킬 필요가 없는 천연 구리가 발견되어 일본 조정은 이를 기념하여 연호까지 「와도」(和銅)로 고쳤다. 와도 3년([[710년]])에 무사시노 구니노미야쓰코의 난 당시 바쳐졌던 다히 둔창(多氷屯倉) 내, 오늘날의 일본 도쿄도 후추 시(府中市)에 무사시 고쿠후(国府)가 세워졌다. 이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둔창이 설치되었고<ref>『日本歴史地名大系 13 東京都の地名』(平凡社2002年)p1072〈府中市〉</ref> 또한 교통 ・ 산업상의 중요도를 차츰 늘리기 시작한 남부 다마가와(玉川) 중부 유역에 면해 있는<ref>『東大寺と国分寺 日本歴史新書』(石田茂作著 至文堂 1968年) p63</ref> 점도 감안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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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시 국은 역사적으로 그 북부가 게노 국(毛野国)과 관계가 깊었고, 당초에는 같은 도산도(東山道)에 속해 있었다. 도산도는 수도 교토가 위치한 기나이(畿内)에서 게노 국을 지나 [[무쓰 국|미치노쿠]](陸奥)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고쿠후가 위치한 후추는 그 지름길로부터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닛타(新田) ・ 아시카가(足利)에서 뻗어나와 무사시 국을 거의 가로지르는 지선인 도산도 무사시노미치(東山道武蔵路)가 설치되었다. 그 뒤 무사시 국은 그 남부에 있어사가미 및 도쿄만(東京湾)을 경유해서 오가는 것이 차츰 활발해져서 [[호키]](宝亀) 2년([[771년]]) 10월 27일에 도카이도로 이관되어 사가미 ・ 무사시 ・ [[가즈사 국|가즈사]](下総)를 잇는 육로도 정비되었다. [[진고케이운]](神護景雲) 2년에 일본 조정은 전국에서 행실이 선하다는 평을 받은 자들을 선발해 종신토록 세금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는데, 마찬가지로 호키 3년에 이루마 군(入間郡) 사람으로 야타노베노 구로마로(矢田部黒麻呂)가 효양(孝養)을 이유로 종신토록 전조(田租)를 면제받는다는 혜택을 입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인 [[엔초]](延長) 5년([[927년]]) 완성된 《엔기시키》(延喜式)에 따르면 관에서 운영하는 칙지목(勅旨牧) 즉 국영 목장 네 곳이 무사시에 설치되었다. 일본 조정에서는 해마다 50두의 말을 가려 바치게 하였고, 그 뒤로도 칙지목은 더욱 늘어나서, 이를 관리하기 위해 중앙으로부터 군사귀족이 파견되고 재청관인(在庁官人)이 실무를 맡았다. 그러나 딱히 평온하다고 할 수만은 없었고, [[덴교]](天慶) 2년([[939년]]) 무사시의 스케(介)로 부임한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経基)와 아다치 군수 무사시노 다케시바(武蔵武芝)와의 분쟁은 조헤이 덴교의 난(承平天慶の乱)이라 불리는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 중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