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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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天正) 4년([[1576년]]) 노부나가는 자신의 적자인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를 기후의 성주로 삼고, 오다 집안의 가독 및 미노, 오와리 2개 구니(国)를 넘겨 주었다. 기후 성의 정비 및 개수는 노부타다에 의해 더욱 추가되었다. 덴쇼 10년([[1582년]]) 6월 2일,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당시 기후 성의 유수(留守)를 맡고 있던 사이토 도시타카(斎藤利堯)가 기후 성을 장악, 미노 세이류지(瑞龍寺) ・ 스후쿠지(崇福寺) ・ 덴주도(千手堂) ・ 사이뉴지(西入寺) 등의 사찰에 금제(禁制)를 보냈다. 하지만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 패한 6월 20일경, 후와 군(不破郡)의 나가마쓰(長松)로 향한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가 기후 성을 회복하였다. 6월 27일 [[기요스 회의]](清洲会議)에서 노부타카가 형 노부타다가 남긴 영지 미노 국을 배령받고, 기후 성의 성주 및 노부타다의 적자였던 산보시(三法師)의 후견이 되었다. 12월 20일, 하시바 히데요시와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의 적남(嫡男)・모토스케(元助) 등의 병사가 기후 성으로 몰려오자 노부타카는 강화를 맺고 산보시를 넘겨 주었다.
 
덴쇼 11년([[1583년]]) 4월 16일, 오다 노부타카는 나가지마 성의 성주 [[다키카와 가즈마스]](滝川一益)와 호응해 다시 한 번 거병하였다. 그러나 미노로 돌아온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에게 패하고([[시즈가타케 전투]]), 형 노부카쓰(信雄)에 의해 기후 성이 포위당하자 항복하였다. 당시 성으로부터 빠져나와 달아나는 자가 속출했기에, 항복할 때는 성에 남아 있는 사람이 27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 뒤 노부타카는 할복하였다. 5월에 이케다 쓰네오키가 미노 국에서 13만 석을 받아 오가키 성(大垣城)의 성주가 되고, 이케다 모토스케가 기후의 성주가 되었다. 이케다 쓰네오키 - 모토스케 부자는 이듬해 [[고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하시바 히데요시 편에 서서 싸우다 전사했다. 기후의 주인이 된 것은 쓰네오키의 차남 [[이케다 데루마사|데루마사]](輝政)로, 덴쇼 13년([[1585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데루마사는 덴쇼 19년([[1591년]]) 4월에 전봉되고, 새로 도요토미 히데카쓰(豊臣秀勝)가 기후 성의 성주가 되었다.
 
[[분로쿠]](文禄) 원년([[1592년]]) 9월 9일 히데카쓰가 사망하고, 기요스 회의에서 노부나가의 후사로 옹립되었던 노부타다의 적자 산보시 즉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가 미노 국 기후 13만 석을 영유하고 기후 성의 성주가 되어, 기후 성은 다시금 오다 집안의 소유로 돌아왔다. 오다 히데노부는 [[게이초]](慶長) 5년([[1600년]])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거병에 호응해 그를 따라 서군에 가담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라 불리게 될 전투의 전초전이 기후 성에서 벌어졌는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나 한때 기후의 주인이었던 이케다 데루마사 등의 공격으로 기후 성은 함락되었다(기후 성 전투岐阜城の戦い). 히데노부는 동생 히데노리(秀則)와 함께 자결하려 했으나, 데루마사의 설득으로 항복하였고, 게이초 10년([[1605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