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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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국에서 육상과 해상을 통한 국제교역의 증대는 기존의 화폐 제도에도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중국은 원래 동전을 주된 화폐로 사용하는 동본위 제도를 채택해 왔으나, 동은 무거웠기 때문에 고액의 광역적인 결제 수단으로서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송대부터는 일종의 약속어음과 같은 교자라는 것이 상인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남송과 금나라 시대에는 교자 혹은 교초라고 불리는 지폐의 사용이 확대되기 시작했다.<ref name="김호동">김호동 《[https://books.google.co.kr/books?id=dYSYBgAAQBAJ&pg=PT225&lpg=PT225&dq=%EA%B5%90%EC%B4%88(%E4%BA%A4%E9%88%94)&source=bl&ots=Q8Yx_xRwai&sig=ACfU3U3MP5FyHdYfjvByr0zQODfrc8OSUQ&hl=ko&sa=X&ved=2ahUKEwiVudzTqcfqAhVWUd4KHU-_DOIQ6AEwBXoECAcQAQ#v=onepage&q=%EA%B5%90%EC%B4%88(%E4%BA%A4%E9%88%94)&f=false 몽골 제국과 세계사의 탄생]》</ref>
금 왕조는 송대에 사용하던 교자를 이어받아 12세기에
원 왕조는 우구데이 칸(원 태종) 때 교초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ref name="실크로드 사전"></ref> 몽골 제국이 금 왕조를 멸망시킨 뒤, 금 왕조의 화폐 제도를 이어받아서 [[1236년]]에 교초를 발행하였다.<ref>湯浅 (1998) p.173</ref> 강남(江南)의 남송을 정복하기 전에는 동이 부족했다는 점도 몽골 제국이 교초를 발행하게 된 한 이유였다. 몽골 제국에 출사했던 [[야율초재]](耶律楚材)는 금 왕조의 선례를 본받아 교초의 발행량을 조정해야 한다고 제언했고, 당초에는 1만 정(錠, 50만 관)이 상한으로 정해졌다. 우구데이 칸의 시대에는 다른 몽골족이나 한인(漢人) 출신의 제후들도 지폐를 발행하였고,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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