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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정조 13년) 조정의 명령으로써 방손 한 사람을 선택하여 공의 제사를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는데, 그 사람은 김덕보의 아들 김거(金璩)의 7세손 김홍기(金洪基)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04006_002 정조실록 27권, 정조 13년 4월 6일 임진 2번째기사 1789년 청 건륭(乾隆) 54년 김덕령의 옛 신주의 매안 문제 등 상언한 19건을 판하하다]</ref><ref> [http://www.gjsgcc.or.kr/ko/29/view?SEQ=1610 김덕령-형조좌랑증좌찬성충장김공신도비명] </ref>
 
[[1791년]](정조 15년) 숙종대에 편찬한 《김덕령유사》를 왕명으로 다시 간행한다.간행하매, [[서용보]](徐龍輔)에게는 《[[김충장공유사]]》로 이름을 바꾸어 편집케 하였다.<ref name='h386447' /><ref name='kva_11504026_003'>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04026_003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4월 26일 경오 3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임경업실기》와 《김덕령유사》를 편집하도록 명하다] </ref>
 
김덕령을 모시던 광주 의열사는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뒤 복원되지 못한 채 지내다가 1971년 각지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충장공 김덕령장군사우 복원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원 등 정부의 지원을 받아 광주 충효동에 자리를 잡고 1974년 11월 김덕령과 가족을 이장하고 1975년 2월 가족묘 앞에 충장사(忠壯祠)가 건립되었다.{{sfnp|오수열|황태섭|2014|p=15}}